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Miserables, 201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죽어서 30년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 괴팍한 나가사와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전적으로 다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말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고전은 세월이 갈수록 빛을 발하지 않는가.
그러니 레미제라블이 뮤지컬로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거의 같은 스토리로 사골을 우려내도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그렇게 챙겨보지 않지만 어느날 왠지 레미제라블이 보고 싶어졌다. 광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쁜 앤 해서웨이가 나오기도 하고.
토요일 운동화를 구겨신고 집 근처 영화관으로 가서 사람이 없는 라인을 골라 조조로 표를 끊고 앉아있는데 젠장, 사람이 계속 들어차는 것이었다.
조용히 영화를 보기는 글렀다. 바로 뒤로는 종이컵 안에서 팝콘 낱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고 옆엔 전화가 오는데 헐~ 그걸 또 받네...
상영중에 사람들은 왜 이리 나가고 들어오는지. 이런 최악의 환경을 참고 영화를 봤는데 결론적으로 괜찮고 볼만한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 레미제라블
톰 후퍼(감독), 휴 잭맨(장발장), 러셀 크로우(자베르), 앤 해서웨이(판틴), 아만다 사이프리드(코제트), 이자벨 알렌(어린 코제트)
사챠 바론 코헨(테나르디에), 헬레나 본햄 카터(테나르디에 부인), 에디 레드메인(마리우스), 사만다 바크스(에포닌)
이 영화의 심각한 결점은 앤 해서웨이가 초반에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원작이 그러니 어쩔수 없겠다만. 게다가 영화를 위해 몸무게를 감량하고
빠꾸머리까지 하니 그 아름다운 미모가 죽잖아...ㅠ 원작대로 영화를 위해 이빨까지 뽑았다고 하면 영화에 슬픈게 아니라 진짜 슬플 뻔 했다.
그래도 아름다운 미모였지만 연기가 훨 아름다웠다. 여배우구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영화는 전체적으로 크게 흠 잡을데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한줄평을 보니 감동적이다와 지루하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갈려 있었는데 정말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지루했던 것 같다.
지루한 것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원작을 재해석하기보다는 대부분 충실히 따라가고 있으며 러닝타임이 길고 극적인 반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장발장이 유령도 아니며 절름발이도 아니며 다 알듯이 끝에는 죽는다. 자베르도 죽고 판틴도 죽는다. 이거 말했다고 설마 돌 던지진 않겠지?
Les Miserables - International Trailer
또 뮤지컬이라는 형식에서 오는 생소함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연기가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야 관객도 주인공에 녹아드는데
대화는 모두 노래고 짧게 독백으로 끝날 부분도 아예 노래 한 곡을 부른다. 맘마미아나 시카고처럼 한 바퀴씩 돌아주고 춤을 추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건축으로 치면 전체 완결적인 공간 구성보다는 배경의 조화, 시지각적인 아름다움과 각 공간의 구성이 더 볼만했던 영화인 것 같다.
또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배우들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립싱크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녹음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그걸 송쓰루라고 했나?
그래서인지 음악이 웅장하다거나 고음이 부각되는 것보다는 노래가 연기에 좀더 가까웠고 노래로 된 대사에 배우의 감정이 녹아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뮤지컬과 영화의 장점을 함께 가지려고 했으나 애매하게 된 느낌이랄까 약간 아쉬웠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적당히 괜찮았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유튜브로 뮤지컬을 봤는데 노래와 내용을 대충이나마 알고 보니 더 감동적이었고 재미있었다. 원작도 읽어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소설 레미제라블
1853년과 1883년의 빅토르 위고(1802~1885), 어린 코제트를 묘사한 레미제라블 삽화
원작은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로 1862년 초판이 간행되었다. 우리말로는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빅토르 위고는 원래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여러 시집을 발표했고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까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하였다.
정치에 입문해서 184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는데 나폴레옹 3세의 집권에 반대하면서 반정부 인사가 되어 1851년 벨기에로 망명을 떠난다.
1845년부터 집필에 들어간 레미제라블은 1861년 망명지인 영국 건지섬에서 탈고해 이듬해 출판하였는데 책은 인기있었고 아주 잘 팔렸다.
망명지에서 외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책이 잘 팔리는지 몹시 궁금하여 출판사에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아무런 글이 없고
단지 '?'라는 부호만 적혀 있었다. 센스있는 출판사는 '헐~대박!'이란 뜻으로 '!'만 적어 답장을 보낸다. 역사상 가장 짧은 편지와 답장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레미제라블을 읽은 적이 없다. 내가 읽은 것은 레미제라블이긴 한데 그것이 레미제라블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TV에서 배우들이 인형탈을 쓰거나 책상 밑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극이 많이 방영되었는데 주로 명작소설들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 중에 레미제라블도 있었는데 얘들에게 이런 제목을 쓰면 알아 먹을리가 없으니 '장발장'이라는 이름의 단막 시리즈로 방영되었었다.
"좡발장~ 좡발장~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 이런 주제가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주인공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재미있게 봤던 것 같다.
학급 책장에는 어린이 장발장 이런 것도 굴러다닌 것도 같고 도덕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것이나 주제는 착하게 살자였다.
감옥소의 교시도 아니고 레미제라블의 주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레미제라블의 양이 그렇게 방대할지 몰랐다.
길어봤자 上下 정도일 줄 알았지만 프랑스판 태백산맥이었다. 기다란 서사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과 종교, 철학, 역사와 문화 등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뮤지컬 레미제라블(1985~ )
이 방대한 이야기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지는데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4대 뮤지컬로 불린다. 레미제라블과 힘께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이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뮤지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1980년 프랑스에서 처음 공연되어 석달간 1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디렉터인 피터 파라고는 이 공연의 컨셉 앨범을 받았는데 여기에 감동하여 당시 캣츠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국의 뮤지컬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에게
영어 버전을 제작할 것을 상의하였다. 그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동의하여 로열 세익스피어 극단과 함께 레미제라블을 뮤지컬로 제작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1985년 10월 8일 런던의 바비칸 센터에서 처음 공연되었고 당시 평단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계약 3개월 동안 매진의 연속이었고 지금까지도 널리 공연되고 있을 정도로 뮤지컬계의 신화를 쓴 작품이 되었다. 런던 공연만 1만회를 넘겼으며
전 세계 42개국 308개 도시에서 21개국어로 공연되었다. 싱글과 프로모션을 포함하여 다양한 언어로 제작된 70여개의 공식음반이 발매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다가 최근에서야 배우 정성화가 장발장으로 분한 라이센스 레미제라블이 처음으로 공연되어 현재에도 공연 중에 있다.
