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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점 <노자> 갑본 첫 부분, 절지기변 노자와 중국 선진

바래미나 2009. 1. 30. 02:40

 

곽점 <노자> 갑본 첫 부분, 절지기변 노자와 중국 선진

2008/10/23 10:03

복사 http://blog.naver.com/jaseng54/90036374017

 
 
우리가 시중 서점에서 사 보는 <노자> 번역 책이나 해설 책에 실려 있는 <노자> 책의 원문(한문)은 대체로 <노자 왕필 주>에서 왕필의 주(注)를 뺀 나머지 부분입니다. 왕필(226 ~ 249)은 후한(後漢)이 망한 후 삼국시대의 위(魏)나라(220 ~ 265)에서 태어나 17 ~ 18세 경에 <노자 왕필 주> 를 썼다고 합니다. 왕필은 주로 <노자>의 철학적 의미를 해설했습니다.
 
 
 
 
위 그림은 화정장씨본 <노자 왕필 주>의 1장 부분입니다. 큰 글씨가 <노자> 원문이고 두줄로 된 작은 글씨가 왕필의 해설입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노자>를 양생론적으로 해설한 <노자 하상공 주> 등 판본은 수없이 많고 책마다 <노자> 원문은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2000년 이상 <노자>의 일정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런데 1973년 말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라고 불리던 언덕에서 한나라 초기 고분(BC 168 매장)이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과 죽간, 백서, 백화 등 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장자의 시신이 죽은지 2000년 이상 지났는데도 피부의 탄력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위장의 음식이 다 소화되지 않아 죽기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할 수있는 정도 였습니다.
 
이 발견은 갑골문(甲骨文)의 발굴, 진시황 병마총의 발굴과 함께 20세기 중국의 3대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왕퇴의 귀부인>을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비단위에 쓰여진 <노자> 책이 두가지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을 보통 <마왕퇴 백서 노자>라 부르고, 먼저 쓰여진 것을 '갑본', 나중에 쓰여진 것을 '을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년 후 호북성 형문시 곽점에서 발굴된 무덤에서 많은 양의 죽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은 전국시대 중 후기의 초(楚)나라 귀족들의 묘지군에서 발견되었고, 유물의 상태로 보아 대체로 BC 300 전후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노자> 책이 발견되었는데 <마왕퇴 백서 노자>나 통행본 <노자>에 비해 1/3 정도의 분량입니다.
 
이 <노자> 관계 죽간을 형문시박물관에서 5년에 걸쳐 3개조(갑조, 을조, 병조)로 정리하여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 2300년 이상 전에 쓰여진 <노자>의 영인본이 실려있습니다.
 
 
 
 
 
 위 그림은 <곽점 노자>가 1993년 발견된 형문(荊門)시 박물관에서 1998년 발간한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 문물출판사>의 <노자 갑>의 첫부분입니다.
 
<곽점 노자>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책의 출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책 출판 후 미국 다트머스대학교에서 국제학술토론회가 있었고, 1년 만인 1999년에 그 결과가 <도가문화연구/ 진고응 주편> 제17집에 '<곽점초간> 전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여기에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학자들의 논문이 실려 있으나 우리나라 학자의 글은 없습니다.
 
 
위 그림은 원본의 영인본(사진판)입니다. 맨 오른쪽이 원래 죽간의 모습이고 옆의 큰 글씨는 3부분으로 나누어 확대한 것입니다. 이 큰 글씨 옆에 이 글자들을 고증하여 요즘 한자(없는 한자는 새로 제작하여)로 배인되어 있습니다.
 
원본은 전국시대의 초나라 글자(고문이라 함)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갑골문 ,금문(金文)의 글씨체와 많이 다릅니다. 진나라의 전서가 갑골문, 금문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고 후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이 전서를 개혁하여 소전(小篆)으로 통일된 글자를 만들었고 육국(六國) 문자(고문)를 폐지했습니다.
 
그 후 소전을 바탕으로 좀 더 쓰기 편한 예서(隸書)가 만들어 졌고 차후 중국 문명의 방향을 결정지은 한나라 때 예서를 공식적인 글자로 썼기 때문에 예서는 그 후 초서, 행서, 해서(요즘 쓰는 한자) 등 모든 글자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초나라 글씨는 당연히 요즘 한자와는 많이 다르고, 고문에 대한 문자학적, 음운학적 바탕이 있어야 해독할 수 있습니다. 이 글자를 요즘 한자의 상식을 가지고 해독하겠다고 하는 것은 영어 사전으로 라틴어를 해독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곽점초묘죽간<노자>교독>> 후재/ 1999/ 대련출판사
 
위 그림은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의 임본(臨本)입니다. 임본은 원래의 글씨를 보고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원본의 상태가 좋지 않고, 활자본으로는 원래의 글씨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때 사용합니다. 이것을 원본과 똑 같이 만들어서 원본이라고 팔아 먹으면 위서(僞書), 위작(僞作)이 되는 것이고 범죄 행위입니다.
 
