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역사 속으로의 단편

문무왕, 김알지, 흉노, 투후, 김일제

바래미나 2009. 1. 29. 02:39

 

문무왕, 김알지, 흉노, 투후, 김일제 낙서장

2009/01/15 15:36

 






















<後漢시대의 감숙성 고분에서 나온 청동말 조각.>

 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金氏王族은 북방草原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匈奴族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定說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4~6세기 신라는 중국문화를 거부하고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 서방의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로마가 무너지자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2대 일류문화를 수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匈奴族의 당당한 자존심이었다고 한다
  
  
  1장 : 우리 몸속에 흐르는 匈奴의 피
  
  
  민족사의 주도세력인 신라 金氏 왕족의 뿌리
 
  우리 민족사의 주체세력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金氏들이다.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으로 상징되는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朴氏, 昔氏에 이어 金氏 왕조를 연 것은 3세기 초 味雛이사금이고 4세기 奈勿麻立干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金氏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 신라 金氏들이야말로 화랑도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도세력이고 따라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이란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이 집단은 민족문화의 原型을 굳히게 한 主役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취향에 따라 민족문화와 민족성과 민족사의 뼈대가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 신라 金氏 왕족들은 그래서 민족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불릴 만하다.
 
  요사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이 신라 金氏 왕족이 북방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계이며 이 집단이 북방에서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집권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신라 金氏 왕족이 지배층으로 등장하던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왕들은 奈勿 麻立干, 智證 麻立干식으로 불렸다. 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칭기즈칸의 칸)과 같은 語源이다. 이 金氏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積石木槨墳이라 불린다. 시신을 木槨 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木槨이 썩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積石木廓墳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19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목곽분의 전형이다. 장례식과 墓制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런 墓制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득세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4~6세기의 6대에 걸친 麻立干 시대(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지증마립간)에만 나타나는 신라 적석목곽분에는 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騎士가 떠오른다. 金氏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서 지배층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고고학자들이 과감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崔秉鉉 교수 -「東아시아 기마민족의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崔秉鉉 교수는 「新羅古墳硏究」(一志社)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 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3~4세기 중국 북부 유목민족 大南進 때(5胡16國시대) 한반도로 밀고 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金氏 왕족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흉노계라는 신라 지배층이 성씨를 金이라고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과 칼, 馬具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한국인인가 의아해 할 정도로 異國的이다.
 
  적석목곽분이란 墓制, 북방系 출토 유물들, 풍부한 馬具와 금제품, 金씨, 麻立干이란 호칭 등이 흉노의 표시물들인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자신의 著書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積石木槨墳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東南進한 시베리아계 주민의 후예로서, 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繩蓆文(승석문)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흉노-고조선-신라의 연결고리
 
  경기도 박물관 李鍾宣 관장(56)은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계이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를 만났다.
 
  그는 「古新羅王陵硏究」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내물왕과 왕비라고 추정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박물관장 출신인 李관장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先史原史學科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했었다.
 
  李관장은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出自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부여계통은 퉁구스族이고 신라 金氏 왕족은 좀더 유목적이고 서방적인 흉노-알타이계통이라고 했다. 물론 金氏族이 경주에 들어왔을 때는 유목민의 성격은 버린 상태였지만(유목은 넓은 草原이 있어야 한다) 騎馬전법은 갖고 왔을 것이다.
 
  李관장은 고조선의 지배층도 흉노계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기 전 2세기 漢武帝한테 망한 고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흉노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漢武帝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漢族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였을 것이라고 했다.
 
  李관장은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을,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고구려-백제의 남북형과 알타이-몽골초원을 고향으로 하는 고조선-신라-가야의 서북-동남방형으로 가른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로 집결했던 유목기마민족 출신들이 우수한 馬具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대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때와 비슷한 전개였을 것이다. 영국계, 프랑스계, 스페인계가 아메리카로 들어갔던 것처럼, 고구려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일본열도라는 신천지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정복왕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天皇家도 가야 출신, 백제 출신 등으로 명멸하다가 어느 단계 이후에는 백제 출신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李관장은 신라 김씨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 부근에 뿌리를 둔 유목민이 東進하는 과정에서, 북방 초원 지대를 통일하여 거대 제국을 만든 흉노계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지만 알타이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신라지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알타이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가깝고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로마문화권과 끊임 없이 교류해 왔기 때문에 알타이계 신라 金氏 왕족 무덤에서 로마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金氏 왕족이 바로 북방草原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麻立干, 삼국사기에서는 尼斯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金氏王族의 실질적인 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를 거부했나
 