※ 주: 덧글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한국에서 1996년에 정식 초연되었다고 적어주신 분이 계셨다. 위의 글은 정식 라이센스를 지불한 레미제라블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전에도 한국에서 공연된 적이 있긴 하지만 라이센스 한국어 레미제라블은 2012년에 초연되었다. 네이버 캐스트나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프랑스 지도. 오른쪽 아래의 붉은 섬이 나폴레옹의 출생지인 코르시카 섬이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은 19세기 전반의 프랑스다. 이 시기의 프랑스 역사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지만 완전히 틀리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은 보통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되는 몇년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수십년에 걸쳐 여러번 일어나는데 이것을 통칭하여 프랑스 혁명이라고도 한다. 레미제라블은 이 사이에 일어난 봉기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도 시각에 따라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프랑스 역사에서는 이것을 '1832년 6월 파리의 공화당 봉기'라고 한다.
여기서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는 전부 다루고 있지 않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1848년 2월 혁명까지의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1832년 6월 봉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레미제라블의 스토리를 대략 시대순대로 요약하게 될 것이다. 스토리는 주로 원작을 중심으로 하였다.
좌) 루이 16세(1754~1793). 그는 평범했고 소박한 군주였지만 주변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 하면서 혁명의 제물이 된다.
우상) 절대군주시대를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 우하) 당시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 피지배자인 제3신분은 밑에 깔려있다.
18세기 말기의 프랑스는 봉건사회이자 신분제 사회였다. 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는 파리 근교 서남쪽에 있었던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제 1, 2, 3 신분이 있었는데 인구의 98%는 제3신분으로 이들은 신분제의 굴레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인구의 극소수를 차지하는 제1 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사회적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독차지하고 세습적인 지위를 누리며 제3신분을 억압하고 있었는데 이를 앙시앵 레짐(구체제)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사회에는 계몽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제3신분 속에서도
부를 축적하고 교육을 받은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에 대한 욕구가 무르익고 있었다. 당시 궁정의 사치와 미국 독립전쟁의 지원으로
국가재정이 파탄상태에 이르지만 귀족들은 협조하지 않았고 때문에 국왕인 루이 16세는 1789년 170여년간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소집한다.
1.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75년만에 처음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게 된다.
2. 제3신분은 의석수 확대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행동을 한다. 이들은 1789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에서 결의를 한다.
3.1789년 7월 14일 민중들은 압제의 상징과 같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다.
4. 파리에서 연금상태에 있었던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20일 가족들과 함께 국외탈출을 시도하지만 바렌에서 발각되면서 실패한다.
여기에 참석한 제3신분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면서 특권계층의 희생을 요구하고 국민의회를 성립시킨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다시 붙게 되고 왕은 국민의회를 탄압한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민중들은 봉기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혁명의 불길은 전국으로 타오른다.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한다. 이후 물가고와 식량부족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왕은 민중에 의해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진다. 국민의회는 종교, 사법,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시행하고 '91년 헌법'에 의해 단원제의 입헌군주제를 채택한다.
절대군주에서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왕은 1791년 국외로 도망가다 발각되어 다시 파리로 연행되고 이 사건으로 군주제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진다.
당시는 과도기 속에서 혼란이 지속되면서 많은 귀족들이 망명하고 있었고 반혁명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 입법의회가 소집된다.
1. 혁명의 적으로 낙인찍힌 루이 16세는 결국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는 처형되기 전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남긴다.
2.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장에 끌려가는 모습.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그녀는 평소에 나쁜 소문과 모략에 시달렸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3.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급진적으로 혁명을 추진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펼치다 반대파의 반격을 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4.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면서 로베스피에르파는 몰락하고 총재정부가 성립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끝나고 시민혁명은 종말을 고한다.
1792년, 프랑스는 절대군주들을 타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 혁명전쟁을 벌이지만 많은 장교들이 망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패전을 거듭한다.
입법의회가 위기를 호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이들이 프로이센군에게 뜻깊은 승리를 거두면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한다.
그즈음 소집된 국민공회는 지롱드당과 자코뱅당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1792년 말 루이 16세의 처형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결국 과격한 혁명주의자들로 구성된 자코뱅당의 의견이 근소하게 우세하여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이후 자코뱅의 독재가 시작된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국내외적으로 혼란이 지속되자 혁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선언하고 반대파와 온건파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처형한다. 이런 공포정치는 반발을 부르게 되고 결국 1794년 로베스피에르 일파도 반대파들이 일으킨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처형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귀족과 평민의 상황이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풍자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재위 1804~1814, 1815)
테르미도르파는 공포정치를 종식시키고 1795년의 헌법을 만들어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를 구성하니 이것이 총재정부이다. 불안한 사회 속에서
총재정부는 왕당파와 공화주의 좌파로부터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군대의 힘에 의존하였고 이에 군부의 힘이 대두된다. 민중은 무능한 총재정부 대신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이 때 용병의 천재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그는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였다.
1802년에는 종신통령이, 1804년에는 제정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그는 내부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는 등
독재정치를 하였지만 법전을 편찬하고 화폐를 안정시켰으며 파리의 도시계획을 실시하는 등 재빠르게 혁명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외부적으로는 해외원정을 감행하여 유럽 대부분을 제패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프랑스에게는 영광을 가져온 그였지만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며 반나폴레옹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여 큰 타격을 받으면서
기회를 노리던 유럽 각국은 1813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다. 나폴레옹은 몰락하여 엘바섬에 유배되지만
1815년 탈출하여 재기하였고 다시 워털루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여 백일천하는 끝이 난다. 이게 1815년까지의 일이다.
1. 나폴레옹이 정복한 영역, 나폴레옹은 지금의 베네룩스 3국, 독일, 이탈리아 방면으로 영토를 넓혔고 주변국을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2. 만년의 나폴레옹
3. 유럽의 절대군주국가들을 격파하고 정복하는 나폴레옹을 체스 게임에 빗대 풍자한 그림.
4.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힘이 약화되면서 유럽 동맹군은 프랑스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그를 엘바섬으로 유배보낸다.
1. Prologue: Work Song 'Look down'
영화는 웅장한 죄수들의 노래로 시작한다. 이들이 외치는 Look down(눈 깔아)은 법과 그것을 대변하는 간수들에 대한 굴종과 체념, 절규를 담고 있다.
영화 중반부의 파리의 등장과 함께 빈민들이 외치는 Look down(아래를 좀 보시오)은 상류층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는 죄수들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빈민들의 항변으로, 다시 시민들의 적극적인 항거로 변해가는 불공평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태도 변화를 그리고 있다.
"내 형제인 장발장, 당신은 이제 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선에 사는 것이오. 나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샀소."
레미제라블에서는 워털루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시간상으로 나폴레옹이 완전 몰락했던 1815년부터 주요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발장(1769~1833)이 출소하는 시점도 1815년이다. 장발장은 1769년 프랑스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장발장이 어릴 때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이차가 많이 나는 누나가 그를 키웠다. 누나는 결혼하여 7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1784년 이른 나이에 죽고 만다. 장발장은 어버지처럼 나무가지를 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그는 항상 가난하였다.
1795년 겨울, 배고픔에 허덕이는 조카들을 보다못해 빵집에서 빵 한덩어리를 훔치지만 결국 잡혀 1796년 당시 악명높던 툴롱의 감옥에 투옥된다.
