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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세계 최초의 ICBM R-7 세묘르카 개발사

바래미나 2018. 1. 13. 16:10

 

러시아에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세계 최초의 ICBM R-7 세묘르카 개발사

R-7A ICBM의 발사 장면 <출처: Public Domain>

개발의 역사

소련은 1945년 8월에서야 원자폭탄 개발을 시작했다. 1940년 6월부터 핵분열 연구를 시작했지만, 독일과의 전쟁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에서 엄청난 국력과 재원을 요구하는 연구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소련은 결국 미국의 스파이들로부터 팻맨(Fat Man) 원자폭탄의 설계도를 넘겨받고서야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49년 8월 29일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RDS-1은 핵실험에 성공했다.

원자폭탄은 만들었지만, 소련은 쓸 만한 폭격기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소련은 자국 영토에 불시착한 미국의 B-29 폭격기를 돌려주지 않고 이를 역설계한 Tu-4를 1949년부터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전략폭격기를 통한 핵공격 능력을 보유했지만, 이는 미국과의 핵전쟁에서 그다지 쓸 만한 수단이 아니었다. 전시에 미국은 수시간 내에 소련 영공으로 침입하여 핵공격이 가능했지만, 소련은 10시간 이상을 비행해야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을 압도하려면 전략폭격기가 아니라 다른 핵 운반 수단이 필요했다.

소련은 미국의 폭격기 전력을 따라잡고자 B-29의 복제판인 Tu-4를 만들기도 했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출처: Public Domain>

이에 따라 등장한 것이 바로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즉 대륙간탄도미사일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반의 시기는 탄도미사일 기술이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기였다. ICBM은커녕 제대로 된 단거리 탄도미사일도 간신히 개발하고 있었다. 미소 양국은 나치 독일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V-2를 바탕으로 미사일을 개발했다. 빠른 개발이 가능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V-2를 개발한 독일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말부터 V-2 미사일의 샘플을 확보하고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를 포함한 핵심 연구진을 확보했다. 특히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을 통해 확보한 연구진을 미국으로 빼돌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소련도 ‘동방작전’을 수립하고 미국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헬무트 그뢰트루프(Helmut Gröttrup)와 같은 독일 과학자들을 긁어모았다. 또한 1946년 3월 13일 소련 정부는 결의안 1017-419호를 통과시켜 소련 내에 로켓 개발에 필요한 산업 인프라를 만드는 세부 계획을 세웠다. NII-88 연구소가 세워지고, 그 안에 SKB 특수설계국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제1번 품목’의 개발을 제3국에 맡겼다. 제1번 품목이란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1946년 8월 제3국의 수석 설계사로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i Korolev)가 임명되었다. 또한 소련은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처럼 핵심 독일 연구진을 자국으로 이주시키는 오소아비아킴 작전(Operation Osoaviakhim)을 1946년 10월 22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그뢰트루프 등 독일의 미사일 기술진을 자국으로 이주시켜 탄도미사일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출처: Public Domain>

페이퍼클립작전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과학자들은 텍사스의 포트 블리스(Fort Bliss)에 유배되어 별다른 연구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은 달랐다. 이미 1017-419호라는 국가적 미사일 개발 계획에 따라 NII-88에 무려 150여 명의 독일 기술진들이 배치되었고, 이외에도 로켓 엔진의 개발을 담당하는 OKB-456이나 로켓 제어 체계를 개발하는 NII-885 등에서도 활약했다. 이들은 소련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소련의 젊은 로켓 기술진에게 자신들의 노하우를 단기간 내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1950년에 코롤료프는 NII-88 연구소 내의 제1실험설계국, OKB-1(Opytnoye Konstruktorskoye Buro-1) 의 책임자가 되었다.

소련 최초의 ICBM 개발이라는 역사적 사명은 코롤료프(사진 가운데)에게 주어졌다. <출처: Public Domain>

1952년 미국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이듬해인 1953년 소련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의 수소폭탄은 무려 10메가톤(Mt)급의 파괴력을 자랑했지만 습식 수소폭탄(wet hydrogen bomb)이어서 무게가 수십 톤에 달했다. 이에 비해 소련의 수소폭탄은 건식 수소폭탄으로 파괴력은 400킬로톤(kt)급에 불과했지만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을 만큼 소형이었다. 소형화된 수소폭탄의 등장으로 소련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1953년 소련도 수소폭탄 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출처: Public Domain>

