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6·25 자료들(1950·06·25)

1. 비극을 알린 신호 ‘폭풍’

바래미나 2011. 4. 22. 02:32

1. 비극을 알린 신호 ‘폭풍’



  1950년 6월 25일,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상 설정되었다가 어느덧 국경 아닌 국경으로 변한 38선 일대에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동트기 이전인 새벽 4시가 되면서 38선 일대에 배치된 북한군 각 부대에 암호명 '폭풍'이 하달되자 이미 남쪽을 향하여 조준을 완료하고 있던 모든 대포는 국군 진지를 향하여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였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송악산 전투'처럼 서로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국지적인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국군은 부지불식간 날아온 포탄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한적인 공격이라 생각했던 최초의 생각이 오판임이 밝혀지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은 서해의 끝 옹진반도에서 동해의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체에서 북한군은 동시에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포연이 걷혀가자 주요 축선으로 탱크를 앞세운 대규모의 북한군이 남하하는 모습이 관측되었습니다. 바로 현대사 최고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었습니다.

  

[포격을 가하는 북한군 포병]

  침략을 당한 우리입장에서 6·25전쟁 최초의 모습은 기습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대비태세 부족과 그로인해 당했던 굴욕을 핑계로 삼기 위해 언급한 단어였을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38선에서 국지적인 도발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로인해 비상경계령이 발령되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놓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종 정보에 의해 전쟁이 임박한 징후를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단지 경계기간이 길어지고 농번기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후속 대책도 없이 전쟁 발발 바로 전날 경계령을 해제하였을 만큼 당시의 군 수뇌부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물자와 장비를 지원받고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완료하고, 남침 직전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을 중국으로부터 전환 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개전 2주전이 되었을 때 북한군은 전차, 야포, 함정,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20여만의 병력을 38선 일대로 은밀히 이동시켜 배치하여 놓고 남침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국군은 많은 병력이 외박이나 휴가를 떠나 불과 6만여 명만이 정상적인 근무중이였습니다. 더구나 중무장한 북한군과 달리 미국으로부터 전력증강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국군은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군의 전신이 되는 창설 직후의 국방경비대]

  분명히 개전직전 남북 간의 전력비는 일방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차이가 많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개전 초에 있었던 굴욕적인 패배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무조건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쟁 초기에 국군이 오합지졸처럼 무조건 붕괴되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우에 따라 부족한 전력으로도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능욕 당하였다는 치욕이 너무 커서 그런지 6.25전쟁을 겪었던 세대조차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론적인 세세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망설임 없이 동족을 향하여 총을 쏘면서 전쟁이 개시되었고 그것은 회복하기 힘든 엄청난 비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입니다.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무려 500만 명의 인명피해와 1천만 이산가족,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800만 명이 전쟁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우리민족이 오천년 역사 동안 겪었던 최악의 피해입니다.

[저 폐허가 불과 60년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불과 60년 전의 가까운 과거의 일이며, 휴전이라는 형태로 아직도 끝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땅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망각과 무관심은 60년 전에 발발한 참혹한 전쟁을 막지 못하였던 원인중 하나이기도 하였습니다. 결코 남의 땅에서 벌어진 남의 역사가 아닌 그리고 아픔을 잊지 말고 교훈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참혹하였던 우리 현대사 비극의 현장으로 이제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