그는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24601로 복역한다. 복역중 조카 여섯은 행방불명되고 누나는 파리에서 막내만 데리고 산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1800년에 첫 탈옥을 시도한다. 이후 1802년, 1806년, 1809년까지 총 4번의 탈옥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형기는 늘어나 투옥된지 19년만에 출소하게 된다.
하지만 노란색 신분증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미리엘 주교는 아무런 편견없이 따뜻이 대해주지만 장발장은 은접시를 훔친다.
금방 경찰에 잡히지만 미리엘 주교는 그에게 은촛대까지 주며 그를 감화시킨 이야기는 모두들 알 것이다. 장발장은 새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사라진다.
자베르(1775~1832)는 감옥에서 죄수인 아버지와 집시 점쟁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집단의 반발로 경찰이 되어
사회적인 인정을 받게 되며 장발장이 있던 감옥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존경과 반역에 대한 증오를 가진 기계적인 법의 집행자로
장발장이 시장으로 있는 도시에 배치된 후 그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장발장 스스로 정체를 밝힌 후에는 그를 집요하게 추격한다.
당시 몽페뢰이유 쉬르 메르라는 작은 도시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예전부터 영국과 독일의 검은 유리 구슬 모조품을 제조하는
특수 공업이 있었는데 작업공정이 복잡하여 크게 번성하지 못 하고 있었다.1815년 말 어떤 사나이가 나타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이 지방 제조업의
획기적인 개량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생산원가는 줄어들고 품삯은 높아지게 되어 도시는 번성하게 되었고 공장을 세운 그 사나이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 사나이가 처음 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 시청에 큰 화재가 났는데 그가 헌병대장의 두 아들을 구출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통행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 대해 몰랐지만 그는 항상 겸손하였고 친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감을 느꼈고 마들렌 아저씨라고 불렸다. 그에게 가면 일자리와 빵을 얻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너그러웠던 그였지만 공장주로써 드물게 타협하지 못 했던 부분은 남자에게는 선량한 의지를, 여자에게는 순결을, 모든 사람에게는 성실을 요구한 것이었다.
남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그에게 숨겨진 야심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시장 자리도, 사교계의 초청도, 훈장도 모두 거절하며 의아하게 만들었다.
1820년, 그의 공적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 할 정도로 눈부셔 지방민들은 모두 그가 시장이 되기를 간청하고 탄원하였으므로 그는 마지못해 시장직을 수락하게 된다.
친절한 마들렌 아저씨는 불과 5년전에 은접시를 훔쳤던 장발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공장 사장과 도시의 시장직을 성실히 수행한다.
순진한 처녀였던 판틴(1796~1823)은 세상에 이용당하다 모든걸 소진한채 불행한 삶을 마친다.
그녀는 딸이 전부였던 헌신적인 어머니였지만 그녀가 전하는 사랑은 냉혹한 사회 속에서 차단당한다.
마들렌이 시장이 되기 전 1817년 파리에서는 4명의 남학생들과 4명의 여공들이 한창 신나게 들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 중에는 황금과 같은 풍성한 금발머리에 진주같이 빛나는 치아를 가진 판틴이라는 여공이 있었다. 그 그룹 중에 가장 어렸다.
그녀는 1796년 몽페뢰이유 쉬르 메르에서 태어났고 부모를 모르는 고아였다. 어릴적 맨발로 걸어가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좋은 이름이라고 붙여준 이름이 판틴이었다. 10살때 가까운 농가로
고용살이하러 갔고 15살이 되자 돈을 벌기 위해
파리로 갔다.
거기서 언니들을 만났고 이들은 파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교제한다. 그 뒤 남학생들은 실컷 즐긴 뒤 편지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판틴의 상대는 후일 변호사가 된 것으로 잠깐 언급되는 난봉꾼에 쾌락주의자 톨로미에스였는데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판틴은 홀로 코제트를 출산하고 1818년 봄, 아이를 안고 파리 근처 몽페르메이유의 여인숙 앞을 지난다. 그러다 그 집 주인 아줌마가
자신의 아이를 정성껏 돌보는 것에 감동하여 매달 돈을 부치는 조건으로 코제트를 맡기고 고향에 돌아가 마들렌의 공장에 취직한다.
5. At the End of the Day
판틴은 공장일이 능숙한 것도 아니었고 동료 여공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나쁜 소문에 휩싸이고 사생아까지 드러나면서 영화 속에서는 남자인 반장에게서 쫓겨난다.
6. I Dreamed a Dream
공장에 쫓겨난 판틴이 자신의 리즈시절과 꿈많았던 시절을 그리며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수잔보일이 이 노래를 불렀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판틴은 장발장이 자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해 그에게 침을 뱉지만 장발장의 헌신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마들렌의 공장에 일하고 있던 판틴은 질투와 나쁜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생아가 있다는 것까지 알려진다. 시장직을 수행하고 있던 마들렌은
공장일을 보수적인 여반장에게 위임하고 있었는데 판틴은 그녀에 의해 공장에서 쫓겨난다. 일자리를 잃으면서 코제트를 맡고 있는 여인숙에 보낼 돈이
밀리게 되어 자랑이었던 머리카락과 이를 뽑아 판다. 결국 창부가 되면서 점차 몸과 정신은 쇠약해지고 타락한다. 1823년 판틴은 그녀를 놀리는 신사에게 대들다
경감 자베르에게 잡혀가게 된다. 그것을 지켜보던 마들렌에 의해 풀려나고 보살핌을 받지만 은인이었던 마들렌의 정체가 밝혀져 자베르에게 잡혀가게 되자
판틴은 쇼크를 받고 사망한다. 마들렌, 즉 장발장은 그녀에게 코제트를 데려올 것을 약속했고 그를 쫓던 자베르에게 말미를 줄 것을 부탁하지만 거부당한다.
12. The Confrontation
시간을 좀 줄것을 요구하는 장발장과 그것을 거부하는 자베르는 방 안에서 결투를 벌인다.
결국 창밖의 강물로 뛰어드는데 이는 소설과는 다른 부분이다. 장발장이 죽음을 위장하는 소설의 장면(오른쪽)
코제트와 테나르디에 부부. 테나르디에 부부는 워털루 전쟁에서 전사자들의 금품을 훔친 밑천으로 여인숙을 열고 이후 코제트를 맡는다.
이들 부부는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인물들로 판틴의 등골 브레이커들이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이들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코믹한 분위기로 등장한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된 장발장은 1823년 11월, 항구에서 노역을 하다가 사람을 구출하고 바다에 빠짐으로써 죽은 것으로 위장된다.
영화에서는 장발장이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자베르에게 시간을 줄 것을 부탁하지만 법 원칙주의자인 자베르가 거부를 하자 방에서 싸우다가
강이 있는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탈출한 장발장은 성탄 전날 판틴과의 약속대로 코제트가 있는 여인숙에 가서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양육비를 지급한다.
