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협궤 열차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제작되어 운송 효율을 높인 라도가 호수 횡단 보급선. 운항 도중 독일 공군의 공습에 격침당하기도 하였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310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독일이 레닌그라드의 점령을 유보하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모스크바 공략에 나서기로 한 이상, 상대를 최대한 춥고 배고프게 만들어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승리를 얻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전술이다.
더구나 포위된 인구가 많을수록 저항 기간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컸다. 70년 전 보불전쟁 당시에 독일은 파리를 포위하여 느긋하게 굴복시킨 전례가
있었다.
10월 들어 라스푸티차(Rasputitsa)가 시작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을 위한 독일의 태풍작전이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진흙 장군은
결국 모스크바를 구했지만 레닌그라드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스스로 진격을 멈춘 상태였기에 라스푸티차가 독일 북부집단군에게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반면, 고립된 레닌그라드로 향한 소련의 생명선이 오히려 장애물을 만났던 것이다.
- ▲ 진창에 빠진 차를 견인하는 소련군. 라스푸티차는 소련을 구한 자연현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소련군의 이동을 방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티흐빈에서의 반전
이처럼 레닌그라드 일대가 안정화되자 스탈린은 10월 8일, 주코프를 소환하여 모스크바 방어의 중책을 부여하였다. 이는 독일과 소련
모두 레닌그라드를 차후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양측 합쳐 800만에 가까운 대군이 쉼 없이 충돌하여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싸우기
힘들만큼 소련은 넓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닌그라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전투가 끝났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 ▲ 레닌그라드 도심에 설치된 대공 감시장치인 청음기. 레닌그라드 일대의 전선은 정체되었지만 싸움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연일 도심을 향한 포격을 계속하였고 그럴수록 소련군의 저항 의지는 커졌다. 1941년 겨울 이전까지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은 모든
무능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전선으로 달려 나오며 저항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점령지에서 나치가 소련인들과 포로들에게 가한 잔학 행위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항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독일은 당황하였고 침공 4개월이 지나면서 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볼호프 남부의 티흐빈(Tikhvin)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독일이 볼호프와 이곳을 거쳐
오네가(Onega) 호 서안의 페트로자보츠크(Petrozavodsk)를 점령한다면 핀란드군과 직접 연결이 되면서 소련의 유일한 생명선인 라도가
호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 ▲ 소련은 요충지 티흐빈을 탈환하면서 레닌그라드 사수의 불씨를 살렸다. <출처: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D.C. (LC-USZ62-25900)>
지옥으로 변한 도시
하지만 포위망 외곽에서의 선전과 달리 도심의 모습은 비참하였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독일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말미암아 기반 시설은
파괴되어 갔지만 이를 복구할 자원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것은 식량난이었다. 10월이 되었을 때 레닌그라드에는 불과
20일분의 식량만이 남아 있었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는 가만 놔두어도 몰락할 것이라 자신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 ▲ 도심의 오스트로프스키 광장을 파서 식수를 구하는 시민들. 외부로부터의 보급이 단절되면서 레닌그라드는 고립무원의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907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정치국원인 주다노프(Andrey Zhdanov)는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1주당 빵 8온스,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4온스만 배급하였을 정도로
강력히 식량을 통제하였지만 50만 명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12월이 되어 북극으로부터 엄청난 한파가 몰려오면서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고 난방용 에너지가 고갈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많은 이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 선에 이르면서 시가지 곳곳에 시체가 쌓여 가는 모습이 흔한 일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처절하게 도시를 사수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결국 아사 직전의 수많은 시민들이 사체를 먹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보안대에서 이를 단속하였지만 오로지 생존 본능에만 매달린 이들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 ▲ 도시에 널브러진 사체를 수습하는 모습. 독일의 공격에 의한 사상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기아와 추위에 숨져간 이들이었다. <출처: (cc) RIA Novosti archive, image #216 / Boris Kudoyarov at Wikimedia.org>
생명의 길
우선 독일군의 공격이 멎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대의 장기 예보만 믿고 전쟁을 벌인 독일은 동계 전투용 장비와
소모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더 이상 싸움을 벌일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모스크바와 로스토프(Rostov on Don) 앞에서 진격이 좌절된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에 비해, 9월부터 참호를 파고 포위전을 펼쳤던 북부집단군의 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얼어붙은 대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 ▲ 1941년 겨울은 40년 만의 혹한이었다. 동계 피복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한 일선의 독일군들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의 겨울 혹한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결빙된 라도가 호수가 그동안 볼호프 등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뱃길을
막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좋은 수송로가 되었던 것이다. 11월 20일 이후부터는 구호 물자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돌아올 때는 50만의 시민들과 부상당한 4만여 명의 병사들을 싣고 지옥의 도시를 빠져나왔다.
물론 이런 수송이 마냥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야간에만 움직인다 하더라도 독일 공군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얼음이 깨지면서
호수 아래로 차량이 가라앉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미 배로 보급품을 수송할 때도 있었던 위험이었다. 이처럼 레닌그라드의 구원
행렬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도시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 ▲ 라도가 호수 위로 만들어진 생명의 길을 통하여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트럭 행렬.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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