 
 
 
 
 
 
 <초간노자변석> 윤진환/ 2001/ 중화서국
 
위 그림은 영인본과 배인본의 글자를 맞추어 놓아 비교하기 쉽게 해 놓은 것입니다.
 
배인한 부분은 원래의 글자 모양의 활자를 쓰고 괄호 안에 요즘 한자를 표시 해 놓았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에는 한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체자(異體字), 가차자(假借字)를 쓴 경우가 많습니다.
 
<곽점 노자>는 1998년 처음 공개되어서 10년 간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 졌으나 일부 글자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배인한 부분에 계자(季子)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괄호 안에 쓰여 있는대로 효자(孝慈)의 가차자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절지기변(絶智棄卞)의 '변(卞/ 실제로는 아래에 '또 우[又]' 자가 더 있음)' 자의 경우 처럼 여러 다른 뜻의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의 가차자로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죽간노자연구> 한백록(Robert G. Hendricks)/ 여근 역/ 학원출판사
 
<곽점 노자> 원문의 활자본과 현대 한자로 해석한 부분을 비교해 실어 놓은 것입니다.
 
네모난 묵점(墨點)은 <곽점 노자>의 통행본 19장 해당 부분에만 구절마다 표시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한 단원의 끝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과 다른 부분의 쓰여진 시기가 다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6째 줄의 절복효자(絶復孝慈)는 민복효자(民復孝慈)의 오자입니다.
 
 
 
 
<곽점죽서노자논고> 이약휘/ 2004/ 제노서사
 
위 그림은 <곽점 노자>, <마왕퇴 백서 노자> 갑본, 을본, <노자지귀>, <노자 하상공주>, <노자상이주>, <노자 왕필주>의 <노자> 원문을 비교해 놓은 것입니다.
 
<곽점 노자>에만 '절지기변(絶智棄辯)'이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 모든 책에서는 '절성기지(絶聖棄智)'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곽점 노자>에는 '절인기의(絶仁棄義)' 대신 '절교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원래의 <노자>가 반유가적인가, 아닌가하는 논쟁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곽점초간<노자>연구>> 섭중경/ 2004/ 중화서국
 
 
위의 두 페이지는 통행본 <노자> 19장의 첫 세 구절과 대비되는 <곽점 노자>의 갑본 첫 세 구절의 해설입니다.
 
<마왕퇴 백서 노자> 갑, 을본과 <노자 왕필주>의 <노자> 본문과 비교해서 해설한 것입니다.
 
여기에 '버릴 기(棄)' 자 아래 글자(변[卞] 자 아래 우[又] 자가 있는 글자)에 대한 구석규(북경대 한자학 교수)의 해설을 인용하고 있고, 아래 그림이 구석규의 원래 해설입니다.
 
이 글자는 <곽점 노자>에서 2회 나옵니다. 여기서는 변(辯) 자의 가차자로, 병본(丙本)에서는 편(偏) 자의 가차자로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곽점 노자>를 제외한 <곽점 초간> 중 2회가 더 나옵니다. <성지문지>에 '부부지?(夫婦之辨)', <존덕의>에 '교이?설(敎以辯說)'에 가차자로 쓰였습니다.
 
'버릴 기(棄)' 자 아래 글자(변[卞] 자 아래 우[又] 자가 있는 글자)는 '채찍 편(鞭)' 자가 본자이고, 이 글자와 음이 같거나  비슷한 '치우칠 편(偏)' 분별할 변(辨), 판별할 변(辯)'의 가차자로 쓰인 것입니다.
 