하녀처럼 불쌍하게 살고 있던 코제트는 장발장의 딸이 되고 그 후 장발장은 코제트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자베르에게
살아있다는 것이 탄로나 둘은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도피중 우연히 시장직에 있을 때 깔린 마차에서 구해준 수녀원 정원사 포슐르방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동생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1829년 말까지 코제트와 수녀원에서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역사로 들어가보기로 한다.
코제트를 만나는 장발장과 보그의 화보 속의 장발장과 코제트.
위) 1815년 2월 26일 그의 지지자들과 엘바섬을 탈출하는 나폴레옹과 돌아와서 병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나폴레옹
아래)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근처 워털루에서 벌어진 워털루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나고 그는 유배지에서 죽는다.
다시 시계를 돌려 장발장이 툴롱의 감옥을 나오는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1815년. 그 후의 프랑스에서는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를 간 1814년, 열강들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혁명과 나폴레옹이 뒤집어놓은 유럽의 질서회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이 회의는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하였는데 그는 유럽을 혁명 이전의 체제로 되돌리려 했다. 이를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한다.
혁명으로 일군 자유에 혓바닥을 조금이나마 담궈본 민중들은 보수, 반동체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모가지가 잘려 슬픈 왕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해외를 떠돌다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고 다른 망명귀족들도 돌아온다.
1814년에 제정된 헌법은 양원제 의회와 내각제를 규정하고 언론, 사상,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어느 정도 유화책을 담고 있었지만
국왕의 권력에 의해 제한적이었고 과격 왕당파는 점차 세력은 강해져 구체제으로의 완전 복귀를 책동하고 있었다. 루이 18세는 보수적이긴 했으나
이들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고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기 때문에 전쟁과 혁명에 지친 민중들과 별 충돌없이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이들은 혁명이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은 용감한 형제들이었다.
하지만 루이 18세의 동생 샤를 10세가 1824년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샤를 10세는 과격왕당파의 수령이었는데
그는 즉위 초부터 민중의 뜻에 반하는 반동정치를 실시하였다. 그 정책 중 하나는 망명귀족들이 혁명 중에 입은 손실을 보상해 준 것이었다.
그 액수는 무려 10억 프랑에 이를 정도로 어마하였는데 이것은 시민계급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니 부글부글 끓을수밖에.
샤를 10세는 상황파악도 하지 못 하고 이런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1830년 알제리 원정을 단행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당시 선거 때마다 자유주의적인 반정부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왕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에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25일, 7월 칙령을 발표한다.
한국 현대사에 대입하면 일종의 긴급조치 X호 같은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언론의 자유를 정지시키며 반정부세력이 다수인 하원을 해산하고
선거법을 개정하여 재선거를 치른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이것은 반정부세력의 지지기반이었던 상층 부르주아지로부터 선거권을 빼앗고
왕의 지지기반이었던 대토지 소유자에게만 선거권을 한정시킴으로써 왕당파의 세력을 강화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1830년 작품)
7월 26일 일요일, 파리는 무덥고 건조하였다. 보수성향의 신문들은 칙령에 따라 신문간행을 중단하였지만 진보사상을 가진 언론인들은 모여 칙령에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경찰은 언론사를 습격해 간행된 신문을 압수한 일이 있었고 일부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7월 27일, 일부 진보신문들은 칙령을 무시하고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학생,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민중들은 당시 금지되어 있던 삼색기와
붉은 깃발을 흔들며 거리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파리 교외의 생클루의 궁전에 있던 샤를 10세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파리에서 시가전이 시작되면서 진압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하였고 파리 중심부에 있던 튈르리 궁전과 시청이 시민군에 의해 접수되면서 상황은 급박해진다.
7월 28일에는 반정부파의 지도자들이 은행가 잭 라피트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7월 29일에는 스위스 용병들이 지키고 있던 루브르 궁전이
시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시계탑 위에는 삼색기가 꽂히면서 혁명군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왕은 그제서야 7월 칙령의 폐지와 내각의 총사퇴를 결정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혁명 후의 사태수습은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맡았고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오를레앙공을 왕으로 추대한다.
영국의 팝그룹 콜드 플레이(Cold play)의 노래 'Viva la Vida'(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란 뜻)로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멤버가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앨범 표지를 들라크루아의 그림으로 채우고 있고 가사도 혁명으로 퇴위된 샤를 10세를 연상시킨다.
이번 대선 때 MBC 개표방송에서 방송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이 곡의 전주 부분이 여러번 흘러나왔다. 아마도 선거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라는 의미에서 이 곡을 사용한 것 같다. 무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만이 혁명이 아니고 참정권을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혁명일 것이다.
>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
└ 접기
1830년의 7월 혁명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과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 1세. 그는 오를레앙 공으로 부르봉 왕실과는 친척 간이었다.
혁명 성공 후 대중적으로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그였지만 그 역시 혁명으로 인해 왕위에 쫓겨나 변장을 하고 파리를 탈출해 영국으로 망명한다.
왕위를 잃은 샤를 10세는 자신도 형 루이 16세처럼 단두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해외로 망명했고 이탈리아 고리치아에서 쓸쓸히 죽는다.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 7월 27일에서 7월 29일까지를 프랑스 역사에서는 '영광의 3일'로 불리고 이후의 입헌군주제 체제를 '7월 왕정'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 공, 즉 루이 필리프 1세는 시민들에 의해 뽑힌 왕이었기 때문에 유럽군주들은 그를 '시민왕', '폭동왕'으로 불렀다.
그때까지 프랑스의 정치 세력은 크게 3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왕정을 지지하는 귀족세력으로 이루어진 왕당파였는데 샤를 10세의 폐위로 몰락한다.
두번째는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나폴레옹 지지자들로 구성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상층 부르주아지들로 이루어진 입헌군주제 지지파였다.
루이 필리프를 지지한 계층은 시민계급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있던 상층 부르주아지로 7월 왕정 체제는 이들의 승리였다. 7월 왕정 이후
선거권은 2배로 확대되었지만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여전히 소수의 주주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와 같았다.
룩셈부르크 공원에서 장발장과 코제트 부녀를 바라보는 마리우스와 ABC의 친구들의 모임.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수녀원에 정착한 장발장은 정원사로, 코제트는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코제트를 수녀로 만들 수 없었던 장발장은 1829년 말 수녀원을 나와 파리에 정착하여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간다.
두 부녀는 파리의 룩셈부르크 정원에서 산책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 때 가난한 변호사였던 마리우스도 이곳을 자주 들렀다.
처음에 그는 두 부녀를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반년 후인 1831년 코제트가 처음보다 훨씬 아름다운 숙녀로 변한 것을 보고 상사병을 앓는다.
마리우스의 혁명을 꿈꾸는 청년으로 아버지는 나폴레옹 지지파로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였다. 마리우스는 어머니가 죽자 외할아버지의 손에 자라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완고한 왕정복고 지지파로 나폴레옹파인 사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손자에게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중에 아버지 장례식에서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마리우스는 외할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온다.
그는 점차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공화주의자가 되고 'ABC(불어로 억압이란 단어와 음이 같다)의 친구들'이란 단체에 가입한다.