  李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평양도 넓은 들이란 뜻이고 경주의 옛 이름도 서라벌인데 넓은 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라벌이 나중에는 서울로 바뀌지요. 이는 흉노족이 평양에서 경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李鍾宣 관장은 신라는 馬具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族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李鍾宣 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銅(동복: 유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무기로 보면 신라는 보병 의존, 가야는 기병 의존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기마전투는 거의 활로 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칼 싸움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李鍾宣 관장은 『신라가 중국문화와 차별되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金氏 왕족들의 자존심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흉노계의 金氏 왕족들은 신라의 지배층이 되자 백제, 고구려의 親중국 정책과는 반대로 갔다. 그들은 4~6세기 중국과는 교류를 하지 않는 대신에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로마지역과 교류했다. 그 증거물들이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로만 글라스와 寶劍 등이다.
 
  『아마도 몽골고원의 서쪽인 알타이 출신들인 金氏 왕족들은 중국과는 문화와 습속이 맞지 않아 불편했을 것입니다. 중국인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신라 김씨의 이런 주체성과 오기는 흉노-알타이계라는 종족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기사의 주요 話頭이다.
 
 
  동서양의 대격변을 일으킨 흉노-훈족
 
  崔秉鉉·李鍾宣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 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崔교수는 흉노 기마군단의 급작스러운 경주 진출을, 李원장은 흉노계 민족의 단계적인 이동을 想定하고 있다.
 
  흉노족은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중국의 晉이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하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 등 다섯 유목민들은 南侵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胡16國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유목민족 대이동의 흐름을 타고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장악한다.
 
  이 흉노계 신라 지배층이 삼국통일을 주도하여 오늘날 한민족으로 불리는 정치·문화·역사 공동체를 건설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라가 唐과 결전하여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할 수 있었던 정신적 힘-정체성, 자존심 같은 것도 출신성분이 漢族과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정직하며 당당하다. 개인적이고 오기가 세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은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 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훈·흉노·신라는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주는 기마민족의 띠이자 말의 길이다.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같은 시기(4~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같은 흉노(훈)족에 의한 일대 격변으로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는가를 알기 힘들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민족사를 세계사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재정립이기도 할 것이다.
 
 
  유목민족의 종착지 辰韓
 
  중국의 晉나라 사람 陳壽가 3세기에 쓴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馬韓·辰韓·弁韓의 三韓 사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여 남긴 기록으로서 한국인의 조상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史實이다. 이 기록과 삼국사기, 그리고 고고학적인 발굴을 종합하면 신라의 지배세력은 동북아시아를 서북쪽에서 동남 방향으로, 즉 대각선으로 이동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東夷傳에 따르면 辰韓의 왕이 항상 馬韓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양대 인류학과 金秉模 교수는 『이는 신라의 前身인 辰韓 사람들이 토착민인 지석묘人들과는 경제방식이 다른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 辰韓의 외래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東夷傳의 기록을 본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에 따르면 옛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勞役을 피해 韓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떼어 이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城柵(성책)이 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 다르고 秦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秦은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그 秦이다. 秦은 중국의 서부 감숙·섬서성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다수 주민들은 유목민들이었다. 戰國시대 7雄 중에서 秦만이 유목국이었고 나머지는 농경국이었다. 서기 전 221년에 秦이 통일한 데는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秦의 시황제는 蒙恬(몽염)의 지휘하에 만리장성을 쌓고, 함양에 궁궐을 짓는 등 백성들을 혹사했다. 이때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로 들어온 秦人들이 지금의 경상북도 지방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辰韓은 秦韓이라 쓰이기도 했다.
 
  東夷傳은 이어서 이렇게 썼다.
 