 
 
 
 
<곽점노자여태일생수> 형문 편역/ 2005 구석규/ 학원출판사
 
구석규나 그밖의 많은 학자들이 <곽점 노자>의 "절지기변(絶智棄辯)'을 후인들이 유가에 적대적인 구절인 '절성기지(絶聖棄智)' 로 바꾸었다고 주장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곽점 초묘에서 발견된 죽간은 모두 1만 3000 자 정도 됩니다. 그 중 도가서인 2000 자 정도의 <노자>와 <태일생수(太一生水)' 편 외에는 모두 유가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곽점 노자>의 일정 구절에 대한 후대의 변조가 가능하다면 그 이전에도 교육목적 상 유가에 적대적인 구절을 온건한 표현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00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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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마왕퇴 백서 주역 노자와 중국 선진

2008/10/16 14:38

복사 http://blog.naver.com/jaseng54/90036090905

출처 德 田 의 문 화 일 기. | bhjang3
원문 http://blog.naver.com/bhjang3/140052256744

 

마왕퇴 백서 주역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6.11.12 15:2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2-74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성도인 창사시(長沙市)에서 전해진 마왕퇴(馬王堆. 마왕뚜이) 한묘(漢墓) 발견ㆍ발굴 소식은 세계 학계를 진동케 했다.

 
 

                     마왕퇴한묘 백서

 
마왕퇴 한묘란 전한(前漢) 초기 장사국(長沙國)이란 제후국의 승상이면서 그 자신 또한 더 작은 제후국 왕이었던 이창(李蒼)과 그 처, 그리고 이들의 아들 일가족 무덤 3기를 말한다. 이 고분군에서는 3천여 점에 달하는 각종 유물이 쏟아졌으며, 개중에는 46종, 총 12만자에 이르는 문자 자료가 포함됐다.

 



마왕퇴 한묘 발굴이 세계를 경악케 한 것은 이창의 부인 신추(辛追)의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 시신과 함께 이들 문자자료 때문이었다. 문자자료는 백(帛)이라고 하는 비단이나 대나무를 가공한 죽간(竹簡)에 썼다. 본격적인 종이 발명 이전이므로 이런 목재류를 필기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마왕퇴 한묘 출토 죽백(竹帛) 문헌은 그 수량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종래에는 전혀 그 존재조차 알기 힘든 것들이란 점에서 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그 중 하나인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만 해도,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왕필본(王弼本)과 큰 차이는 없으나, 두 종류가 확인된 데다 현재의 통용본과는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덕경(德經)이 도경(道經)에 앞서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번 역주총서는 "마왕퇴 한묘 백서(帛書. 비단에 쓴 글) 중에서 대표적인 텍스트를 골라 30년에 걸쳐 축적된 관련 연구성과를 충실히 반영해 그 역주를 제공"함으로써 "전국시대 후기부터 전한 초기에 걸친 중국고대문화(사상ㆍ역사ㆍ의학ㆍ정치 등)의 전체상을 알도록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역주총서는 마왕퇴 출토 백서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의학서인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과 춘추시대 각종 일화 모음집인 '춘추사어'(春秋事語)의 두 종을 올해 안으로 추가하게 된다.

그 외 나머지 역주본 7종은 ▲노자 갑본 후일서(後佚書) : 오행(五行)ㆍ구주(九主)ㆍ명군(明君)ㆍ덕성(德聖) ▲황제사경(黃帝四經) : 경법(經法)ㆍ십육경(十六經)ㆍ칭(稱)ㆍ도원(道原) ▲주역경전(周易經傳) : 육십사괘(六十四卦)ㆍ이삼자문(二三子問)ㆍ계사(繫辭)ㆍ역지의(易之義)ㆍ요(要)ㆍ목화(繆和)ㆍ소력(昭力) ▲전국종횡가서(戰國縱橫家書) ▲족비십일맥구경(足臂十一脈灸經)과 기타 : 족비십일맥구경ㆍ맥법(脈法)ㆍ음양맥사후(陰陽脈死候)ㆍ음양십일맥구경 갑본과 을본 ▲각곡식기(却穀食氣)ㆍ도인도(導引圖)와 기타 : 각곡식기ㆍ도인도ㆍ양생방(養生方)ㆍ잡료방(雜療方) ▲태산서(胎産書)ㆍ십문(十問)과 기타 : 태산서ㆍ십문ㆍ합음양(合陰陽)ㆍ잡금방(雜禁方)ㆍ천하지도담(天下至道談) 등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972년 중국 후난성 창사시 마왕퇴(馬王堆) 1호 한묘(漢墓) 주인공인 귀부인 신추(辛追)의 미라. 신추는 전한시대 초대 장사국왕(長沙國) 승상을 지낸 이창(利倉)의 아내다. 내관(內棺)에서 발견될 당시 이 미라는 신장 154㎝에 체중은 34.3㎏이었다. 2천100년이 더 지났지만 발견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전신에 윤택이 났고 피하 조직 또한 유연했으며 탄력이 있어 관절이 살아 숨쉬는 듯 했다고 한다. 현재는 후난성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특히 1972년에 발견된 대후부인의 시신은 보존상태가 완벽하여 1천여 년이 지났는데도 근육에 탄력성이 있고 관절을 움직일 수 있어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미이라가 보존 상태가 좋았던 이유는 마와 견직물로 시신을 싸고, 산소와 수분으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 숯과 회점토로 밀봉한 관에 안치하였기 때문 이다.
 