마리우스와 에포닌
24. A Heart Full Of Love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정원에서 몰래 만나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마리우스와 코제트
한편 마리우스가 세든 방 옆에는 테나르디에 가족이 살고 있었다. 코제트를 맡았던 그 욕심쟁이 부부로 여인숙이 망하고 파리로 온 것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두 딸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장녀가 에포닌이고 어린 아들은 가브로슈였다. 가브로슈는 영화에서 코끼리 동상 정수리에서
튀어나온 그 꼬맹이이고 에포닌은 마리우스에게 구걸하러 왔다가 그를 짝사랑하게 되는데 그녀는 부득이하게 마리우스의 사랑을 도우며 속앓이한다.
1832년 2월 마리우스는 테나르디에의 일에 얽혀 지내던 집에서 나가게 되고 얼마 뒤 에포닌에게 코제트의 거처를 알아내도록 부탁한다.
그 뒤 마리우스는 장발장 집 정원에서 코제트를 몰래 만나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다. 코제트도 예전부터 마리우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장발장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오로지 코제트만 보고 살아온 그는 코제트가 사랑을 찾아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영국으로 이주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 두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랑에 빠져들어 있었고 프랑스 역시 공화주의자들의 열망이 무르익어 점점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6. one Day More
혁명의 날이 서서히 밝아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제각각으로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내일이면 잡힐지도 모른다는 장발장의 불안감,
내일이면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마리우스와 코제트, 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에포닌의 슬픔, 내일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가들의 기대감,
그것을 저지하려는 자베르와 그 와중에 한몫 잡으려는 테나르디에 부부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생각이 얽히고 섥히며 운명의 전날을 보낸다.
28. on My Own
장발장에게 이사가라는 쪽지를 남기고 돌아오는 에포닌은 홀로 비를 맞으며
마리우스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 슬퍼한다.
현재의 바스티유 광장 주변의 모습. 중심에는 7월 혁명 기념비가 서 있고 주변에는 방사형으로 길이 뻗어있다. 세느강 쪽이 남쪽이다.
영화에서는 커다란 코끼리 동상이 나오고 이 주변으로 수많은 민중들은 모이는데 이 장소는 지금 파리 동부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이다.
바스티유 광장은 1789년 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으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곳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원래 파리 동부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세워졌는데 이후 정치범을 수용하는 곳이 되었고 압제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후 1789년 7월 14일 민중들이 이곳을 공격한다.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는 주인공인 오스칼이 당시 군대의 장교였지만 민중의 편에 서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다 총을 맞고 죽는다.
격전 끝에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정치범이 아닌 소매치기 등 잡범 7명뿐이었다.
하지만 바스티유 습격을 시작으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기 때문에 바스티유는 혁명의 상징과 같은 장소가 되었고 이 날은 프랑스의 국경일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그 해 11월 완전히 철거되었고 돌같은 수많은 잔해들은 기념품으로 판매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벽 일부만 약간 남아있을 뿐이다.
위)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당시의 파리의 모습으로 오른쪽 사진 가운데 윗부분의 성채같은 건물이 바스티유 감옥이다.
중간) 바스티유 코끼리의 계획도. 원래는 주변에 분수를 만드는 등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제국의 위엄을 높이려 했다.
아래) 레미제라블 삽화와 영화 세트로 재현된 바스티유의 코끼리, 소설 속에 묘사된 바스티유 코끼리는 도시의 흉물이 되어 있다.
바스티유 감옥이 철거된 후 이 자리에는 자유를 기념하는 광장과 기둥 모양의 조형물이 세울려고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1793년 분수만 세워졌다.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후 1808년 파리의 도시개조가 이루어진다. 개선문같은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세워지고 기념물을 중심으로 도로를 방사선형의
길게 뻗은 직선으로 구축한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도시의 기념물 중 하나로 바스티유 감옥 자리에 높이 24m의 코끼리 동상을 세울 계획을 세우게 된다.
원래 설계는 코끼리 아래로 들어가 위의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로 청동으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골격을 만들고
석고로 기본 형상까지 만들었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권력을 잃음으로써 계획은 표류되고 새빛 둥둥섬 신세가 된다.
결국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는데 레미제라블 속의 소년 가브로슈는 이 코끼리 안에서 놀면서 지낸다. 이후 여러번 동상의 완성에 대해 논의되었지만
시의회에서는 예산문제로 수락하지 않았고 결국 1846년에 철거된다. 철거할 때 안에서 쥐가 쏟아져 나와 한동안 파리시민들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현재의 바스티유 광장과 7월 혁명 기념탐의 모습.
지금 이 자리에는 7월 혁명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프랑스 대혁명 때의 기존의 계획대로 높은 기둥의 형상을 하고 있다.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 1세의 주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1840년에 완성된다. 높이 54m의 코린트 양식의 청동 기둥으로
기둥 꼭대기에는 자유의 요정이 있는데 손에는 압제를 끊어낸 쇠사슬과 횃불을 들고 있다. 내부는 나선형 계단으로 되어 있어 올라갈 수 있으며
기둥 벽면에는 혁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금으로 새겨져 있다. 지하에는 1830년 7월 혁명의 615명의 희생자를 안치한 납골당이 있는데
이후 1848년 2월 혁명의 200명의 희생자들도 안치된다. 빅토르 위고는 이 조형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난로연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바스티유는 파리를 지키는 요새에서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그리고 제국의 위대함의 상징에서 자유의 상징를 담은 장소로
변화하는 역설적인 일대기를 살았다. 당시 혁명의 상징이 되어있던 바스티유 광장을 소설에 집어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당시 파리의 모습으로 공화주의자들은 붉은색 표시부분을 중심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정부군과 대치하였다.
이 지역 동쪽에는 바스티유 광장이 있으며 서쪽에는 실제 사건이 일어나던 날 빅토르 위고가 글을 쓰고 있던 튈르리 정원이 있고
세느강의 시테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으며 강너머 남쪽에는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처음 만난 룩셈부르크 정원이 있다.
당시 과격 공화주의자들은 7월 혁명 때 함께 바리케이트에서 피를 흘렸지만 기회주의자 집단들에 의해 다시 다른 왕을 세운 것에 불만을 느꼈다.
이들은 혁명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만이 들끓고 있었다. 여기에 나폴레옹을 동정하고 지지하던
보나파르트파들과 샤를 10세의 아들 앙리 5세를 왕위에 올려 다시 부르봉 왕조를 세울려던 왕당파들에게 새로 출범한 7월 왕정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체제였다.
게다가 1827년에 1832년까지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 상태가 지속되었고 물가상승으로 인해 생활이 고달파짐에 따라 민중들도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초기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도시의 노동자 수가 늘어나고 있었고 이에 비례해 도시의 빈민이 증가하고 있었다.
하나의 계층을 이룬 노동자들이 불만을 말하려고 해도 정부는 이들의 단결을 금지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불만이 높아지게 된다.
