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국립공문서관 앞에서 천황궁의 북문(北桔橋門)을 통해 서릉부를 찾아간다. 사위가 삼엄하다. 외곽에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치고, 성곽속에 깊이 파묻힌 천황궁은 8월 한낮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곳에 한국 고문서가 있을 것인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풀릴 것 같은 기대감이 묘하게 교차한다. 발걸음이 서늘하다. 확인되지 않은, 그래서 답답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서릉부를 찾아간 이유
서릉부는 왜 찾아갔던가. 먼저 방문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두어야겠다.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황거내의 서릉부에 단군(고조선) 관련 희귀 사서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확인 욕구가 발동했다. 희귀 사서의 존재를 밝힌 사람은 박창화(朴昌和, 1889~1962)라는 인물이다. 그는 해방 직전까지 12년간 일본의 왕실도서관(서릉부)에서 촉탁 사서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때 '단군조선' 관련 사서들이 다량 쌓여 있는 걸 봤다. 한국에서 약탈해간 것들이다. 그 중 일부는 내가 정리했다. 그걸 찾아와야 한다."
서릉부 입구의 안내석. | |
박창화의 행적
'단군 사료' 증언자인 박창화는 한일 근현대사의 '연구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미스터리하면서도 역사적인 면이 있다. 1889년 충북 청원 출생, 1900년초 한성사범학교 졸업, 1910년대 영동보통학교 훈도 근무, 만주서 생활, 일본 관헌에 잡혀 일본행, 1933~1944년 궁내청 서릉부 사서로 근무, 광복 후 귀국해 청주사범학교 교사 근무….
그의 또 한가지 중요한 행적은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을 남긴 사실이다. 1989년 2월16일자 국제신문 1면에 실린 '화랑세기 필사본 발견'이란 특종기사가 촉발한 '화랑세기 논쟁'은 아직도 뜨거운 학계의 쟁점이다. 원본이 전하지 않는 신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박창화가 베꼈느냐, 창작했느냐가 관건이다.
이성명(왼쪽) 대표와 이재관 회장이 서릉부 입장표와 열람증을 보여주고 있다. | |
최 전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박창화는 일본 왕실도서관에 보관중인 수많은 사서들이 조선총독부가 수탈해간 것임을 확인했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료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단군 사료가 많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왕실도서관에 함께 근무했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를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 없는 것들"이라는 말까지 늘어놓았다고 한다.
10여년 전 최기철 교수로부터 증언을 듣고 녹취했다는 (사)한배달 한애삼(65) 전 부회장은 "박창화 선생이 서릉부에서 우리 고문서 20만권을 직접 보고 분류작업을 했다는 것은 최기철 교수뿐만 아니라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낸 고 최태영 박사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면서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모르는 일'로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창화의 서릉부 근무 사실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인적관리 자료에서 확인된다. 1935년 그곳의 직원 명부에는 박창화가 왕실도서관 촉탁(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이 85엔이었다고 돼 있다. 박창화란 이름은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DB) 속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나온다.
조선총독부 등이 작성한 '단군 합사(合祀)' 관련 공문서. 도쿄=박창희 기자 | |
서릉부는 도쿄 황거 북쪽편에 자리해 있었다. 도서 열람은 듣던대로 까다로웠다. 현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열람 희망 도서 목록을 작성해 우편으로 신청했다. 그곳 규정에 따라 방문자의 인적사항(외국인도 허용)과 열람도서 목록(한 사람당 하루 12책까지 열람)을 작성한 뒤 연락처를 남겼다. 20여일 후 답신이 왔다. 열람 일정과 시간은 서릉부측에서 잡았다.
서릉부는 4층 짜리 신식 콘크리트 건물 3개동으로 꾸며져 있었다. 입장표를 부착하고 서릉부로 들어선다. 출입구 유리창에 '관계자 외 입입금지(立入禁止)'란 문구가 붙어 있다. 한자 밑의 한글이 이채롭다. 안내 직원이 나타나 신분을 확인하고 열람증을 주었다. "카메라 등 일체의 사물은 소지할 수 없습니다. 손을 씻은 뒤, 소독기에서 소독을 해 주십시오."
사무실 겸 열람실은 1층에 있었다. 좌석은 12개 정도였다. 안내직원이 연필과 지우개를 주며 메모를 허용했다. 필요한 부분은 유료 복사를 허용하며 단 시일이 걸린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우리는 우선 한국 사료 등을 정리해 둔 '화한도서분류목록(和漢圖書分類目錄) 하권(1951년 간)을 주목했다. 42쪽에 '조선사(朝鮮史)' 항목이 있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징비록(懲毖錄)' '동국기략(東國紀略)' 등 72책이 목록화되어 있다. "제목만 봐선 모르고 내용을 함께 훑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 한국 학자들이 마음먹고 접근하면 연구 테마가 적지 않을 거예요." 동행한 역사학자 H씨가 나직이 얘기했다.
감감한 단군 사료
눈치 챘을 테지만, 서릉부가 공개한 도서목록에는 단군 관련 사료가 없었다. 아니, '일본인들은 없다고 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서릉부 내의 사서직원에게 '박창화'라는 조선 인물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 분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선) 당신네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박창화에 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조금 후 일행이 신청한 도서가 나왔다. 북한에서 찾는다는 '의방유취(醫方類聚)'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桂苑筆耕)' 그리고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모두가 희귀 사료였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한국에서 몇 년전부터 환수운동이 추진된 사료다. 맨 뒷장을 들추니 '대정(大正) 11년(1922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도장이 찍혀 있다. 기증자가 있어 훔친 게 아니라는 뜻이란다. 이를 본 이재관 회장은 "이 통한의 장례 자료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서릉부 고도서'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쓴 바 있는 울산대 허영란 교수에 따르면, 서릉부의 자체 목록에는 약 1100여 종의 한적(漢籍) 자료가 있으나 공개 DB에는 628종만 수록되어 있다. 이들 공개 DB목록은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웹사이트 '해외소장한국전적문화재'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비공개 부분은 오리무중이다.
