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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탱크가 등장한 솜 전투

바래미나 2014. 12. 3. 04:00

최초로 탱크가 등장한 솜 전투|

1916년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솜 전투는 전투 첫날 독일군 기관총 십자 포화에 58,000여명에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그때까지 하루 사상자 기록으로는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 중 3분의 1이 전사자였다)와 탱크가 처음 등장한 전투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다. 이 전투는 1916년 7월 1일 아라스알메르트 사이의 솜 강 북쪽 30km에 걸친 전선에서 시작되어 11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원래 전투는 1915년말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합동작전으로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조셉 조프르에 의해 입안되었는데 영토 탈환보다는 독일의 예비 병력을 소모시켜 독일군의 전체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의 목적을 띠고 계획되었다.

 

6월 24일 토요일 독일군 진지에 대한 8일 동안의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으로 작전이 시작된다. 이는 독일이 베르? 공격에서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포격으로 독일군 병력을 괴멸시킨 뒤 보병을 무인지대를 거쳐 적의 참호로 돌격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특히 주안점은 기관총과 철조망의 제거였다. 이 포격에는 영국군의 1,5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고 거의 비슷한 숫자의 프랑스군 대포도 합세하였다.

 

 연합국의 대규모 포격은 독일군의 잘짜여진 철조망과 견고하게 지어진 벙커들을 파괴하는 데 실패하였고 결국 연합국은 많은 수의 포탄을 낭비한 결과만을 초래한다.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포탄에 불발탄이 많이 발생했다. 뇌관의 문제도 있었지만, 지상에 떨어진 포탄이 충격으로 뇌관이 작동하여 터지기에는 너무 물렁해서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채 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서부전선의 농부들은 이때의 벙커나 전투 흔적을 발견할 정도로 잘 구축된 방어선이었다. 연합군의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독일군들은 벙커나 방공호에 숨어있었고 연합국은 엄청난 포격으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데 실패하게 된다

 

7월 1일 아침 7시 30분 27톤에 달하는 대규모 17개의 지하 부설 지뢰 폭파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데 사실 최초의 지뢰폭파는 10분 전인 7시20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뢰 폭파를 통한 공격방식은 오늘날에도 보인다.

 

첫날의 58,000명에 달하는 영국군 희생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다음날 다시 진격을 명령한다. 이는 성공하긴 하지만 많은 피해와 함께 결국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진 못한다. 아무튼 7월11일 영국군은 독일의 첫 번째 방어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날 독일군은 베르?전투에서 15개 사단을 이 지역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한다.

 

7월 19일 지역의 독일군은 재편되고 방어를 더욱 강화하게된다. 헤이그는 이 공세를 여름을 지나 11월까지 계속하게 된다. 비록 독일군의 포지어 장군을 사로잡는 등의 몇번의 괄목한만한 성과도 있었지만 전선은 다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특히 후반에는 전차가 전선에 등장해 영국군의 15개 사단에서 이 탱크를 사용하게 된다. 이 첫 번째 탱크의 등장은 처음에 50대로 시작하였는데 기관총 중대에 배속되어 3, 4소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9월 솜에 도착하는데 기계적 결함과 고장으로 인해 탱크의 숫자는 24대로 줄어있었다.

 

이 탱크의 등장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활약도 했지만 이 초반의 탱크들은 많은 결함과 고장으로 그리 신뢰받지는 못하였다. 9월 15일 처음으로 탱크가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 날의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로윌슨의 부대는 프랑스의 제6군이 영국 주력의 우익으로터 독일군의 공세를 막으며 이를 격파하는동안 전 참호를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캐나다군은 그들의 7대의 전차와 함께 Courcelette를 점령하고 제15스코틀랜드 사단은 Martinpuich를 점령한다. 이는 모두 탱크의 활약에 힘입는다. 그러나 동남부에서는 독일군들에게 탱크를 노획당하기도 하엿고 우기에는 전차가 진흙땅에 빠져 제 기능을 상실하엿으며 소수의 탱크가 참전하므로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해 첫 탱크 등장은 실패로 간주 된다

 

9월 25일에서 27일사이 헤이그는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다. 그 후 영국군은 여러번의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 성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프랑스군도 이 공세에 가담한다. 프랑스의 조프르 장군은 헤이그에게 공세를 계속할 것을 주문하는데 이 당시 프랑스군은 베르?에서 공격을 계속해 잃은 땅을 계속해서 되찾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공세의 중단으로 솜의 독일군이 베르?으로 다시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1월 13일 영국군은 마지막 공세를 취해 독일군의 Beaumont Hamel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솜전투는 11월 18일 폭설로 인해 중단된다

 

이 공세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군은 12km의 전진을 하게 되는데 이 땅을 위해 42만 명의 영국군과 20만 명의 프랑스군이 다치거나 전사하고 독일군도 5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기록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당시 지뢰 폭발 흔적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