  <동방 사람들은 자신들을 阿라고 부르는데 樂浪郡의 사람을 阿殘이라 부른다. 낙랑군 사람들은 자신들의 殘余이므로 「阿殘」이라 부른다>
 
  문맥상 東夷傳의 著者인 陳壽는 「辰韓사람들이 도망쳐 온 중국의 秦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낙랑군 주민 출신이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 李鍾宣 관장이 단정했듯이 고조선과 낙랑군(평양 부근)의 住民들은 흉노족이었다. 이 흉노족 중에는 秦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이 다시 경주로 옮겨가서 살고 있는 상황을 陳壽는 다소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흉노족 流入
 
  삼국사기에는 또 서라벌의 산과 계곡 속에는 기원 전 2세기 古朝鮮이 망한 뒤 그 유민들이 들어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條에는 또 辰韓 토착민들과 섞여 살던 秦人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적혀 있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흉노권 공략의 일환으로서 흉노계인 고조선을 친 것이라고 한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서기 전 2세기. 서기 1세기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자 낙랑 사람 5000명이 신라로 투항해 와서 6部에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낙랑사람들도 漢族이 아니라 낙랑의 귀족인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晉나라 사람 陳壽가 쓴 三國志의 「魏志」 東夷傳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2세기 신라땅에는 대강 네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 선사시대부터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 이들은 지석묘(고인돌)에 묻혔다. 남방계가 많았을 것이다.
 
  2. 서기 전 3세기 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
 
  3. 서기 전 2세기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하여 망하자 이동해 온 遺民들.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4. 서기 1세기 낙랑에서 투항해 온 5000명. 이들도 고조선이 망한 뒤 낙랑에 남아 漢族지배下에서 살던 흉노계일 가능성이 높다.
 
  東夷傳의 기사를 분석하면 중국 서북쪽(秦)에 살던 흉노족이 여러 차례의 흐름을 타고 고조선·낙랑지역인 평양 부근을 징검다리로 삼아 경주 지역으로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만 文武王이 스스로 자신의 碑文에서 『나는 金日(김일제)의 후손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金日가 바로 秦나라 땅에 살던 흉노왕의 아들이었다. 文武王의 발언과 東夷傳의 기록, 그리고 고분 발굴 결과는 같은 맥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120년간의 흉노계 麻立干 시대
 
  한양大 金秉模 교수는 남방계통인 농경민족을 북방흉노계 민족이 올라타는 식으로 신라종족이 구성되기 시작했는데 북방계가 권력을 잡아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6세기 신라왕이 麻立干으로 불리던 시절의 金氏 왕족들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북방 초원문화, 즉 로마-스키타이-알타이로 연결되는 서방문화를 溫存해가면서 독특한 묘제(積石목곽분)와 금관·금팔찌·금귀고리·금허리띠들을 남겨 고고학자들을 놀라게도 하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3세기에 쓰인 陳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韓(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마한, 진한, 변한의 통칭) 사람들은 구슬을 좋아하고 비단이나 금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금관을 쓰고 서방과 교류하면서 페르시아와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을 수입하고 騎馬부대를 지휘하였던 이 집단은 3세기 이후에 경주지역에 들어온 새로운 흉노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金秉模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초원의 동쪽 끝으로서 초원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기마민족들이 팽창할 때는 거의 반드시 한반도에 진입·침입·정복의 과정을 밟았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하기 이전의 고대에는 이런 북방민족의 진입이 여러 루트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여러 흐름의 민족이동을 보면 하나의 분명한 차별성이 눈에 띈다.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그 문제를 정리한다.
 
  『삼국이 다 북방계의 지배를 받는데, 그 계통은 고구려·백제가 夫餘系, 신라는 흉노계입니다. 부여계는 만주 동쪽에 살았고 인종적으로는 퉁구스계이며 순수 유목민이 아니고 수렵과 농업도 함께 했습니다. 흉노계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이고 순수 유목민이며 서방과 접촉이 많고 그쪽 문화를 많이 수입했지요』
 
 
  金閼智는 알타이 사람
 
  그가 1998년에 쓴 「금관의 비밀」(푸른역사)은 금관을 만든 주인공들을 추적한 책이다. 그는 왜 신라의 金氏 왕족들이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흉노계 출신의 기마민족인가를 논증하고 있다. 金교수는 수많은 발굴 경험, 알타이 지역 답사 경험, 언어학과 신화학을 동원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신라 金氏들은 흉노계이다』고 단정짓고 있다.
 
