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즈

재즈의 인물들 /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바래미나 2011. 4. 25. 14:18

 

색소폰의 아버지 - 육체와 영혼 (Body & Soul)

당신은 ‘재즈’라는 말에 어떤 풍경을 떠올리는가. 화려한 조명아래 후끈 달아 오른 빅밴드 사운드. 그 앞에서 굵은 땀방울 흘리며 열창하는 재즈싱어? 아니면 어느 허름한 빌딩 맨 꼭대기 다락방에서 트럼펫이 고막아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그 옆에서 춤사위를 벌이는 아방가르드의 현장? 그렇다. 이 모두가 재즈의 풍경들이다. 재즈란 과연 그 경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포괄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우린 그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재즈라는 말 속에서 이 풍경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니 반드시 떠올리게 되어있다.

 

 





아주 추운 겨울날이라고 치자. 난 술 한 잔이 그리워 옷깃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도시의 어느 뒷골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좁은 골목 귀퉁이에 이르러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의 낮은 출입문을 열자 반지하의 아담한 클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열등이 흔들리는 그 실내의 정경은 내부의 온기, 사람들의 체취 그리고 나지막이 흐르는 재즈 선율과 함께 문 앞에 들어서는 이 이방인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담배 연기 자욱한 클럽 안에는 비록 비좁지만 오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로 제법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무대 위의 연주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때 연주곡은 반드시 발라드여야 하며, 그 편성은 피아노 트리오에 한 대의 관악기가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관악기는 테너 색소폰일 때 가장 완벽하다. 물론 모든 관악기는 나름의 제 멋을 갖고 있다. 모두가 아름답다. 하지만 이때는 테너 색소폰이 아니면 안 된다. 추운 겨울날 지친 이방인이 어느 클럽에 앉아 술 한 잔에 우울함을 달래려고 할 때, 그땐 반드시 테너 색소폰이 연주하는 발라드여야 한다. 테너만이 마치 단 한 모금에 몸을 녹여주는 숙성된 스카치 위스키와 같은 위안을 주므로.

 

 





테너 색소폰 주자는 자신의 솔로를 끝내고 쏟아지는 박수에 간단히 목례로 답을 한 뒤,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던 담배 한 개비를 테이블에서 다시 집어들어 한 모금 빨고는 그 옆에 놓인 온더록스 잔을 들어 입 안을 살짝 적신다. 그때서야 나도 긴장을 풀고는 의자에 기대며 긴 한숨을 뱉는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역시 테너 색소폰이야.’ - 이것이 재즈의 천국, 그곳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가 ‘재즈’하면 떠올리는 이 풍경. 테너 색소폰이 부드럽고 질펀하게 우리의 귓가에서 노니는 장면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재즈가 탄생했을 때부터 우리에게 당연하게 펼쳐졌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간으로 치자면 재즈가 탄생한지 적어도 40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풍경이 재즈 안에서 서서히 펼쳐졌다. 그리고 이 주술과도 같은 장면에 있어서, 그 효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장면의 완벽한 공식이 1939년에 녹음된 ‘Body & Soul'에 의해 완성되었다면 당연히 테너 색소폰 주자 콜맨 호킨스(1904-1969)는 재즈의 전형적인 미장센을 만들어 낸 개척자인 셈이다.

사실 호킨스의 업적에서 중요한 점은 재즈 발라드의 완성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 그는 오늘날 재즈하면 가장 쉽게 떠올리는 악기 색소폰, 그 중에서도 60년대부터는 색소폰의 주도권을 장악한 테너 색소폰이 재즈의 중요한 독주 악기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은 물론이고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등 호킨스 이후의 대부분의 테너맨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거나 오늘날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초기 재즈의 제왕들은 모두 트럼펫 주자였다. 그리고 그 트럼펫의 위치에 처음으로 도전한 인물이 클라리넷을 대신해서 소프라노 색소폰을 든 시드니 베쉐이였다. 그때까지 색소폰, 특히 테너 색소폰은 오늘날의 상황과는 정 반대로 재즈에서 아주 미미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호킨스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희귀악기’인 테너 색소폰을 연주했고 스스로가 이 악기의 진화과정을 몸소 체험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로 인해 테너 색소폰은 진화해 나갔다.