단군 합사(合祀)의 진상
서릉부에서 단군의 '단(檀)'자도 찾지 못했던 일행은 다음날 도쿄 국립공문서관을 방문했다. 고문서 전문가인 김경남(여·46) 박사가 동행했다. 한국 국가기록원 학예연구원이자 일본 학습원대학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는 김 박사는 예리한 촉수로 공문서 더미 속에서 '단군'을 찾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흥미로운 제목이 떴다. '조선신궁에 단군합사의 건'. 조선총독부가 1920년대 작성한 제51회 제국의회 설명자료(국립공문서관 2A 34-7-2351)였다. 자료에는 단군이 조선의 시조이기 때문에 조선신궁에 합사해야 한다는 견해를 담고 있다. 이는 조선 사람들에게 단군이 시조로서 자리잡고 있고 일본도 단군을 인정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비슷한 문건은 또 있었다. 1925년 내각 총리부가 작성한 공문(국립공문서관 2A 35-8-20)이었다. '조선신궁의 단군합사 운동에 관한 건'이란 제목의 이 공문은 단군을 조선신궁에 함께 모시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수신처는 내각총리대신을 비롯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내무성 신사국장, 척식국장, 동경지방재판소, 동경경비사령관, 교토·오사카 지사 등이다.
일본 본국에서 이 운동을 폭넓게 논한 것은 일선(日鮮)융화책으로 보였다. 내용 중에 '단군을 북방시조로 하고 전설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때 이미 단군을 신화로 격하, 역사가 아닌 것처럼 몰아갔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보여줄 것만 보여준다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통치 공문서를 거리낌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볼테면 봐라'는 태도는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는 군국주의에 끈이 닿아 있을 것 같다. 이는 '보여줄 것만 보여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게 일본이에요. 식민통치 공문서를 모두 남겨 놓고 봐라고 하잖아요. 치밀한 조사 연구와 자료 관리가 국력이 되는 시대예요. 독도 분쟁도 (일본이) 자료를 갖고 있기에 큰소리 치는 겁니다. 우리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30년 후를 내다보고 기초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거죠. 지도자들이 눈을 떠야겠죠." 김경남 박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번 취재를 바탕으로 '조선신궁의 단군합사 건'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귀국길에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만난 권철현 주일대사는 "우리 상고사가 바로 서야 한국사가 바로 선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료다. 지금부터 모으고 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게 국력이 된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에 대한 사료를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한일간의 현실이다. 일본이 약탈해 간 것이라고 해도 무조건 '내놔라'고 할 수도 없다. 실사구시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단군 사료부터 하나하나 DB화 하는 작업부터 벌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남의 나라에 가 있는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보아온 고문서 한쪽, 고서 쪼가리 하나라도 새롭게 보고 모으는 자세, 그것이 역사를 찾는 길일 테다.
■ 日 약탈 한국고서들 얼마나
- 1910년부터 조선 고대사 사료 20여만권 쓸어가
도쿄 천황궁 안내도. 빨간점 찍힌 곳이 서릉부다. | |
서릉부 도서의 수집-분산-보관 과정은 울산대 허영란 교수의 연구 논문에 제법 상세히 소개돼 있다.
'…메이지 초기 서릉부(당시 도서료)의 수집 도서는 아카사카이궁(赤坂離宮)내의 창고 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그후 1942년 태평양 전쟁 중 공습을 피해 미나미타마군(南多摩郡)의 비상 서고 3개 동에 보관하였고, 1944년 3월에 서릉부는 내각문고가 보관하던 귀중 도서 약 7만5000점을 기탁받아 위의 비상서고에 소개 격납시켰다. 공습 피해가 점차 커지자 1944년 10월에 서릉부에 남아 있던 도서를 선별하여 도치기현(枋木縣) 어용저(御用邸)에 옮겼다. 그뒤 다시 양서를 골라 소개하였고 패전 후 비상서고에 보관중이던 도서와 공문서를 다시 반입, 1946년 1월 서릉부 서고가 재정비되었다.'
일본에 있는 한국 고서를 집대성한 연구 성과물도 있다. 일본 도야마(富山)국립대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67) 교수가 2년전 펴낸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집부(集部)'(교토대출판부)가 그것. 후지모토 교수는 한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0년부터 궁내청 서릉부와 동양문고, 국회도서관, 도쿄대, 교토대 등 일본 내 대형도서관은 물론 지방의 공·사립도서관과 개인서고, 영국 대영박물관 등 100여 곳을 뒤져 목록을 옮겨적는 방식으로 총 5만여 종의 서적을 정리했다.
이들 서적은 경(經·경전) 사(史·역사) 자(子·여러 학자의 철학서적) 집(集·개인문집)으로 분류 되었으며 각 고서에는 저자와 판본, 각수(刻手·판목을 새긴 사람), 종이 질, 활자, 간행연도 등을 수록하고 있다.
후지모토 교수의 연구 성과는 해외에 있는 한국 고서들에 대한 서지학 차원의 국내 연구가 절실함을 일깨운다.
취재 지원 = (사)부산국학원·부산국학운동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