  1. 금관은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발굴된 이래, 1973년 천마총, 이듬해 皇南大塚 등 신라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다. 이 적석목곽분은 내물마립간(356~402)에서 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는 여섯 대의 마립간 시대 왕족 무덤에서만 나온다.
 
  2. 이 금관은 그 형식과 상징성이 모두 스키타이-흉노계의 금관·샤머니즘·토템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근 무역전시관에서 전시된, 내몽골의 흉노 單于(선우: 왕) 무덤에서 나온 금관 꼭대기엔 날개를 벌린 새가 앉아 있다. 스키타이 전사의 투구에도 새가 앉아 있다.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천마총에서는 금제 새날개 모양의 冠 장식물이 발굴되었다.
 
  3. 새는 북방 유목민족이 숭배하는 동물로서 신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신화는 물론이고 지증마립간의 어머니 이름은 鳥生부인이다.
 
  4.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 몽골-투르크계 흉노 등이 활약하던 곳에서 많이 나오는 술잔인 角杯는 한반도에선 동해시, 포항, 경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지방에서만 나온다. 角杯는 뿔로 만든 술잔인데 戰士들이 맹세를 할 때나 출전할 때 승리를 다짐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5. 가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에는 角杯 모양이 붙어 있다. 기마민족과 각배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 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昔脫解 신화와 관련하여 각배가 등장한다. 金秉模 교수는 신라와 가야에서만 각배가 나오고 고구려·백제에선 나오지 않는 이유는 민족의 고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6.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유리그릇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물론 신라가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서방 유리 그릇은 백제·고구려·가야 고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신라의 金氏 왕족이 북방초원 루트를 통해서 서방과 교류할 수 있었던 민족임을 보여 준다. 부여족 계통의 행동 범위는 그렇게 넓지 못했다. 몽골-중앙아시아 초원을 무대로 설쳤던 흉노 출신만이 그런 노하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 金氏의 조상 金閼智 탄생 신화 속에 열쇠가 숨어 있다.
 
  <脫解이사금 條(서기 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그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는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始林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
 
  8. 金秉模 교수는 이 신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신화는 전형적인 알타이-흉노 문화권의 신화이다. 북방민족의 토템인 나무와 새가 등장하고 알타이에서 유래한 「알지」란 말이 나온다. 알지는 「알타이」의 한자식 발음이다. 알타이를 알타이 지방에선 알트, 알튼, 아르치로 발음한다. 알타이란 말은 金이란 뜻이다. 金閼智의 뜻은 그래서 金金이 된다.
 
  9. 昔脫解의 이름은 몽골어로는 「탈한」 또는 「탈하이」(복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한양대 金秉模 교수는 탈하이가 「대장장이」라고 해석했다. 쇠를 다루는 석탈해는 각배도 쓴 것으로 보아 흉노계로 보이는데, 김알지를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박혁거세系인 婆娑이사금에게 양보했다. 늦게 경주에 들어온 흉노계 세력이 연합하여 先住 박씨 세력에게 대항하다가 좌절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10. 알타이 산맥, 즉 金山 부근에서 살던 金을 좋아하던 흉노계 金氏 집단이 金城(경주)에 들어와서 왕이 되더니 금관, 금팔찌, 금목걸이, 금허리띠 등 금공예품을 많이 만들고 무덤에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金이야말로 흉노의 브랜드이다. 10세기에 일어난 12세기 대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에 망한 金은 여진족의 完顔部(완안부) 부족이 세웠다. 金史에 따르면 이 부족이 크게 된 것은 10세기에 金函普(金나라의 시조라고 한다)라는 신라인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金函普는 경순왕이 고려 王建에게 나라를 바칠 때 반발한 왕족의 한 사람이 만주로 들어온 경우라고 한다(金渭顯·「遼金史 연구」).
 
