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종교음악

중세 음악의 개요

바래미나 2007. 10. 3. 03:03
 

중세의 음악


그 배경

서유럽의 음악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음악이 대부분 첫 부분을 차지한다. 종교음악은 예배의 전례에 꼭 필요했고 교의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뜻을 지녔으므로 교회의 본질에 관련되는 문제였다. 음악은 매일 예배의 일부였고 철학자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교육체계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곧 모든 계층의 성직자들에게 있어 기초적인 지식이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전례의 기본적 구조는 유태교 예배 진행 방식, 그것도 주로 시나고그(유태교회당)의 관습에 기원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기본적으로 그 가르침과 목적의 새로운 부분에 맞게 옛 유태교 전례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고그의 집회에서 시편을 노래하고 성전을 읽는 것이었다. 시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예배의 중요 부분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전의 관습과 관계없이 추가된 것이 성찬식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의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며 매일의 전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배인 미사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의 주교가 교황의 지위에 오르자 예배들은 로마식 전례를 따르는 전체 교회에서 정규적인 것이 되었다.


하루의 예배를 구성하면

조과           (날 새기 전 무렵)

찬과           (해돋이, 오전 3시경)

제1시과 (오전 6시경)

제3시과 (오전 9시경)

미사           (오전 10시경, 때로 제6시과, 제9시과 뒤)

제6시과 (정오경)

제9시과 (오후3시경)

만과           (오후6시경)

종과           (해넘이, 만과의 바로 뒤)

이러한 하루의 예배를 충실히 지킨 것은 수도원뿐이고 일반 신자를 위한 교구 교회는 보통 미사와 만과만, 때에 따라 미사만 거행했다. 미사는 전례의 중심으로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어느 예배에 있어서도 시편창이 기본이며 중심이었다. 의식의 뜻뿐만 아니라 쓰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미사가 가장 공들여지고 화려하다. 중세 교육제도에 있어 음악은 산수, 기하, 천문학과 함께 '제4학과'로 알려져 있는 학과의 하나이며 수리과학의 일부였다. 음악은 철학적인 넓이를 포함한 뜻을 갖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하나님에게 말씀을 올리기 위한 가장 적합한 '말'로써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음악의 전통성은 신앙의 전통성과 같은 정도로 교회 안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 음악

그 기반은 그레고리오 성가로도 불리는 단선율의 성가다. 미사는 7세기 무렵에 정식의 형식이 정해졌다. '쉬나크시스'(초학자들의 미사)라는 전반과 '유카리스트'(성찬)이라는 후반으로 이루어진다.


# 쉬나크시스

인트로이투스(인제창) **

키리에(연민의 찬가) *

글로리아(영광의 찬가) *

콜렉타(집도문)

에피스톨라(서간)

그라두알레(승계창) **

알렐루야(알렐루야창) ** -부활절 전의 40일간인 4순절, 4계대재일 및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때는 알렐루야 대신 트라크투스(영창)를 부름

에반겔리움(복음서 낭독)

크레도(신앙고백) *

오페르토리움(봉헌창) **

세크레타(밀송)


# 유카리스트

프레파티오(서송)

상크투스(감사의 찬가) *

카논 *

아누스 데이(평화의 찬가) *

코무니오(성체 배령창) **

포스트 코무니오(성체 배령 후의 기도)

이테 미사 에스트(종제창) * -글로리아가 제외되는 계절, 즉 대강림적과 7순절에서부터 부활절까지 사이에는 베네디카무스 도미노(주님을 찬송하리로다)가 불림


* 통상문: 가사가 언제나 같고 바뀜이 없다. 이것들의 부분은 가사를 알 수 없어 별 중요시되지 않았으나 14세기 이후 중요하게 되었다. 통상문의 부분은 회중과 성직자(식을 거행하는)에 의해 불려졌으므로 단순했다. 성가 가사는 성경에서 따온 것이 아니므로 특정 축제일과는 관계 없다.


**고유문: 성경(주로 시편)에서 가사를 따오고 특정 축제일 예배와 결합되어 있다. 주로 전문적인 가수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어떤 축제일의 중요성이 클수록 그 제일의 고유문은 독자성이 커진다.

미사에 있어 성가대는 종속적이었고 중심인 사제의 동작을 반주하는 것이었다. 즉, 예술이 아닌 일부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예배 구조의 발전과 정형화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고 그 전례와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레오1세와 그레고리우스1세, 두 교황이 했다.