1831년 11월 21일 프랑스 동남부의 리옹에서는 견직물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정부를 꼬드겨 최저임금과 임금 개정 요구를 방해하는 기업가들에 대항해
10일 동안 봉기를 일으켜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 사건이 있었다. 1832년 2월에는 부르봉 왕조의 지지자들이 앙리 5세와 그 가족들을 파리로 극비리에 데려와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지만 실패한다. 이렇듯 정부에 반대하여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불안한 정국이 조성되어 있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은 6월 봉기의 계기가 된다. 가운데 아래는 혁명군들이 흔들던 붉은 국기와 프랑스 국기, 오른쪽은 당시 프랑스 병사의 모습.
그 와중에 1832년 봄, 유럽 전역에서는 콜레라가 번진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엄청난 사망자를 냈는데 당국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생활하던 빈민들이
전염병 전파의 주범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총리도 전염병 기간이었던 5월 16일 사망할 정도로 당시 콜레라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었고 당시 정부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던 라마르크도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1일 사망한다. 그는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고
인품이 훌륭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특히 공화주의자들은 그를 열렬히 추종하였다. 그의 사망은 이들이 봉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공화주의자들은 이전부터 그들만의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고 2년 전에 있었던 7월 혁명과 유사한 무장 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인간의 권리협회'가 주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은 20명씩의 조로 나뉘어 조장과 부조장을 두고 있을 정도로 군대처럼 조직적이었다.
라마르크의 장례는 공화주의자들의 주도하에 1832년 6월 5일 바스티유 광장에서 치뤄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날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는 당국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치뤄졌다. 군중들은 운구 주변으로 모였고 이들 중에는 공화국을 꿈꾸는 외국 망명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조국에서 탄압받고 파리로 망명온 사람들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행렬에는
노동자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이들도 합류하였다. 이어 공화주의자 한 명이 단상에 올라 연설하였다. 연설가는 라마르크가 생전에 폴란드와 이탈리아의
독립 투쟁을 프랑스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말하고 현 정부를 비판하며 민중들이 일어날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호응한 군중들은 빨간 깃발을 흔들며 '자유 아니면 죽음을'을 외쳤고 정부군과 충돌을 일으켰다. 봉기는 하루사이 파리 동부지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밤 사이에 정부군이 대폭 보강되면서 봉기를 파리 시내 전체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한다. 결국 시민군들은 파리 시내 중심가에 항거할 거점을 만든다.
그들은 정부군의 진입을 차단할 수 있게 좁은 골목 사이로 폐기물이나 돌을 높이 쌓아 바리케이트를 구축하여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그들만의 요새를 만든다.
6월 6일 아침부터 정부군과 시민군의 충돌은 시작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정부군은 73명이 죽고 344명이 다쳤으며 시민군은 93명의 죽고 291명이 다쳤다.
무력의 열세로 인해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 6월 봉기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의 싸움에 비견하기도 한다.
루이 필리프 1세와 그를 물러나게 만든 1848년의 2월 혁명.
6월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에도 7월 왕정의 정치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권익 확대에는 소극적이었고 1834년에는 반단체법을 제정하는 등 억압적이었다.
해외시장 개척을 바라던 신흥 산업자본가들도 정부가 영국의 뒤를 따라가는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침에 따라 실망하게 되었고 1840년대에 들어와서는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1846년과 1847년에는 흉작이 겹쳐 사회는 흉흉하였고 이런 분위기 속에 1848년 2월에는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집회가 계획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탄압하려 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면서 2월 혁명이 일어난다. 3일의 시가전 끝에 왕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시민에 의해 왕위에 올랐던 루이 필리프 1세는 결국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한채 시민에 의해 쫓겨나니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새로 수립된 제2공화국에는 노동자 대표로 사회주의자도 참여하여 노동권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국립공장도 설립된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도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제2공화국 이후에도 제2 제국이 선포되고 다시 제3공화국이 서고 파리코뮌이 성립되는 등
역사는 흘러가고 민중의 투쟁 역시 계속 되지만 끝이 없으니 여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한번의 혁명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봉건체제를 부수었으며 나폴레옹의 원정은 혁명의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이어지는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인권을 누리는 계층을 확대시켰다.
압제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은 펀치를 맞고 다운되고 다시 일어나 다운되기를 거듭 하였지만 결국 압제를 KO 시키고 결국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통 프랑스 혁명하면 1789년 바스티유 감옥 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을 일컫지만 7월 혁명과 2월 혁명도 넓은 범주의 프랑스 혁명에 포함된다.
시위하는 군중들과 ABC의 친구들, 남장을 하고 봉기에 참가한 에포닌, 반군들에 정체가 탄로나 잡힌 자베르
에포닌과 가브로슈. 이들은 혁명을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혁명을 이루려는 뜻도 없었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있었고 이유야 어찌 됐든 봉기에 참여한다. 역사란 꼭 예상한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역사를 바꾼 것은 영웅의 힘만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기도 했다.
6월 봉기를 호의적인 시각으로 해석하자면 비록 실패했지만 2월 혁명이 성공하는데 거름과 같은 역할을 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봉기가 일어나던 날 튈르리 정원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봉기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거리를 지나게 된다. 주변은 정부군과 반군들이 있었고 가게들은 모두 철시한 상태라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는데
다행히 몸을 피할 공간이 있어 숨을 수 있었고 한동안 총알이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경험은 훗날의 레미제라블에 반영된다.
다시 레미제라블의 6월 봉기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장발장은 영국으로 이민을 갈 결심을 굳혔고 마리우스는 이를 알고 낙담한다.
그리고 코제트의 집에 다시 찾아갔을 때 장발장과 코제트는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이는 둘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에포닌이 장발장에게
이사가라는 쪽지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낙담하고 그 와중에 1832년 6월 5일의 날은 밝아온다.
마리우스는 혁명을 꿈꾸었지만 혁명의 대의보다는 사랑의 실패에 대한 절망감으로 죽겠다는 심정으로 6월 봉기의 현장 속으로 뛰어든다.
39. The Final Battle
1832년 6월 5일과 6월 6일에 걸쳐 일어난 6월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도로 숨어든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발단으로 공화정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고 시내 곳곳에서 시민군은 바리케이트를 구축하여 정부군에 대항한다.
이 때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는데 남장을 하고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에포닌도 총에 맞고 쓰러진다. 에포닌은 코제트를 마리우스에게서
떠나가게 만들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마리우스와 함께 죽으려고 참여한 것이었다. 에포닌은 코제트가 이사가기 전 옮길 집의 주소를 적어
자기에게 맡긴 편지를 마리우스에게 주고 그의 품속에서 숨을 거둔다. 코제트의 집을 알게된 마리우스는 사랑을 얻지 못할 바에서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고 이 편지는 장발장에게 전달된다. 딸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통감한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구할 목적으로
바리케이트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부군의 첩자로 잡혀있던 자베르를 자신이 처단한다고 한 다음 데려간 뒤 그를 풀어준다.