  고려는 몽골·거란 등 북방 유목제국의 침략을 받았지만 金은 고려를 치지 않았다. 金의 皇室이 고려를 형제국처럼 생각한 때문이다.
 
  17세기 이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세운 淸제국의 皇族들은 性을 愛新覺羅(애신각라)라고 했다. 「新羅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는 의미이기도 한데, 만주어로는 그 뜻이 「金」이다. 이들은 淸이 망한 뒤 金으로 性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東아시아에서 金氏는 흉노계통 유목기마민족의 족보를 이어가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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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와 흉노 투후 김일제, 성한왕 낙서장

2009/01/15 14:20

복사 http://blog.naver.com/jaseng54/90040566383

 
  • 윤복현
    • 번호 184802 | 2008.09.26 IP 124.28.***.150
    • 조회 1077

    무덤양식과 금관양식으로 분석하는 신라 김알지 왕조의 실체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김알지 왕조의 무덤인 황남대총에서는 장신구, 무기, 청기, 토기 등 57,000 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리 제품은 로마 유리 계통으로, 고대 로마 문화권 국가와의 무역관계를 시사한다. 금관과 유리그릇, 철기, 토기 등 57,000 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고신라의 문화를 파악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북분에는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매우 많은 반면에, 예리한 도구나 무기류는 매우 적다. 이러한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남분이 먼저 축조된 남편의 무덤이고 북분은 나중에 축조된 부인의 무덤임을 알 수가 있다.

     

    [자료]황남대총 유물















     
     
       
     

    북방유목민족의 특징인 적석목곽분양식의 황남대총은 흉노족 김알지 왕조의 무덤이다. 출토된 흉노석상이나 시베리아 스키타이(흉노)족의 특징인 금관이 이를 증명한다.

     

    신라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 김알지 후손인 신라 문무왕은 비문에 흉노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 흉노의 휴도왕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휴도왕의 아들 김알제는 한나라에 잡혀간 황태자인데,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흉노의 왕중 가장끝까지 용맹하게 저항한 사람이 휴도왕이다.

     

    김알지 조상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나라 의 최대 고민은 북서쪽의 흉노였다. 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민족인 한족의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치 세금이라도 걷듯이 쳐들어 와서 애써 농사지은 곡물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무제는 흉노 정벌을 결심하는 데, 무제의 외조카이기도 했던 곽거병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 전쟁에 나 섰던 인물이다. 곽거병은 무릉박물관에 말을 타고 흉노를 짓밟는 석상이 있 을 정도로 흉노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흉노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준 최초의 인물이기에 무릉박물관을 그의 묘자리에 세운 것이다.


    우리에게 곽거병은 ‘한서’ ‘곽거병전’에 나오는대로 “휴도왕이 하늘 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몰수(收休屠祭天金人)”하고 휴도왕의 태자 김 일제를 한나라로 끌고온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나라와 결사항전을 주 장하던 휴도왕은 항복을 꿈꾸던 혼사왕에게 살해당하고, 김일제는 어머니 알 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왔다. 김일제는 흉노의 태자에 서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방치되다시피 잡초가 우거진 김일제의 묘 입구는 사과밭이 가로막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서 묘비가 보이지 않기에 사과나무를 조심스레 제치며 들어가니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 ‘무릉배장묘(茂陵陪葬墓 )’란 금색 글자 아래 ‘김일제(金日제) 묘’란 검은색 글자가 선명했다.

     