그리하여 1953년이 되자 OKB-1에서 드디어 ICBM의 설계가 시작되었다. 목표는 중량 3톤의 탄두를 싣고 최고속도 마하 20으로 8,000km를 비행할 수 있는 2단 액체로켓을 탑재한 중량 170톤의 신형 ICBM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53년 말에 초도 지상시험까지 실시했지만, 시험 결과 대대적인 설계 수정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코롤료프는 무려 100여 개의 설계안을 검토한 후에 1954년 5월이 되어서야 최종 설계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1954년 5월 20일 신형 ICBM 개발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신형 ICBM은 R-7 세묘르카[Semyorka: 러시아어로 7(Семёрка)을 의미]로 명명되었으며, 미사일포병총국(GRAU, Glavnoye Raketno-Artilleriyskoye Upravleniye)에서는 8K71이라는 분류명을 부여했다. 나토(NATO)에서는 이 미사일을 SS-6 샙우드(Sapwood)로 분류했다. R-7 초도발사체는 1957년에야 완성되어, 5월 1일 바이코누르 우주기지(Baikonur Cosmodrome)로 옮겨졌다. 그리고 5월 15일에 드디어 첫 발사가 이루어졌다. R-7은 발사 후 약 100초간 비행했지만 화재에 의한 엔진 고장으로 더 이상 날지 못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첫 발사는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이후 시험발사는 계속되어 6월 11일에 2차 발사가 실시되었다. 2차 발사에서는 전기계통 고장으로 미사일이 통제불능으로 롤링하면서 발사 후 33초 만에 분해되었다. 그러다가 8월 21일 4차 발사에 이르러서야 R-7은 처음으로 6,000km를 비행하며 목표 지점 인근까지 날아갔다. 그러나 4차 발사에서는 재진입체(RV, Reentry Vehicle)가 대기권 재진입에 실패하면서 파괴되어 군사적 의미의 성공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국영 통신사인 타스(TASS)는 소련이 수소폭탄을 장착한 ICBM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면서 정치적 의미를 강조했다.

세계 최초의 ICBM R-7 <출처: Public Domain>

소련은 한 발 더 나아갔다. R-7이 시험발사를 하던 시기는 마침 1957년 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 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코롤료프는 R-7에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실어 궤도에 쏘아 올리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로켓에 실어서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 로켓은 별도의 발사체가 아니라 바로 R-7이었다.

스푸트니크 1호 <출처: Roskosmos>

스푸트니크 1호는 직경 58cm의 알루미늄 구(球: 공)에 안테나 4개를 붙여놓은 단순한 기계였다. 1와트(W) 출력인 20메가헤르츠(MHz)와 40메가헤르츠(MHz)짜리 송신기 2개를 장착하고 위성의 온도 정보를 0.3초마다 보내는 게 전부였다. 인공위성의 무게도 83.6kg에 불과했지만, 당시 미국은 1.6kg짜리 소형 위성조차 우주 공간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 간에 몇 년 이상의 기술 격차가 있음이 명백했다. 8월의 R-7 발사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은 미국은 갑자기 패닉에 빠졌다. 단순히 우주경쟁에서만 뒤진 것이 아니라 이제 소련이 ICBM을 개발하여 군사적으로도 앞서 나가고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한 실험견 ‘라이카’ <출처: Public Domain>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에 멈추지 않고 11월 3일에는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했다. ‘라이카(Laika)’라는 이름의 개를 인공위성에 실어 발사하면서 세계 최초로 생물을 태운 우주발사체를 띄웠던 것이다. (하지만 발사 후 장비 이상으로 산소 공급이 중단되고 온도가 올라가는 바람에 라이카는 결국 수분 만에 질식사했다.) 더 큰 충격은 스푸트니크 2호의 중량이 무려 508kg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1958년 5월 16일에 소련은 중량이 1,327kg에 달하는 스푸트니크 3호까지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R-7은 충분히 수소폭탄 탄두를 탑재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고, 미국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스푸트니크 3호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R-7에도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아직 재진입체(RV)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8년 7월경 소련은 RV의 재설계를 마쳤다. 이후 R-7은 무려 16회나 시험발사를 실시하면서 1961년 2월 27일 시험발사를 마지막으로 개발이 완료되었다. 한편 소련 정부는 1958년 7월 2일 설계 변경과 성능 개량을 적용한 개량형인 R-7A의 개발도 승인했다. R-7A에 이르러서는 탄두가 경량화되고 관성유도장비의 성능이 대폭 향상되었으며 엔진 출력은 늘어나고 발사준비소요와 정비소요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R-7A은 사거리 12,000km, 탑재중량 5,370kg까지 증가했다. 탄두의 파괴력도 2.9메가톤(Mt)까지 증가했다.

이에 따라 1959년 2월 9일 소련은 최초의 전략미사일 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R-7은 1961년까지도 시험발사가 계속되었지만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고 대신 R-7A가 실전배치되었다. R-7A는 러시아 북부의 플레세츠크(Plesetsk) 우주기지에 배치되어 1959년 12월 15일 첫 시험발사에 성공했으며, 실전배치가 완료된 것은 1962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R-7A는 1세대 ICBM으로서 정치적 의미가 크기는 했지만, 실제 작전 운용 측면에서는 재앙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신형 2세대 ICBM이 개발되면서 R-7A는 짧은 실전배치를 마치고 1968년부로 전량 퇴역했다.

R-7 ICBM의 발사 장면 <출처: Public Domain>

* R-7 세묘르카 ICBM의 특징과 운용 현황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저자 소개

양욱 | 군사전문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쳐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을 공부했고, 줄곧 국방 분야에 종사해왔다. 중동지역에서 군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아덴만 지역에서 대(對)해적 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요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수석연구위원 겸 WMD 대응센터장으로 재직하며, 국방부·합참·방위사업청 자문위원,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으로 우리 국방의 나아갈 길에 대한 왕성한 정책제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