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즈

재즈의 인물들 /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바래미나 2011. 4. 25. 14:20

 



그의 음악은 악보를 보며 여러 번의 리허설을 해야 하는 세공(細工)된 작품



얼마 전 미국의 퓰리처상은 올해의 음악부문 수상자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고(故) 델로니오스 몽크(Thelonious Monk)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943년 퓰리처상 음악부문이 생긴 이래로 이 상이 재즈 뮤지션의 품에 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지난 97년 재즈 오라토리오 [Blood on the Field]를 작곡한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를 시작으로 99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던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그리고 이번에 몽크는 그 세 번째 수상자가 된다(몽크는 내년 탄생 9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퓰리처상이 미국문화에 대한 주류사회의 입장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면, 이 상이 선정한 세 명의 수상자들의 이름은 다소 음미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97년에 윈튼 마살리스를 선정했던 경위도 그렇고 이후 엘링턴과 몽크에게 상을 수여한 것은 퓰리처상이 작품 혹은 작곡을 중심으로 재즈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흔히 즉흥연주의 음악이라 불리는 재즈에서도 작곡가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퓰리처상의 입장은 어찌 보면 재즈마저도 고전음악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달리 보면 재즈를 즉흥연주 일변도로 파악하던 기존의 관점이 한계에 봉착하자 퓰리처상이 재즈의 새로운 시각을 수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재즈를 작곡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리 낯선 시선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엘링턴과 몽크는 물론이고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길 에반스(Gil Evans), 조지 러셀(George Russell) 등과 같은 밴드리더들과 이들의 전통을 잇고 있는 오늘날의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연주자이기 이전에 작곡가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100년 전 재즈가 출발했을 때 이 음악이 순수한 음악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회, 문화적인 태도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가를 선명하게 말해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앞서 살펴 본 루이 암스트롱과 시드니 베쉐이의 업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100년 전 재즈는 오로지 즉흥연주의 음악이었으며, 심지어 최초의 재즈음반을 녹음한 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밴드의 리더 닉 라로카(Nick LaRocca)와 같은 인물들은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것을 재즈의 순수함을 지키는 하나의 미덕으로 여길 정도였다. 당시 재즈는 고상한 예술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20세기초의 자유분방한 반항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은 아마도 가장 독특한 시각을 지녔던 당시의 재즈 뮤지션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재즈는 무조건 분방하고 거칠게 연주할수록 좋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모튼의 음악은 악보를 보며 연주하거나 최소한 여러 번의 리허설을 거치지 않으면 도무지 연주할 수 없는 세공(細工)된 작품이었다.

 

1926년 그가 조직했던 7중주단 레드 핫 페퍼즈와 녹음한 ‘Sidewalk Blues'를 들어보면 연주자들은 자신이 이 악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악보를 보듯 완벽하게 계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작품은 보통의 미국 노래 형식(12마디 블루스 형식 내지는 AABA의 16마디 형식)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제3의 주제’(말하자면 C의 부분)가 장엄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연주는 보통의 즉흥연주로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며 연주 이전의 작곡가의 아이디어가 해결해야 할 부분인데 이러한 음악적 장치가 루이(1901년)나 베쉐이(1897년) 보다 적게는 7년, 많게는 16년 앞서 태어난 인물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모튼의 탄생 연도는 확실치 않고 단지 1885년에서 1890년 사이로 추측된다).