    흉노 임금 휴도왕의 장자이자 김알지의 조상인 김일제가 이 머나먼 이역땅 에 누워 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머나먼 하서주랑의 언지산 근처에서 체포되어 마부가 되었다가, 무제를 암살에서 구한 공로로 투후( 侯)로 봉해 졌던 굴곡심했던 그의 무덤은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라는 금빛 표석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는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에서 밭을 갈 던 한 농부가 문무왕 비문을 발견함으로써 단서가 열렸다. 비문은 발견 당 시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마모되어 있었으나 ‘투후지윤( 侯之胤)’, 즉 “문무왕은 투후의 자손이다”라는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다행히 경 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비문을 탁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그 내용의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를 연결시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은 실학자 유득공(柳得 恭)인데, 그는 ‘고예당필기(古藝堂筆記)’ 권6에서 “김일제의 김(金)이 계림 (鷄林)의 김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전문을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증거하지 못하겠다”라고 신중을 기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금석문의 대가라는 추 사 김정희는 이 탁본을 베이징까지 가져갔으나 그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 錄)’에는 정작 이 비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 금석문 학자에게까지 버림받은 문무왕비문은 잡석처럼 굴러다니다 가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일부가 동강난 채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서기 8년 왕망(王 莽:C 45∼AD 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사건과 관련이 있 다. ‘한서’ ‘김일제전’은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 다(當母南 卽莽母)”라고 적고 있는데, 김당은 김일제의 차남 건의 손자로서 투후의 지위를 이은 인물이다. ‘한서’의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당과 왕망 은 동복형제가 된다. 이 때문에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은 왕망의 성이 왕씨 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가 왕망이 흉노 후예라는 사 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왕망에 대한 ‘한서’의 기록은 일관성이 부족하고 앞뒤 내용도 서로 모순된다.‘한서’에 따르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과 동복형제 도 되고,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으로, 당의 이모 부도 되는 등 의문투성이인 것이다.

     

    왕망이 실제 김씨인지 왕씨인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왕망의 신제국때 김씨들이 중추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러나 왕망의 신제국이 14년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멸망하면서 왕 씨는 물론 김씨들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후한 광무제를 비롯한 유씨들 이 왕망과 그 지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후한과 맞서 싸우던 김씨들은 불리해지자 장안을 떠나 도주할 수밖에 없었 다. 그중 일부가 한반도 남단까지 이동해 경주 김씨와 가락 김씨를 세운다 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이다.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 (貨泉)이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와 한반도 남단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게 출토되는 것은 이런 이주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문무왕 비문에 나오는 성한왕(星漢王)이 누구인지도 주목된다. 金當(김당) 이 이은 김일제의 투후 지위는 당의 아들 金星(김성)이 잇는데, 마지막 투 후였던 星(성)이 바로 성한왕이고, 그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김알지라는 견해가 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바로 성한왕, 즉 김일제의 5 세손인 김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에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흉노의 관습과 유독 금을 좋아했던 신 라 왕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유일했던 투후라는 봉호와 문무왕비문의 투후 지윤( 侯之胤)이라는 구절, 그리고 ‘한서’의 김성(金星)과 문무왕비문의 성 한왕(星漢王)은 이 무릉에 배장되어 있는 김일제가 한반도의 김씨들과 떼려 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경주에서 발굴된 천마총 등 이 흉노족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으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고고학 유물이다.

     

    김일제 묘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산처럼 솟은 무제릉, 고조 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는 이래저래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머나먼 시안의 한 교외에서 필자는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일제 사이에서 질긴 인연의 끈을 느꼈다. 불교신자 라면 미생전(未生前)에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일단 신라vs흉노와의 공통점 ;칭호 풍습, 관제 ;3씨 귀족성제; 여왕; 유물이 거의 같다.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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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조우석 기자께 보낸 메일 노자와 중국 선진

    2009/01/07 14:44

    복사 http://blog.naver.com/jaseng54/90040110795

     

    조우석 기자님께


    저는 인천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있는 약사입니다. 신문은 경향신문을 보지만, 나름 균형을 맞춘다는 생각과 집안 어른을 위해 중앙일보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중앙일보의 정치 사회적인 기사는 제 성향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토요일의 책 소개는 잘 보고 있습니다. 특히 조기자님의 글을 빼지 않고 읽습니다.


    저는 지식은 변변치 않으나 평균적인 독서인들 보다는 상당히 많은 양의 책을 구입합니다. 관심은 중국 고전, 철학, 과학 일반, 심리학, 사회학 등이고 물론 다 보지는 못합니다.

    중국 고전, 특히 도가사상 책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책을 보았고, 중국어도 좀 읽을 수 있어서 수십 권의 중국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도가(道家)라고 생각합니다.


    2009년 1월 3일자 조기자님의 글 ‘책에 목마른 교포 북클럽’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 딸이 뉴욕대학교 경영대학교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에 뉴욕의 북클럽에 대해 쓰여 있어서 관심이 더 있었을지 모릅니다.