 




호킨스가 몸담았던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 오케스트라의 1923년 녹음 ‘The Dicty Blues'는 아마도 그 시절 테너 색소폰의 솔로가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음반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때 콜맨 호킨스의 연주가 오늘날 재즈에서 테너 색소폰의 역할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 악기는 대표적인 솔로악기로 사용되지만 당시의 테너 색소폰은 베이스처럼 음악의 저음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그 솔로도 매끄러운 선율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마치 튜바 연주처럼 툭툭 끊어진 스타카토 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호킨스가 선구적으로 사용했던 테너 색소폰의 모습은 처음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헨더슨 오케스트라의 26년 녹음부터 호킨스의 테너 솔로는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테너 색스는 튜바와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부드럽게 이어진 선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테너 색소폰의 모습은 콜맨 호킨스를 통해서 서서히 트럼펫이나 클라리넷과 같은 존재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호킨스의 업적과 더불어 빅밴드를 이끌었던 플레처 헨더슨과 그의 편곡자 돈 레드먼(Don Redman), 베니 카터(Benny Carter)의 공헌을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편성과 편곡은 테너 색소폰을 저음악기가 아닌 중간 음역대의 악기로 활용함으로써 재즈 앙상블의 음역을 상당히 밑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빅밴드의 목관파트에서 클라리넷과 소프라노 색소폰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알토와 테너 색소폰이 차지하게 되었다.




34년 호킨스가 8년간 몸담았던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를 떠나 유럽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 그는 이미 그 악단을 대표하는 솔로주자였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미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색소폰의 왕으로 추앙 받고 있었으며 그를 추종하던 추 베리(Chu Berry), 벤 웹스터(Ben Webster), 돈 바이어스(Don Byas)가 공석으로 남겨진 호킨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색소폰 주자들에 대한 호킨스의 영향력은 트럼펫에 있어서 루이 암스트롱의 그것과 비교될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빠른 템포에서 격정적으로 스윙했고 그 음색은 허스키하면서도 중후했다. 모두가 호킨스처럼 불고 싶었다. 하지만 이때 호킨스는 의표를 찔렀다. 모두들 살벌한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을 때 그는 부드러운 발라드 ‘Body & Soul'로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마치 오르간처럼 조용하게 울리는 빅밴드의 반주 위로 호킨스가 3분 내내 펼치는 애잔한 즉흥연주는 그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품격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아마도 ‘Body & Soul' 한 곡만으로도 호킨스는 재즈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음악이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점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다. 호킨스는 40년대의 새로운 재즈, 비밥을 태동시킨 인물로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 43년부터 44년까지 그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는 이미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델로니오스 몽크(Thelonious Monk),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맥스 로치(Max Roach)등 젊은 ‘비바퍼’들을 기용하고 있었으며 디지의 작품 ‘Woody 'n You', 'Salt Peanuts'의 첫 녹음도 호킨스의 연주에 의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다. 1960년 맥스 로치가 흑인인권 운동의 기치를 내걸고 발표했던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음반 에서도 호킨스의 연주를 만나게 된다. 30년대 스윙시대에 이미 전성기를 맞이했던 연주자가 이렇게 변신을 거듭한 예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그것은 재즈에 대한 호킨스의 깊은 이해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는 결코 진보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화성적인 접근은 어떤 음악이든 그 체계를 이해하도록 만들었으며 그가 납득한 음악이라면 그는 무엇이든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비밥의 탄생에 있어서 호킨스의 공헌은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Art Tatum)의 영향과 더불어 면밀히 살펴져야 한다.

 

 





호킨스의 전기 [The Song of the Hawk]를 썼던 존 칠튼은 1950년 <다운비트>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면서 호킨스를 ‘일반적인 재즈 뮤지션의 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반면에 그의 별명 매(Hawk)처럼 그는 위엄과 강한 자존심을 갖춘 인물이었다. 연주시합에서 그는 늘 상대를 제압했으며 동시에 화가 피카소의 그림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당시 재즈맨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었다면 그건 지나친 음주였다. 만년의 그는 위스키에 중독되어 있었고 수척해진 얼굴과 그것을 가리기 위해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염은 나이 든 호크의 복잡한 내면을 한 눈에 보여준다. 그래서 비록 전성기는 훨씬 지났지만 그가 66년 볼티모어에 있는 레프트 뱅크 재즈 소사이티에서 녹음한 라이브 음반 은 감정의 깊은 굴곡을 곳곳에서 느끼게 한다. 그가 연주할 때처럼 눈을 감고 그 음악을 들으면 허름하고 누추한 재즈 클럽에서 ‘Body & Soul'을 연주하고 있는 늙은 호크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