정부군과 대치하는 와중에 가브로슈는 바리케이트 밖에서 탄약통을 집어오다가 정부군의 총격을 받고 죽고 곧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된다.
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 하고 바리케이트는 무너진다. ABC의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죽고 마리우스는 총상을 입고 기절한다.
격전 속에서 장발장 덕분에 살아남은 마리우스는 외할아버지와 코제트의 보살핌 속에 건강을 회복하고 코제트와 결혼한다. 영화 속에는 둘의 결혼식에서
돈을 노린 테나르디에 부부(소설 속에서는 부인이 이미 죽었다)가 등장해 장발장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업고 하수도를 도망치고 있었다고 마리우스에게 알려준다.
마리우스는 그게 자신이었고 장발장이 생명의 은인이었음을 알게 되고 코제트와 함께 장발장을 찾아가 용서를 빈다. 병중이었던 장발장은 행복하게 죽음을 맞는다.
장발장은 그를 업고 하수구로 피신하여 철문에 막히지만 강도 행각을 하고 도주하던 테나르디에가 철문을 열어줘 밖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 때 자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발장 선의로 인해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이 무너져 있던 자베르는 장발장을 순순히 놓아주고 곧 자살한다.
마리우스는 외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건강을 회복하고 코제트와 결혼한다. 장발장은 숨겨둔 재산을 코제트에게 주고 딸과 거리를 둔다.
장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코제트가 자신의 친딸이 아님을 밝힌다. 마리우스는 충격을 받고 그를 뒷조사하고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다 테나르디에가 마리우스에게 나타나 장발장의 비밀을 알려주는 댓가로 돈을 요구한다. 테나르디에 덕분에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장발장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바리케이트에서 자신을 구출한 사람이 장발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은인을 내친 자신을
반성하며 코제트와 함께 장발장을 찾아가는데 장발장은 임종 직전이었다. 장발장은 그들이 다시 자신을 찾아와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용서와 사랑의 말을 남기고 평온한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잃은 양심과 책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선의를 실천한 한 남자의 위대한 삶이었다.
어릴 적 장발장을 읽을 때에는 착한 놈, 나쁜 놈, 착하게 살자,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자 이 정도밖에 느끼지 못 했던 것 같은데
커서 레미제라블을 보고 나니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 투영하여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해서 말이다.
배고픔 속에 빵을 훔친 것은 그 범죄자만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것을 방조한 사회의 책임도 되는 것인가.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쾌락을 위해 살해해도, 금수같은 인간을 살해해도, 탐욕을 위해 절도해도, 살기 위해 절도해도 법을 똑같이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평등이고 공정한 법의 집행일까. 법이 엄격한 집행을 빙자해서 몽둥이를 남발하며 권력과 사회 유지의 수단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빵을 훔치고 여러차례 탈옥을 시도한 장발장은 과연 흉악범인가 아니면 사회가 그를 흉악범으로 포장한 것인가. 무엇이 악일까.
악의 근원적인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레미제라블은 이것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 대해 수많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레미제라블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조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법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제대로 작용되고 있는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복지는 적절히 잘 적용되고 있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의는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그리고 특정 집단의 욕심을 위해 다수가 희생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의 한국사회는 또다른 장발장을, 판틴을, 자베르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사회도 프랑스 역사처럼 압제에 대한 민중의 수많은 투쟁들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다. 민중들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루었다.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수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지만 여러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왔고 발전해 왔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이번에 출범하는 정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지만 조금씩이나마 잘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길 바란다.
정부뿐만 아니고 국민들도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잘 하는 것은 칭찬하고 못 하는 것은 혹독하게 비판해야지 비난과 비하만 해서는 안 된다.
절대악인 독재가 무너짐으로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독재의 잔재는 있지만 이것은 민주적인 절차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독재만큼 위험한 것은 무질서다.
49. Do You Hear The People Sing? (Reprise) [Finale]
들리는가? 사람들의 노래소리가.
2010년 레미제라블 25주년 기념 콘서트
인간이 서로 죽이는 싸움을 시작했을 때부터 계급이 생겼고 국가가 생겼다. 처음에는 수렵, 채집생활을 하면서 평등한 원시 공동체 사회를 이루며 살았으나
생산을 하게 됨에 따라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상황에 따른 불균형은 계급과 전쟁을 낳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조직적으로 약탈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였고 이것이 커져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다. 국가 안에서 역할에 따른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 속에 피지배층은 팔자려니 하고 툴롱의 죄수들처럼 순응하며 살았지만 계몽사상이 전파됨에 따라 민중들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
지배계급은 이 목소리와 소통을 거부하면서 혁명이 일어나고 여러 진통을 겪은 끝에 계급사회의 모순은 타파되었고 인권을 누리는 계층은 확대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1789년부터 1848년까지 진행되는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이중혁명이라 칭하며 유럽대륙에서는
두 혁명이 동시에 폭발하여 진행하면서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근대시민사회를 수립하게 된 계기로 보고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 중에 하나였다.
이후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경제를 낳았고 시민혁명은 자본주의 정치를 낳으면서 지본주의의 모순이 생기지만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가며 인류는 진보해 왔다.
사회체제를 변화시켜 왔고 진보해왔지만 과연 인류는 행복해졌는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쇠사슬을 끊어냈다고 마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시스템이 아닌 인간인 것이고 또한 인간의 사랑일 것이다. 레미제라블 속의 장발장의 삶을 보면 예수의 삶과 닮아있다.
서양문화권에 속해있는 빅토르 위고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장발장은 사회에 증오와 분노로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주교에게 감화되어 사랑을 실천한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죄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성자였다. 그는 조건이 없는 사랑을 베풀었으며 원수를 용서하였고 끊임없이 책임을 위해 노력하였다.
불교에 대입하면 덕을 베풀어 성불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 시스템도, 어떤 종교도, 어떤 사상도 다 필요없다. 결국 인간이면 된 것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이다. 레미제라블은 근본적으로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휴머니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진것 없이 절망적인.. 갖은 역경과 고난..
벼랑끝에서도 마지막엔 어려움을 딧고 일어서..
힘들게 성공한,, 그 어려움을 아는 부유층의 눈물적인 희생... 있는사람들이 없는사람들을 대변한 영화 레미제라블!
관료와 귀족...
사기와 부패한 도시... 폭리로 타락한 기업...
한번 실수 했으면 됐지 두번 연속으로 실수 하는건 또 뭔가...
같은경우를 봤으면 실수하지 않는 것이 정상아닌가... 우리들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P.S 1
쿠데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이제까지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권력교체의 형식
또는 좋은의미로 종래의 관습 제도등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것을 세운다..............
▶민영화란? 권력자가 대리인을 통해서 국가재산(또는 공기업 및 국민재산)을 탈취하는 것 이것이 곳 나라의 비합리 비합법적인 쿠테타인것...
무력이 아닌 정부나 대기업이나 법적권력으로 자연스럽게 정당화시켜 몰아내는 것을 말함...(용산참사같은경우 제외)
그리고 쿠테타나 혁명등을 정상적인 산업화 방향으로 연결짓는 방법도 있으나 이것에 대한 썰을 풀면 한정없음.