단선율 성가가 그레고리오 성가로도 불리우는 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업적으로 교회 전체 속에서 예배와 음악의 통일화라는 방향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단선율 성가의 특질은 즉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얼마만큼 음악적 수완이 발휘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함이다.


단선성가의 특징

플레인송, 플레인찬트, 그레고리안 찬트 등의 명칭으로 불리워지며 근 100년간에 걸쳐 서구문화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된 음악이었다. 그리스도교 음악으로서의 이 단선성가는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으며 가장 오래된 단독 음악 형태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종교음악의 다성음악 스타일의 중심적 근간이었다는 사실에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① 모노포니이다.

② 교회선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③ 보통 아 카펠라로 노래한다.

④ 박자표나 마디줄을 사용하지 않는 형태를 쓴다.

⑤ 자유로우며 유연성 있는 산문의 리듬을 쓴다. 도약진행은 아주 드물고 거의가 순차진행 형태이다.

⑥ 음역이 제한되어 있다.

⑦ 라틴어로 부른다.

⑧ 독특한 네우마 기보법으로 되어 있다.


전례의 개략이 정해진 후 낡은 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가장 빠른 것이 임누스(찬가)이다. 본래 유행가의 선율에 가사를 신앙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긴 성가인데 여기에 시인이 새로운 가사를 붙이고 음악가가 새로운 선율을 만들었다. 그 후 미사에서 쓰이지 않았지만 성무일과의 많은 부분에 채택되었다. 그러면서 유행가로서의 소박, 단순함을 잃고 다른 일반 성가선율과 별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기존 선율에 새로운 말이나 선율을 덧붙이는 수법을 트로푸스라 한다. 이 현상은 다른 성가에도 비슷한 현상을 일으켰는데 중요한 예가 '할렐루야' 이다. 할렐루야에 새로운 가사, 선율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성가는 세�티아(시퀀스:속창)로 불렸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현재도 위령미사곡(레퀴엠)속에 포함된 디에스 이레(분노의 날)인데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에 머물지 않고 그 밖에 수많은 나중 시대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전례에 덧붙여진 것이 전례극이다. 특정 축제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연극으로 상연하는 것인데 한 동안 번창하다 14세기 사회의 세속화에 따라 시들어졌다.


세속의 단성음악

세속음악이 기보된 형태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은 세속적 일반 기술이 종교계의 기보 기술 수준에 따라간 다음이다. 중세 시초무렵 성직자가 쓴 세속적 라틴어 시가 있는데 대부분 고대 로마의 황금시대에 저술한 시를 본보기로 한다. 그 가운데 노래하기를 목적으로 한 대중적인 시도 있는데 '운'이 점차 중요한 요소로 소개되고 있으며 고전 라틴어의 특징인 옛날의 장단에 의한 악센트에서 버젓이 쓰이게 된 유럽 각자의 본국말이 갖는 강약에 의한 악센트로의 이행은 그러한 변화의 표시이다. 세속 노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골리아르두스(유력 서생, 유랑시인)이란 불리는 시인 겸 작곡가들의 작품인데 그들은 12세기에 생겨난 대학이라는 세계의 일익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다. 대학의 학생들은 어떤 종류든 성직을 차지하고 있어야 했으며 당시의 전형적 학생의 생활은 도시에서 도시로 방랑하며 어디건 가는 곳곳의 대학을 다닌다고 하는 말하자면 보히미안적 존재들이다. 이들 작품의 다수는 ‘카르미나 부라나라’는 사본에 수록되어 있다. 연예의 서정가나 술 마실 때의 음란한 노래 따위도 포함되어 있다. 그 가사의 다수는 종교적인 것을 익살스럽게 풍자하고 세속적인 뜻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그 본이 되었던 성가와 별 관련이 없다. 종교상의 체제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시, 음악을 만드는 일에 최초로 관심을 돌린 지역은 프로방스어 또는 랑그 도크(오크어)로 불리던 말을 쓰던 남프랑스 사람들이었다. 특히 11세기 중엽 아키덴 지방의 주요도시인 프와티에 거리에는 가사나 음악이 모두 세속사회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세속가곡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싸움터에서의 용맹의 명성 따위로 귀부인의 마음을 잡을 수 없게 된 남프랑스의 궁정기사들은 대신 시인이며 음악가인 트루바두르로 명성을 올렸다. 그를 작품의 주요 소재는 여러가지 형태의 연예, 특히 자기가 연모를 맹세한 귀부인에 대한 것이다. 북프랑스는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와 접촉을 통해 일찍이 이들의 예술을 모방하여 시초에는 프로방스어 가사를 북프랑스 방언인 랑그 도일로 번역했지만 그 후 독자적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들은 트루베르(트루바두르의 북프랑스 방언역)로 불렸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작품 연주는 그들이 하인으로 고용하던 종글뢰르 또는 메네스트리에라는 직업적인 음악가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종글뢰르의 공연 순서 중 중요한 것이 과거의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을 노래한 서사시인 '샹송 드 제스트'였고 그 중 롤랑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이 프랑스의 새로운 세속음악은 급속히 인근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 그 중 독일에 가장 많은 작품이 남아 있으며 14세기까지 미네젱거들에 의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전통은 중산계급 사이에 퍼져 마이스터징거라는 사람들의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

