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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남 도발사

바래미나 2013. 9. 15. 00:04

북한의 대남 도발사|

국전쟁 이후 북한대한민국을 겨냥해 일으킨 각종 도발 및 교전 목록. 군인의 경우 '정신전력' 이라는 이름 하에 각 연도별 굵직한 사건들을 외워야 될 수도 있다.

  • 북한의 대남첩보원 발각횟수 : 5,500여 회 (1953년~1980년) (1.7일당 1회꼴)[1]
  • 한국군·경찰에게 잡히거나 사살된 북한측 공작원 및 무장공비 : 2,973명 (1953년~1980년) (3.3일에 1명꼴)[2]

1 1940년대

1945년 해방 후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서 혼란한 해방공간의 상황은 곧 남북교전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북한대로 내부정리가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대로 남조선 반동들을 맛깔나게 후려치면 우루루 허물어지겠지?" 라고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국지전을 감행했다. 훗날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 연구가들에게 교전확대설의 떡밥을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교전확대설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다만 교전이 확대된 것이 북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남침으로 확대된 것. 이러한 일련의 교전들은 사실 북한이 신생 조선인민군의 교리와 전투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부단한 시도였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교전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신문지상에 안 실린 것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1948년 이후부터는 남한에 정치적인 침투를 위해 공작원을 보내기 시작한다.

  • 영월발전소 폭파기도 (1948. 11. 26)
  • 서부전선 교전 (1948. 12. 2)
  • 개성 인근 교전 (1949. 2. 6)
  • 개성 내습 사건 (1949. 5. 4)[3]
  • 포천 전투 (1949. 6. 12)

2 1950년대

1950년대 초반에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거짓으로 귀순한 간첩들이 정치적인 침투를 시도했으며 6. 25 전쟁이 끝난 이후에 분단이 고착화되자 정보 수집과 체제 교란을 위해 간첩을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남파 공작원이 일으킨 납북 사건과 월북 사건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 성시백 간첩 사건 (1950)
  • 김수임 간첩 사건 (1950. 4)[4]
  • 박정호 간첩 사건 (1953. 5~1957. 10. 18)
  • 정국은 간첩 사건 (1953. 8. 31)
  • 풍세면 무장간첩 사건 (1954. 8. 24)
  • 김정제 간첩 사건 (1957. 8)
  • 박상혁 간첩 사건 (1957. 9)
  • 창랑호 납북 사건 (1958. 2. 16)

3 1960년대

1960년대 후반은 무장공비에 의한 침투와 교전이 잦았던 시기이다. 7.4남북 공동성명 직전 김일성이후락에게 1.21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거 우리 군 내부의 극렬분자들이 저지른 짓이다. 나는 진짜 몰랐다. 미안하다" 라고 비공식적으로 사과한 바 있다.[5]. 당시 교전의 원인과 남북관계를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인 셈.

  • 진주 덕의마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6. 5. 17)
  •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 1. 19)
  • 중부전선 교전 (1967. 4. 12)
  •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7. 4. 17)
  •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사건 (1967. 04. 12)[6]
  • 서부전선 미군막사 폭파사건 (1967. 4. 22)
  • 강릉 고단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7. 5. 21)
  • 연평도 근해 어선포격사건 (1967. 5. 27)
  • 대성동 미군트럭 기습사건 (1967. 8. 7)
  • 서부전선 군용트럭 기습사건 (1967. 8. 10)
  • 판문점 미군막사 기습사건 (1967. 8. 28)
  • 경원선 폭파사건(1967. 9. 5)
  • 경의선 폭파사건(1967. 9. 13)
  • 1.21사태 (1968. 1. 21)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1. 23)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11. 2)
  • 주문진 무장간첩사건 (1969. 3. 16)
  • EC-121 격추 사건 (1969. 4. 15)
  • 1차 흑산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9. 6. 9)
  • 2차 흑산도 간첩선 격침 사건 (1969. 10. 23)
  •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1969. 12. 11)
  •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1970. 6. 5)

4 1970년대

5 1980년대

  • 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1. 6. 29.)
  • SR-71 정찰기 피격 사건 (1981. 8. 26.)
  •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2. 5. 15.)
  •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6. 19.)
  •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 (1983. 8. 4.)
  •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 (1983. 8. 13.)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3. 10. 9)
  •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 (1983. 12. 3.)
  •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 (1985. 10. 19.)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1986. 9. 14.)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11. 29)

6 1990년대

  • 은하계곡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2. 5. 21.)
  •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5. 10. 17.)
  • 부여 간첩 사건 (1995. 10. 24.)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9. 18)
  • 철원 GP교전 (1997. 7. 16.)
  • 속초 앞바다 무장공비 침투 기도사건 (1998. 6. 22)
  • 동해 무장공비 사체 발견사건 (1998. 7. 12.)
  • 강화도해안 간첩선 침투 기도사건 (1998. 11. 19.)
  • 여수해안 간첩선 격침 사건 (1998. 12. 17.)
  • 제1연평해전 (1999. 6. 15)

