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을 빠져나갈 때만 해도 벤틀리의 신형모델 ‘컨티넨탈 GT V8’은 그저 뒷좌석이 편치 않은 럭셔리카일 뿐이었다. 뒷문이 없는 2도어 차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GT V8 역시 4명이 그저 넉넉히 앉을 수 있다는 데 만족해야 하는 그런 차였다.
도쿄 시내를 관통하는 수도 고속도로에서 30~60Km/h대를 밟으며 다른 차들과 줄지어 달릴 때는 옆 차로를 치고 빠져 나가는 닛산 큐브나 도요타 프리우스 같은 차들이 날렵해 보였다. 도쿄 수도 고속도로는 도쿄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우리의 내부순환도로 같은 도로. 도로폭이 비좁기로 유명해 벤틀리 컨티넨탈 같은 수퍼카로선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구간이다.
◆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8초'…주행모드 바꿔가며 파워 드라이빙
그러기를 잠시, 도쿄 시내를 벗어나 제대로 된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차는 우렁찬 배기음을 내뿜으며 말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가속페달을 가볍게 쑥 한 번 밀었을 뿐인데 공간이동을 하듯 차는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전속력으로 힘을 받을 때의 강한 느낌이랄까. 정지상태에서 100킬로미터까지 도달하는 데 4.8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았다.
액셀러레이터를 꾹 눌러 밟을 때 나는 ‘웅~’ 하는 소리는 기분 나쁜 굉음이라기보다 힘찬 바리톤 음성에 가까웠다. 엔진출력 rpm이 반듯하게 올라가는 듯 보였지만 속도는 굉장히 가파르게 올라갔다. 탄성을 거둬들이기도 전에 속도계가 이미 제한 속도를 훌쩍 넘겨 버렸다. 형님격인 12기통 V12에 비해서도 파워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8단 자동변속 차량이지만 액셀만 밟으며 가기엔 조금 심심했다. 운전대 옆에 달린 패들 시프트(운전대에 장착된 수동변속기)를 이용해 기어를 조절해 봤다. 전방 계기판을 통해 기어가 바뀌는 게 눈에 보였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발은 가벼워졌고 힘은 더욱 단단해졌다. 일본 고속도로의 제한속도가 시속 120km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행모드를 ‘컴포터블(comfortable)’에서 ‘스포츠(sports)’로 바꿨더니 드라이빙의 묘미가 한결 살아났다. 서스펜션(현가장치)이 차체를 잡아주고 차고가 낮아져 고속주행에 적합한 기능이다. 정장 차림에서 타이 하나 풀었을 뿐인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런 기분이다. 차는 한결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전방에 카메라가 있으니 속도를 줄여달라”는 현지 직원 말이 어찌나 야속하게 들리던지. 최고 시속 290km/h는 계기판에서나 봐야 했다.
정착 스포츠 모드 기능이 빛을 발한 건 고속도로가 아니라 코너링이 필요한 구간에서였다. 닛코 국립공원에 들어서자 한적한 지방도로도 잠시, 쥬센지 호수로 가는 이로하 고개가 길을 막았다. 해발 2000m대 산들이 줄지어 있고, 수십개(느낌상 수백개도 될 법한)의 급커브가 이어졌다. 핸들을 조금이라도 잘못 꺾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법한 아찔한 구간에서도 차체가 흔들리지 않으니 속도를 급히 줄여야 하거나 하는 부담이 없었다.
◆ 연비 40% 개선…“운전자를 위한 차”
GT V8이 내세우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연비다. GT V8은 벤틀리가 2008년 “2012년까지 지금의 성능을 유지하면서 연비를 40% 개선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나온 사실상 첫 번째 차다. 실제 1킬로미터 주행 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48그램으로 W12의 60% 수준이다.
벤틀리는 우선 차 무게를 줄여 연비의 16%를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엔진이다. 8기통이지만 속도가 줄어 엔진을 풀가동할 필요가 없을 땐 실린더 4개가 닫히게끔 설계됐다. 불필요한 회전을 줄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제 주행에서 액셀에서 발을 떼었을 때 엔진이 반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 밖에도 고압 직분사 시스템, 저마찰 베어링, 차량 내부 열관리 시스템, 저마찰 타이어 등도 연비를 좋게 한 원인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6000rpm에서 507마력의 출력이 나오고, 1700rpm 이상 구간에서 67.3kg·m의 토크 성능을 자랑한다.
W12가 기름을 가득 채웠을 때(90리터)의 주행거리가 500킬로미터였다면, V8은 850킬로미터까지 주행할 수 있다고 벤틀리 측은 설명했다. 100킬로미터 주행 시 W12는 기름이 14리터가 필요하지만, V8은 10리터면 된다. 주유소 자주 가는 게 불만이었던 럭셔리카 운전자라면 불편을 다소 덜 수 있을 듯하다.
팀 맥킨레이 벤틀리 한국 지사장은 “이번 모델은 어디까지나 직접 운전을 하는 드라이버를 위한 차”라며 “스포츠 드라이빙의 재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 스포티한 외관…고풍스런 인테리어V8은 스포티한 느낌을 강조했다. 헤드램프와 그릴은 W12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검은 톤으로 꾸며 보다 날렵해 보이도록 했다. 후면 배기구 모양도 W12와 같은 타원형이 아니라 누운 8자형에 가깝다.
또 로고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 ‘B’ 마크가 전통적인 까만색이 아니라 빨간색임을 알 수 있다. 벤틀리는 전통적인 세단형 모델에는 까만색 B로고를, 스포츠형 모델에는 빨간색 B로고를 사용한다. 맥킨레이 지사장이 “V8의 경쟁모델은 페라리나 마세라티”라고 말할 정도로 속도감에 있어선 뒤지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내부는 벤틀리 차 다운 고급스러움을 유지했다. 폴크스바겐그룹 차들이 그렇듯, 독일 차 특유의 첨단 이미지를 가져갔지만, 브라이틀링 아날로그 시계라든가 수동식 에어컨 스위치 등은 영국식 벤틀리 초기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했다.
작년 12월 일본에 먼저 소개된 컨티넨탈 GT V8은 일본 현지에서 지금까지 50대가 팔렸다. 한국에서는 올 7월부터 구매계약에 들어갔다. 빠르면 10월부터 서울 시내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