단선율 성가와 마찬가지로 이 가곡들의 실제 연주방식은 잘 모르며 기보법도 성가의 것과 비슷하다. 이후 폴리포니에 대한 음악가들의 관심으로 세속 단성음악의 번창은 짧았다. 이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위대한 아마추어 음악가는 14세기에 활약한 기욤 드 마쇼이며 그 재능은 폴리포니에도 미쳤다.


세속가곡의 특징

① 단선성가와 마찬가지로 모노포니의 형식을 취한다.

② 단선성가와는 달리 명료한 박자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3박자로 되어 있다.

③ 단선성가보다 더욱 명료하고 보다 정형의 리듬으로 되어 있으며 짧은 리듬 패턴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④ 보통 교회선법을 바탕으로 한다.

⑤ 단선성가가 라틴어로 불린 반면 세속가곡은 거의 모든 경우에 각 나라의 국어로 불려졌다.

⑥ 보다 넓은 범위의 제재를 택해 불렀다.


폴리포니의 시작

7세기 또는 8세기까지는 어떤 선율에 포함된 음의 하나하나에 다른 음을 즉흥적으로 붙여서 폴리포니를 만들어 내는 습관이 멀리 퍼져 있었다. 폴리포니의 도입은 각 축제일의 중요도를 분명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였다. 즉흥적이지만 멋대로 붙일 수 없었던 것은 근본이 되는 성가의 선율은 그대로 두고 음정 차이가 초기에 완전4도나 완전5도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 자체의 미보다 관념적인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무지카 엔키리아데스(음악요강)'에는 가장 오래된 다성 악곡의 실지 예가 나온다. 여기에는 기존 성가 선율 밑에 완전 4, 5도 간격으로 새로운 선율을 덧붙이는 일이 허용되며 이들 두 선율은 1옥타브 위에서 중복하여 노래할 수 있었다. 짝 선율의 성부를 오르가눔 성부, 본래 성가의 성부를 주성부라 하는데 이렇게 음정간격이 일정한 오르가눔(초기의 폴리포니)을 평행(엄격)오르가눔이라 한다. 자유 오르가눔도 설명되어 있는데 두 성부의 최초와 최후의 음을 유니즌으로 부르지만 도중에 몇몇 음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정 선택의 폭이 적어 엄격 오르가눔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 뒤 이러한 규칙이 점점 완화되어 1세기 후에는 평진행이 아닌 주성부와 오르가눔 성부가 가능한 반진행으로 움직여야 하며 두 선율의 대비감의 필요성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두 성부가 교차되고 주성부가 아래 성부로 되는 것도 허용하였다.


오르가눔

평행 오르가눔

자유 오르가눔

멜리스마적 오르가눔


노트르담 악파

대학에서의 음악은 학생교육의 일부로서 지금까지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론 뿐 아니라 실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당 부속의 성가대 학교의 충실을 도모하고 대학과의 합병을 진행시켰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은 노트르담 성당에 한정되지 않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다른 교회에도 파급되었다. 이른바 노트르담 악파로 총괄되는 많은 음악상의 새로운 움직임은 실제로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의 많은 교회에도 관련이 있었다. 이 악파가 서양음악사 상의 의의를 갖는다면 리듬을 기보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 이전 자료에는 기보법의 운율이 실제 어떤 모양으로 사용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이 기보체계는 시의 운율에 준한 장음과 단음 6종류의 짝짓기로 이루어지며 단음의 길이를 1, 그 2 내지 3의 길이를 하나의 단위로 삼고 있는데 이 3이라는 수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완전성을 나타낸다는 신학상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모테트는 상당히 이른 단계에서 세속화되어 갔는데 13세기가 끝나기 전 교회와의 결합이 더욱 약해지고 궁정 등 세속장소에서의 연주가 빈번해졌다. 새로운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세속적 가사나 선율이 모테트 작곡에 이용되었다. 마침내 테노르를 성가에서 따오는 일을 그만둠으로써 교회와의 유대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세속악곡의 형식 (론도, 비를레)까지 사용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를 폭로하는 반체제적 가사도 나타난다.