    조기자님이 소개한  동양고전 책들 중 2가지가 모두 노장사상에 대한 것이고, 다른 책에도 노장 사상이 소개돼 있을 것이므로 저는 ‘조기자님이 도가사상에 관심이 많으시구나’ 하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선정된 책들에 대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고자합니다.


    여기서 잠깐 조기자님도 관련되었던 지나간, 아니 현재도 진행 중인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조기자님께서도 2001년 <노자를 웃긴 남자>와 이 책을 쓴 이경숙에 대해 중앙일보에서 어느 정도의 기사를 실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당시 책 소개와 이경숙 인터뷰, 칼럼 등과 <월간 중앙> 기사를 쓴 배영대 기자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배기자 혼자서 그런 정도의 작업을 할 수는 없고, 도올 김용옥이나 다른 언론사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한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배기자는 당시의 행위로 기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저는 조기자님께서 이런 일에 반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첨부자료 2: ‘이경숙 노자 비판’-노바당, 2007)


    저는 당시에 인터넷에 이에 대한 글을 몇 편 썼고, 이 글을 본 출판사 ‘씨앗을 뿌리는 사람/ 장익순’에서 두 권의 책 <노자 제대로 읽기>, <저급한 도올 비판을 비판한다>를 내 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배기자를 포함한 서평 담당 신문기자들을 대부분 비판했기 때문에 신문에 평이 실릴 수 없었고(기자들이 책의 급을 낮게 보아 그랬겠지만), 유일하게 국민일보의 김현덕 기자가 제 사진까지 새로 찍어 책 소개 기사로 크게 실어서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당시 저 같은 아마추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정도의 책을 노장사상으로 논문을 쓴 배영대 기자나, 고전전공학자들이 엉터리 기사와 양비론적 칼럼으로 독자들을 호도했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사회문제화되고 있고, 노장사상에 대한 엄청난 오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일이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언론과 인문학계의 엄청난 추문이고, 배영대 기자는 매장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기자님이 소개한 동양고전에 대한 책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오강남 <장자>

    2. 기세춘 <동양고전 산책 1, 2>

    3. 장일순 <노자 이야기>


    저는 이 중 오강남과 장일순의 책을 읽었고, 기세춘의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오강남이나 장일순 같은 분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지만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노자> 강의를 포함한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어서 기독교인들의 <노자> 이해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칭 도가로서의 저의 관점이지만 도가사상은 무신론으로, 기독교인들이 읽고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는 있어도, 기독교인이면서 노장사상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 제가 전에 진보 신학자인 김명수 교수의 강의를 듣고 쓴 글을 첨부합니다.(첨부자료 3: ‘기독교와 노자/ 김명수 강의를 듣고’- 노바당 2008)  


    여기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제가 읽지 않은 기세춘의 책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세춘은 민중 운동가였고 어렸을 적부터 한학을 했다고 합니다. 기세춘이 민중 운동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책 소개가 주로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에 실렸다는 점으로도 간접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세춘이 어렸을 때 한문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세춘은 한문 전문가도 아니고, 노장사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 합니다.


    저는 기세춘이 <노자를 웃긴 남자>를 쓴 이경숙보다는 한문 실력이 조금 낫지만 <노자>, <장자>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잘 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세춘의 800페이지나 되는 책 <묵점 기세춘 선생과 같이 하는 노자강의>를 보았습니다. 기세춘은 <노자>를 <장자>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책만 읽었어도 기세춘이 <장자>를 어떻게 보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참고자료 1: 기세춘 노자 비판- 노바당 2008)


    이런 말을 오래 드려 봐야 소용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증명할 수 있는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바쁘시겠지만 한 번 읽어 보시고 우리나라 인문학의 큰 축을 맡으신 분으로서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도 좋은 계획과 실천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2008. 01. 07  인천에서 김상철 드림 



    추가: 1.<노자를 웃긴 남자>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쓴 이경숙의 사회적 해악(저자 바꿔치기, 다단계, 기공 사기)에 대한 반대 사이트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 운영진은 아니지만 제가 쓴 몇 편의  글을 모아 놓은 방이 있습니다. 여기의 노바당이 접니다.

    paxkonet.com->노자를 웃긴 짜깁기->노자 제대로 읽기


    2. 제 블로그는 잘 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 사이트의 글의 원본이 있습니다.

