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재즈의 두 번째 100년의 아침이 이미 밝은 지금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루이 암스트롱(1901-1971)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고루하게 느껴 질 수 있다. 그에 대한 모든 찬사들, 예를 들어 ‘재즈의 아버지’, ‘재즈의 전도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럼펫 주자’, ‘진정한 외교관’ 등 화려한 미사여구들도 이제는 일종의 클리쉐가 되어 별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하기야 그의 목소리가 개그맨들의 모창대상이 된 게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니 그의 음악에서 이제 어떤 진지한 감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at his home in Queens, New York, 1971
하지만 여기에는 그의 유명세 혹은 그저 세월의 문제로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단적으로, 지금 우리는 250년 전에 탄생한 모차르트에 열광하면서 1년 내내 그의 음악을 찬미하면서도 이제 겨우 탄생 100년이 갓 넘은 루이를 서둘러 폐기처분 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미 루이의 음악을 들을 만큼 들은 것일까? 천만에. ‘What a Wonderful World' 한 곡으로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과장하자면 ’Ich Liebe Dich' 한 곡으로 베토벤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그의 유명세만큼 우린 그의 음악을 그리 경청한 적이 없다. 그건 지금의 재즈에 열광하고 있는 젊은 매니어들 사이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누가 지금 이 ‘광대 할아버지’의 음악을 듣는단 말인가.
그러나 단언하건대, 20세기 미국음악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 루이 암스트롱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는 20세기 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창조자 중 한 명이며 미국음악의 원형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 암스트롱이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쇤베르크,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20세기 예술의 개혁자들과 나란히 하고 있다는 평론가 요아힘 베렌트의 지적은 아주 정확하다.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지워 놨을 때 오늘날 팝뮤직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없었다면 빙 크로스비나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미국의 고전적 발라드 가수들은 태어날 수 없었으며 아마도 그를 거치지 않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태어났다면 그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일찍이 ‘제명’되었을 것이다. 루이의 음악은 그 음악적 요소뿐만 아니라 뻔뻔스러울 만큼 대담 솔직한 성적 욕망을 이미 1920년대부터 노래함으로써 현대 대중의 정신을 만들어 놓았다.
루이가 20세기 대중음악의 유전자를 만들어 놓은 만큼 그가 자신의 분야, 재즈에 남긴 흔적은 가히 결정적이다. 그리고 이 업적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서, 혹은 만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나이 24세 때인 1925년에 이미 완성되었다. 그가 그 해부터 3년간 이끌었던 스튜디오 밴드 핫파이브(혹은 핫세븐)의 녹음들은 한 마디로 재즈의 시대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화려한 팡파르다. 여기에는 마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의 감동처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탈색되지 않는 시대의 전율이 있다. 만약 루이의 이 녹음들이 없었다면 재즈란 20세기 전반에 잠시 나타났던 즉흥적인 앙상블 음악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핫파이브 녹음에서 루이의 트럼펫 연주는 독주자와 반주자의 역할을 분명히 구분해 놓으면서 화려한 독주의 미학이 무엇인지, 재즈솔로가 전해주는 즉흥의 짜릿함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완성해 놓았다. 당시 그들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West End Blues'에서 루이의 트럼펫 솔로는 다른 연주자의 반주 위에 우뚝 솟아 있으며 특히 정박자에서 약간씩 밀고 당기는 섬세한 리듬감은 재즈와 트레디셔널 팝의 리듬적인 기초인 절묘한 스윙을 이미 완성해 놓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을 루이 혼자서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소 부당할 것이다. 재즈의 고향이자 루이가 태어나고 자란 뉴올리언즈의 역사를 보더라도 루이는 결코 최초의 거장이 아니었다. 그에 앞서 버디 볼덴(1877-1931)이 있었으며 그를 이어 루이 암스트롱을 발탁했던 조 ‘킹’ 올리버(1885-1938)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루이만큼 재즈가 갖고 있는 가능성, 그러니까 솔로의 화려함, 리듬의 유연함 등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루이는 그 가능성을 캐내고 완성함으로써 재즈를 세계의 음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이후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오넷 콜맨이 만들어 놓은 업적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과 윤복희와의 특별한 인연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 워커힐을 처음 오픈하는 기념공연에 루이 암스트롱이 초청 되어 왔고, 그는 당시 막 노래를 시작하던 열 다섯살 윤복희를 오디션에 의해 발탁하게 된다. 윤복희는 루이 암스트롱 한국공연, 그의 무대를 함께 꾸몄다. 무명의 윤복희가 라스베가스와 전세계 순회공연을 떠나는 계기가 바로 루이 암스트롱과 당시 최고의 지성가수 유주용과의 소중한 인연 때문이었다. justinKIM
그럼에도 루이 암스트롱이 오늘날 일각에서 너무 케케묵은 인물로 비춰지는 것의 저변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너무나 낙천적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정부와 너무 우호적으로 지냈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재즈 뮤지션으로 유례없이 누렸던 그의 명성에 대한 기대치이자, 동시에 60년대 이후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인종적 갈등을 심각하게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루이가 평생에 걸쳐 미국 정부와 편안히 지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50년대 후반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보다 격심해지자 ‘솔직한’ 루이는 몇몇 인터뷰에서 백인들과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고 그 결과로 예정되어 있던 국무부 후원의 그의 소련 공연은 갑자기 취소되었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루이는 비행장까지 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비행기 탑승을 저지 당했는데, 훗날 공개된 당시 FBI의 비밀문서를 보면 루이 암스트롱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결코 소련에 보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끔찍하면서도 우스운 매카시즘의 흔적은 루이가 훗날 데이브 브루벡 작곡의 ‘Real Ambassador'에서 “내가 진짜 외교사절”이라고 노래했을 때 또 다시 고개를 쳐들고 그를 음해 하려 했다.
하지만 루이는 진실로 비정치적인 인물이었으며 우호적이며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해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결과다. 그러니까 뉴올리언즈의 환락가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매춘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극빈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소년원에서 뒤늦게 처음 악기를 접한 이 소년이 천재적인 음악성은 물론이고 세상과 사람들을 어떻게 그토록 따뜻한 눈으로 바라 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멀리 떨어진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재즈란 연주자의 품성을 가장 투명하게 반영하는 음악’이라는 말은 루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연원을 알 수 없더라도 그의 트럼펫 소리는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온기와 달콤한 사랑이 늘 배어 있었으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는다. 미국이라는 인종차별사회를 그토록 혐오했던 마일즈와 맥스 로치도 그에 대한 진정한 존경을 아낌없이 표현했던 것에는 분명 그가 지녔던 관대한 인간성에 대한 존경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재즈를 들을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루이 암스트롱이 좋아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암스트롱의 자필 사인
You`er driving me crazy / Louis Arm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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