7 2000년대

8 2010년대

  • 천안함 침몰사태 (2010. 3. 26)
  • 연평도 해안 포격 사태 (2010. 11. 23)
  •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협박 (2011. 2. 27 이래 계속)
  • 연평도 해안 위협포격 #(2011. 8. 10)[9]
  • 왕재산 사건 (2011. 7. 29)[10]
  • 최고 존엄 모욕 시위(2012년 2월 이래 계속)[11][12][13]
  • GPS교란 (2012년 4월~5월 말까지)[14]
  • 청와대 등 주요 정부 기관 해킹 사건(2013. 6. 25)#
  • 3차 핵실험 감행 (2013. 2. 12) # 규모 4.9~5.0급 인공지진이 발생했고 북이 중, 미에 전날 통보했다고 하며 국방부는 대략 10kt급으로 보고 있다.
  • 2013년 북한의 전쟁 위협
    • 정전협정 백지화 (2013. 3. 5)[15]
    • 남북 불가침 합의 폐지 및 판문점 대화 단절 (2013. 3. 8)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1호전투근무태세 돌입 선언 (2013. 3. 26)
    • 전시상황 돌입 선언 (2013. 3. 30)
    • 원자로 재가동 (2013. 4. 2)
    • 개성공단으로의 출경 금지 조치 (2013. 4. 3)
    • 중거리 미사일 동해안 이동 (2013. 4. 4)
    • 북한 내 외국 공관 및 기관 직원 철수 권고 (2013. 4. 5)
    • 개성공단 내 북한 근로자 전원 철수 (2013. 4. 8)
    • 4월 10일 미사일 발사 예고 (2013. 4. 9)
    • 남한 내 외국인 대피계획 수립요구(2013. 4. 9)
    • 미사일 발사 징후 (2013. 4. 10 이후)
    • 조평통 담화문 발표 (2013. 4. 11)
    • 대화 제의 거절 (2013. 4. 14)
    • 스커드 미사일 동해안 추가 배치 (2013. 4. 21)
    • 1호 전투근무태세 해제 (2013. 5. 7)
    •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2013. 5. 18 ~ 5. 20)
    • '최고존엄 모독 재차 비난(2013.5.25)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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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박정희 시대의 공안사건을 모두 포함한 숫자인지 확인되지 않은 숫자다. 확인바람. 실제로 과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권력의 하수인을 하던 흑역사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 파악에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공안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현재 잠입하는 남파간첩은 꾸준히 있으며 간첩은 계속 검거되고 있다. 방송이 안 될 뿐이지.
  • [2] 이 시기의 무장공작원 및 무장공비의 숫자는 대부분 1950년대 잔존 빨치산들이 포함되어 있다.
  • [3] 북한군이 개성 바로 근처까지 진입해서 박격포 등의 화기로 시내에까지 포격한 사건이다.
  • [4]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베어드라는 미군관리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간첩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간첩 조작 사건의 의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 [5] 1.21 사태가 일어난 1968년은 김일성이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의 정적들을 8월 종파사건 등의 조작을 통해 꾸준히 대량 제거해 나가던 작업의 후반부이다. 이 시기에는 간부들이 많이 숙청당했기 때문에 간부공황 문제가 제기되고도 있었던 시점과 가깝기 때문에 김일성은 이를 타개하고자 군부에 약간의 자율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렇게 지들끼리 알아서 청와대까지 쳐들어놓고 김일성한테 "저 잘했죠?" 라고 말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내부의 안티 하지만 김일성도 1.21사태를 제외한 다른 사건은 칭찬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봐서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극렬분자 탓이었던 것이 확실한 듯.
  • [6] 정전 이후 최초로 포병대응사격을 실시.
  • [7] 해당 부대는 정전이후 2번째로 포병대응 사격을 실시했으며 북한군 GP를 파괴하는 전과를 세운다. 이후 92년 은하계곡 침투사건과 98년 철원GP교전을 겪고 만다.
  • [8] 태풍으로 매미라는 이름은 북한에서 제출한 이름이다. 너무 위력이 강해서 제명당하긴 하지만...
  • [9]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종북주의자들은 환호했고 북한은 [[발파] 작업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중국군사전문지는 중국의 신호에 따라 북한이 포격했다고 주장했다.
  • [10] 대한민국에 '왕재산' 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간첩활동을 하던 일당들이 검거된 사건. 각계 인사 수십 명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핵심 조직원들은 북한의 훈장까지 받았다. 5명이 우선 구속되었다.
  • [11] 사실 이전에도 여러번 이런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들을 모욕하는 언동을 군부대 부호로 쓴다는 것에 국가의 모욕이라면서 도발하는 식이다. 자기들은 매일 그러면서
  • [12] 이번 2012년에는 15만명을 동원한 궐기 대회도 있었는데 김정은 체제가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아 내부결속용으로 쓰려는 목적이 강하다는 듯하다.
  • [13] 이후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 주요 언론사의 이름과 지도좌표를 언급하며 조준 격파하기 전에 사과하라고 요구했는데 특이하게도 성명서에서 언급한 좌표는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60진법이 아닌 10진법 좌표였다. 몇몇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 10진법 좌표를 60진법으로 해석하여 '북한이 엉터리 좌표를 가지고 있다' 며 비웃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구글 어스만 있어도 딸 수 있는 좌표를 틀릴 리가 없잖아
  • [14] 경기지역과 휴전선 근처의 GPS신호가 수신이 잘 되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처음에는 북한이 억지라고 주장했으나 후에 알고 보니 전자정찰국의 지시로 방해전파를 쏘아올리고 있었던 것. 다만 그들의 의도와 달리 군사, 항공장비 등은 GPS외에 사용하는 것도 많아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잘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 별 피해도 없었다. 전기낭비 이것을 조사하다 겸사 GPS 교란장비를 팔아먹으려던 2명도 같이 검거되었다.
  • [15] 어차피 언젠간 끝날것을 미리 끝낸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