마왕퇴(馬王堆) 무덤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 동안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던 2100년 된 미라가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갈 전망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발굴”로 불려지는 마왕두이는 전한(前漢)시대 초기 장사국의 승상이었던 이창(利倉)이라는 사람과 부인, 아들의 무덤이다. 1971년 최초로 발견될 당시 이 무덤을 초나라 왕 마은(馬慇)과 아들 마희범(馬希范)의 무덤이라고 추정하여 마왕두이라고 명명했다가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무덤에 반듯이 누워있던 귀부인 미라이다. 이창의 부인 신추(辛追)의 것으로 밝혀진 이 미라는 2천 년을 훌쩍 넘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지문과 모공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집트의 미라처럼 신체장기를 꺼내고 방부 처리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으며 어떠한 질병을 앓았는지 분석하는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무덤 속에서는 미라 외에도 3천 여건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20여종 15만 자에 달하는 서책은 당시의 학문적 수준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자수, 도자기, 칠기, 현악기 등도 당시의 생활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현재 대부분 중국의 국보급 유물로 지정됐다.

중국 정부는 마왕두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출토된 유물들을 발굴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할 예정인데, 가장 큰 문제가 귀부인 미라의 처리 문제였다. 현재 후난성(湖南省)박물관에서 첨단 과학기술에 의존해 누워있는 미라를 다시 무덤 속으로 옮겼을 때 안전하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유물이 출토된 곳과 보존된 곳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을 세계문화유산 지정의 제일 관건으로 삼는다.

11월 24일 창사시(長沙市)에서는 마왕두이 무덤 유지에 대한 기획자문회의를 열어 결국 귀부인을 무덤 속에 다시 돌려보낼 것을 결정했다. 2천년 동안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30여 년 간 잠시 외출(?)을 했던 귀부인. 중국 정부가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 안전하게 옮겨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주역의 괘, 숫자서 추상화로

한겨레 | 기사입력 2005.03.20 04:42


[한겨레] 김수중교수의 철학산책
 
1973년 마왕퇴 한묘에서 ‘비단에 쓰여진 주역(帛書周易)’이 나왔다. 이것은 주역에 대한 많은 전설과 의혹을 풀어주었다. 또 1970년대 이후 은대의 도자기 파편이나 갑골, 그리고 청동기에 새긴 글(銘文)이 다수 해독되면서 주역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근래에 알려진 사실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양효(一)와 음효(--)로 괘를 표현하기 이전에 먼저 숫자로 괘를 표현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에 ‘七五七 六六六’ ‘八六六五八七’ 등으로 해독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음양으로 나누어 괘로 표현하면 **와 **이 된다. 바꾸어 말해서 오늘날 음효와 양효로만 표현되는 고도의 추상화는 비교적 나중에 실현된 것이며 이전에는 1, 5, 6, 7, 8, 9 등의 숫자를 이용해 괘를 표현했던 것이다.
 
양효는 일찍부터 일자(一)로 표현하였으나, 음효는 처음에 6을 *으로 표시하거나 8을 八로 표현하다가 결국 --의 표식으로 귀결된 것이다. 지금까지 삼획으로 표현되는 팔괘를 복희씨가 먼저 만들고 이후로 그것을 상괘 하괘로 겹쳐 육획괘(64괘)를 완성했다는 가정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숫자괘설’은 이와 정반대의 순서로 괘가 등장했음을 보여 준다. 숫자괘는 6개 혹은 3개의 숫자로 구성돼 있는데, 대부분은 6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며, 그 출현 빈도수에 비추어 볼 때 64괘가 8괘보다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8괘의 상(象)을 통해 64괘의 구조와 내용이 설명된다. 주역에서 철학적 내용은 공자의 저술로 전해져 온 10개의 주석(易傳 혹은 十翼)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백서주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전국 말이나 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쪽의 문화 중심인 제나라 수도에서는 여러 학파가 종합되며 발전하고 있었는데, 주역에 대한 주석들도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유가뿐만 아니라 도가사상 등이 내포돼 있으며, 우주와 인간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한대의 세계관이 기본 구조로 들어 있는 것이다. 이후로 주역은 모든 현상을 대립적인 것들의 상보적 통일성으로 파악하는 전통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
 
경희대 교수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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