    노바당의 취미 생활 blog.naver.com/jaseng54

     


    첨부: 참고 자료 1: ‘기세춘 <노자 강의>’ 비판

          참고 자료 2: ‘이경숙 <노자>’ 비판

          참고 자료 3: 기독교와 노자 1, 2

     

     

    [조우석 칼럼 책에 길을 묻다] 책에 목마른 교포 북클럽 [중앙일보]

    “요즘에는 무슨 책이 좋다지? 리스트 좀 많이 뽑아주셩~.”

    뉴욕에서 막 도착한 수필가 이영주씨다. 날아가는 전화 목소리를 들은 건 크리스마스 직전. 그의 세 딸 마리아(첼로)·루시아(피아노)·안젤라(바이올린)로 이뤄진 안트리오 공연(지난해 12월 17일 예술의전당)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인데, 딸 이야기보다 책 타령이 먼저다. 그곳 한인신문의 유명 칼럼니스트다울까?

    “내가 운영하는 AWCA북클럽에서 읽을 거야. 한 달에 두 권씩 읽는데, 내가 책을 지정하면 각자 읽은 뒤 모여서 자유토론을 벌여. 이민 생활에 못 말리는 즐거움이지. 뉴욕·뉴저지의 15명 멤버가 품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목마름은 상상 이상이라니까. 벌써 5년째네.”

    며칠 뒤 안트리오의 세종문화회관소극장 공연(지난해 12월 20일) 때 만나 리스트를 건넸다. 척 훑어보더니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은 읽어둔 지 오래라며 빙긋 웃는다. “대체 안 읽은 게 뭐야?” 하고 물어야 할 판인데, 픽션류만 박완서 『그 남자네 집』, 김영하 『검은 꽃』, 김훈 『칼의 노래』, 권지예 『뱀장어 스튜』, 박민규 『카스테라』 등 수두룩하게 꼽는다.

    단 내 추천 리스트에는 논픽션이 많다. 보완 효과가 있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다행인데, 번역서는 일단 제외했다.

    한국문화를 다룬 것, 이왕이면 가독성을 위주로 추렸다. 북클럽 멤버가 아니라도 마음에 차는 딱 한 권만 챙겨도 그게 어딘가. 그런 연유로 앞머리에 신화학자 정재서의 『이야기 동양신화』 『사라진 신과의 교신을 위하여』, 미술사학자 강우방의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을 넣었다.

    동양고전으로는 오강남 본 『장자』, 기세춘의 『동양고전 산책 1,2』을 포함했다. 여기에 살아 생전 ‘원주의 예수’로 불렸던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국제학계가 인정하는 한국전쟁 연구서인 박명림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까지 포함시켰는데, 이 두 권은 좀 많이 무겁다. 해서 나머지는 편안한 읽을거리인데,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조영남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윤광준 『생활명품』이 그것이다.

    깜짝 케이스는 두 권. 권정생의 대하소설 『한티재 하늘』과 김경의 산문집 『뷰티풀 몬스터』가 그것이다. 『한티재 하늘』은 미완성작인데 못 먹고 못 살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눈물 콧물 다 뺀다. 요즘 세상 우리를 품어주는 따듯한 위로다. 『뷰티풀 몬스터』는 믿거나 말거나 우리말로 된 최상의 산문인데, 심하게 튀기 때문에 조심할 것을 귀띔하고 싶다.

    자 여기까지다. 막 확인해보니 한국인의 독서량은 한 해 평균 12.1권. 미국·유럽의 통계를 가볍게 따돌리는 숫자인데, 뉴욕의 북클럽은 그 갑절인 셈이다. “책읽기만큼 좋은 재교육은 없다니까.” 연주회장을 막 빠져 나오며 이씨가 던졌던 말인데, 그거야말로 이 지면에서 2009년 내내 반복할 메시지다.

    조우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