그리고... 쿠테타와 혁명은 뜻 자체가 틀리다...
※ 혁명(revolution)과 쿠데타(coup d' tat)
1. 혁명(revolution)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 일반적으로 단순한 정치 변혁 이외에 사회·경제·문화 등을 포함하는 구체제의 붕괴와 신체제의 형성을 동반함
2. 쿠데타(coup d' tat)
지배층의 일부가 기성 법질서를 무시하고 비합법적인 무력에 의해서 권력을 탈취하는 것
3.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점
① 혁명은 피지배 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반항인데 대하여, 쿠데타는 기존의 지배적 세력 사이의 권력 탈취 투쟁임
② 혁명은 피지배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필요로 하는데 대하여, 쿠데타는 피지배 계층의 지지가 없어도 일단은 성공할 수 있음
혁명이란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이 직접 행동을 해서 일어난 사건
예》 예를 들어 프랑스 민중 혁명이 있다. 쿠데타는 단지 권력이나 기득권을 갖기 위한 어느 소수 집단이 반란을 일으킨 것 12.12도 그 한예 합법적인 윤보선 대통령 정부를 불법인 쿠테타로 독불 군권력(★하나회)이 탈환 한거기 때문에 쿠테타가 맞다는 이론이 된다.
제시》
집단 봉기와 반란... 혁명과 쿠테타는 유혈(피)을 부른다.. 따라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당한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투표로써 국가의 권력 지도자를 뽑는 권리를 행사하는 방법 밖엔 없다.
기타 집필》
☞ 명륜당이라고... ceo들도 들락거린다면서?... 반란의명소... 명륜당이 뭔지 아른 사람은 우리나라에 과 연 몇이나 될까...
P.S 2
에라이!!
생계고로 인한
자살자들보다도 못한 것들아!!
내 가 예전부터 혁명을 부르짖었건만... 너희 민중들은 혁명을 논할 자격도...
너희들은 눈짓으로만 말로만 추천때리고 그냥 지켜만 보고... 똑같은 짓을 감행해 왔을뿐이다...
한낮 부끄러움 모르고 혁명을 부르짓는 본인보다도...
다들 내가 피해보고 다칠까봐 쉬쉬하고...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 안절부절하는 모습들...
내가보기엔 이런 시민성과 국민성들이...
가장 부끄러워해야할 것 같은데...
이영화를 극찬할 자격도 없다. 결국... 똑같은 무대에서... 똑같이 시작할뿐...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정도의 민주 혁명 영화나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유럽이 혁명의 나라이고 헐리웃이니 가능하지만 말이다...
온갖 부자와 기득권자들로 똘똘 뭉친 아고라의 백수터에서...
서민들을 위한... 또한편으로는... 귀족과 천민... 빈부를 떠나... 서로 돕고 함께 더불어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서로 돕고
상생 하고 화합 하고 협력 해야만 한다는 교훈...
지적감정을 가진 인간대 인간으로써
인간 삶의 방향을 제시한 시대의 교훈...
인간이라는 동족간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교훈...
그것이 안되었을때 민중 봉기를 들고 서로 똘똘뭉쳐 혁명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가진자들은 이영화의 의미를 알까...
온갖 부자와 기득권자들로 똘똘 뭉친 아고라의 백수터에서...
넷상에서만 워리어질 드립치고...
민족 운운도 하지마라... 정말 부끄럽다...
적어도...
시민 만을 위하고... 나라와 시와 민중들을 사랑했던...
오로지 민중... 그들밖에 몰랐던... 민중을 위한 삶... 아깝게 죽어간 젊은 영혼들...
그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진 마라... ㅅㅂㄹㄷㅇ!!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감당해야할 산재들이 넘쳐날수 있을것이다...
피를 쏟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감행함으로써 노력하신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이렇게 그나마 이정도로 자유민주를 누리며 존재할수 있었으니...
장발장과 젊은혁명전사들의 휴머니즘 정신을 대신포함해...
너희가 민족을 알고 열사의 혁명적 투혼을 아는가.. 그것을 알았다면 똑같은 역사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의 민주열사들이 비웃을 것이다...
끊임없이 평등과 자유를 찾기위해 노력한 결실이... 겨우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이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을 노래했는데에도... 그것을 모두 한순간에 꺾여 버렸다면...
그것에... 그들을 향해... 나도... 부끄럽게 된셈이다...
1 VS 오천만시민 = 1 승
(( 보도 를 보면
과거 정부에 있었던 욕심있는 자들로 인해... 그들을 특별 보훈해려 했던것이...(누가 훈장주고 사면은 어느 누가 그것을 권한대행 할만한 자가 있는가.. 신이라도 되는가..) 결국은... 그들을 도와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모든 정직한 모범시민들을 포함 본인까지 피해보는... 양상으로... 결국 똑같은 역사는... 똑같이... 부조리한 편법에 가담한 군과 법과 경찰 들로... ))
P.S 3
이쯤에서... 어느분의 글귀가 떠오르는 군요...
“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로서 한말씀드립니다.
왜 우리나라 보수가 새누리당입니까?
군비는 축소하고 한민족을 우선하지도 않으며
외세에 복종하고 친일과 친미를 일삼는 자들이 무슨 보수이며
자신 혹은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도 않는 것들이 보수입니까?
쪽팔린것 모르는 것들은 보수가 아니라 매국노들입니다.
제발 새누리당을 보수당이라고 하지말아주십시오. ” -익명-
【△ 윗분말은 대충 이해하지만...】
“부끄럽지만 저도 이나라와 모든 국민들을 생각 하는 사람입니다. 거기다 일개의 네티즌 한사람 으로써...
온라인 공간에서 ...
나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한탓에
보수 적인 면이 점점 약해지고... 그것에 몰두해... 내 자신조차 생각하지 않았죠...
그렇더라도 이승에서 죽음을 택하지 않고 생을 살아왔던 날이 많기에... 미련이 남아 속물이된...
본인도 보수라면 보수 성향에 가깝지만... 혁명을 겉으로만 할것처럼 말하는... 그렇다고 위선적인 보수가 아니므로... 젊은 나이의 민주투사들 처럼 목숨거는 일은 못하겠지만... 인권과 인생삶은 가치적 판단이니까... 그런일은 없었지만 진정한 마음과 정신만은 가지고 있다는 거... 그것이 가장 중요한게 아닐까 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미 누군가 발탁되었으니까...
할수 없이라도...
이나라 정부가... ...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국내에선 국민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까일만한 행동을 보여주지만 해외에서는 욕먹지 말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선진국들을 꺾고 잘 나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익명-
【△ 이분말은 대체 뭔소린지...;;】
P.S 4
가난이 싫어서...
그분들은 오로지 국민들을 위해 일생의 전부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분들의 편안한 안식과 행복을 줘야 할때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죽어간
고인이되신 영정들의 넋을 기리며...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