제임스 링컨 콜리어의 표현대로 듀크 엘링턴이 음으로 그림을 그린 ‘최상의 화가’라면 그 단초는 분명히 모튼에서부터 출발했다. 레드 핫 페퍼즈의 연주는 26년 당시 다른 밴드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회화적 느낌으로 가득한데, 예를 들어 사람의 대화, 자동차, 유람선의 경적음, 염소소리, 웃음소리 등을 음악의 전주부분 혹은 중간에 과감하게 삽입했다. 이러한 부분은 재즈를 춤을 위한 오락음악으로 여겼던 청중들에게 분명 당혹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의 색채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점은 모튼이 트롬본과 클라리넷을 매우 폭넓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클라리넷을 저음역에서 사용한 것은(모튼은 베이스 클라리넷을 즐겨 썼다) 당시의 파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재즈 앙상블의 새로운 색채의 탄생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곧장 엘링턴 사운드로 이어졌다. 레드 핫 페퍼즈가 연주한 ‘Someday Sweetheart'를 들었을 때 이후에 등장할 엘링턴의 ’Mood Indigo'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후대에 대한 이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모튼은 후배 뮤지션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로부터 영향받은 뮤지션들 역시 모튼의 영향력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모튼은 재즈를 집단적인 즉흥음악이 아니라 밴드리더, 작곡가, 편곡자의 음악으로 접근했으면서도 동시에 ‘뉴올리언스 스타일의 다선율 음악’이라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에 그는 30년대부터 서서히 등장한 스윙음악의 깔끔하게 정돈된 단선율을 극도로 혐오했다.

 

 




29년 대공황이 터지자 모든 클럽들이 문을 닫고 음반산업 역시 폭격을 맞았을 때 뉴욕을 떠나 워싱턴 DC로 옮겨간 모튼은 그곳에서 자신의 재즈클럽을 열었는데 이때부터 여러 글을 통해 자신을 ‘재즈의 창시자’라고 주장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모튼은 도심에서 멀리 떠나 ‘너희들의 세계는 타락했다’고 허공에 외쳐대는 들판의 광인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세상과 부조화했던 모튼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페르디난드 라멘테(Ferdinand LaMenthe)란 본명으로 스페인과 아프리카 혈통 아래서 태어난 그는 뉴올리언스의 크리올(creole: 프랑스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이 그렇듯이 백인에 가까운 흰 피부를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흑인들을 멸시했으며 동시에 자신을 백인이라고 믿곤 했다. 하지만 그는 백인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해서 형성된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흔히 나타나듯이 - 과대망상적인 정서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의 과대망상적인 주장은 입증될 수는 없어도 당대에 치부되었던 것처럼 허무맹랑한 ‘구라’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재즈의 창시자라는 그의 주장은 완전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그가 재즈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몇몇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그가 레드 핫 페퍼즈 이전에 피아노 독주로 녹음한 23년의 음반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즉흥성과 정교한 대위법적 선율을 지닌 피아니스트였는가를 선명하게 증언한다. 아마도 얼 하인즈(Earl Hines)를 제외하면 당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덧붙여, 놀라운 사실은 23년 피아노 독주 녹음을 남겼던 당시부터(30대 중반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는 어린 시절부터 뉴올리언스의 사창가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그런 이력이 발전해 포주, 도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자신이 훗날 고백했듯이 늘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곳 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시카고에서 음악에 전념하기 전 그는 LA에서 사업을 벌이다 실패했으며, 시카고에서의 음악적 성공으로 28년 뉴욕으로 갔지만 그는 또다시 워싱턴 DC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50을 얼마 넘기지 않은 이른 나이에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자 그는 옛 시절 LA의 따뜻한 날씨를 그리워하며 쇠사슬로 묶은 승용차 두 대에 짐을 싣고 대륙을 횡단해 서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긴 여정의 독(毒)을 풀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착한지 6개월만에 그는 눈을 감았다.

재즈에서 이렇듯 불행한 삶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역설적이게 그 시대에 강한 족적을 남긴 모튼의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그의 작품 ‘King Porter Stomp'가 베니 굿맨(Benny Goodman)을 통해 모튼이 그토록 혐오했던 스윙시대의 팡파르가 됐듯이, 모튼의 장례식을 애써 외면했던 후배 재즈맨들이 점점 더 작곡과 편곡의 중요성을 인식해 갔다는 점은 정말 얄궂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Toccata & Fugue in D Mi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