폴리포니의 근본은 교회내부에서 새로이 일어난 움직임이며 세속사회의 신도에게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다. 13세기 초기는 서양음악사의 하나의 정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음악가들은 성직자나 신학자와 공통된 사상 체계 위에서 양쪽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자기 일을 해나갔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러한 연대감은 상실되고 음악가는 자신의 예술의 기교적 가능성 추구에 열중하게 된다. 음악의 독주에 대한 불만과 교회의 작곡가가 전례 속의 역할 범위를 넘는 일에 대한 심한 비난이 있었다. 음악상의 새로운 착상에 철학적 권위를 뒷받침할 필요가 없어져 7개 자유학과에 포함되는 4학과의 하나로서의 중요한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위였던 기구의 음악, 즉 실제의 음악이 가장 중요시되면서 인간계, 우주의 음악도 철학자의 손에 남게 되었다. 새로운 발전은 실기면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음악가 자신들의 자유재량에 맡겨졌다. 이러한 과정이 나타났던 시기를 아르스 안티콰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14세기 음악

13세기 말은 혼미 시대의 시작이다. 아비뇽 유수, 교회의 분열, 교황권 쇠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 페스트, 많은 농민 반란과 같은 사회혼란 속에서 교회에서 일하는 음악가들은 성직자로서의 본분과 전례의 직무에 등을 돌리고 세속 사회로 눈을 돌린다. 14세기 실제 음악상의 변화는 필립 드 비트리의 아르스 노바라는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스 노바라는 명칭은 13세기에는 없었던 새로운 예술의 개화이며 14세기 전 시대의 호칭으로 쓰인다. 이 논문은 기구의 음악에 중점을 둔 실용적 논문이며 중요한 점은 현대 표현 방식으로 말할 때 2박자와 3박자를 동등하게 다루기로 정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아이소리듬(같은 리듬)이라는 새로운 구성원리가 도입되어 있는데 이 수법은 음열, 강약, 리듬, 음색이라고 하는 요소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쓰는 현대의 음열에 의한 작곡법과 매우 비슷하다.

아이소리듬 모테트가 당시 음악에 있어 예술적 표현 수단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한편 미사 통상문을 이용한 다성악곡이라는 순전한 종교적 분야가 새로이 탐구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트로푸스가 붙은 몇몇 통상문이 작곡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주요 관심은 고유문이었다. 그런데 14세기 전반에는 트로푸스가 붙지 않은 보통 통상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글로리아나 크레도도 다성악곡으로 작곡되었다.

기욤 드 마쇼는 프랑스에 있어서 아르스 노바의 주도적인 작곡가로서 그가 작곡한 모테트는 23곡, 그 중 종교적인 것은 2곡인데 이것은 그의 세속 작품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레, 롱도, 비를레, 발라드와 같은 당시 유행의 세속음악의 모든 형식을 써서 작곡했는데 그 중 레, 비를레의 대부분은 모노포니이며 오랜 트루베르의 전통이 깔려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노트르담 미사곡인데 한 작곡가가 미사 통상문 전체를 통괄해 작곡한 예는 이것 외에 없고 서양 음악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작품 : 포벨 이야기-Roman de Fauvel, 투르네의 미사-Messe de Tournai


그런데 14세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처음에는 발전이었던 새로운 움직임이 보다 복잡한 리듬을 악보 위에서 추구하는 일에 열중해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너무 외면적이고 말초적인 부분만이 음악에 계승되어 거의 전부가 세속작품이 되고, 가사도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성가대원의 명부를 가사로 한 아이소리듬 모테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표들, 별의별 색깔을 가진 음표들, 별로 뜻이 없는 기교를 위한 기교는 14세기 말의 프랑스 음악의 한 특징이며 결과는 15세기 초두에서의 완전한 쇠퇴였다. 프랑스는 서양 음악의 선도자로서의 자리를 놓치고 16세기 시초까지 그 힘을 되찾지 못한채 부르고뉴 공국과 그 지배하의 나라들에 주도권을 내주었다.


중요 형식

① 아이소리듬 모테트 : 13세기의 모테트에서 발전해온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선율 형식이다. 이 형식에 있어서는 테너 성부에 단선성가가 탈레아라고 하는 보다 길고 변화가 풍부한 음형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② 발라드 : 여러개의 연(stanza)으로 구성되며 각 연은 AAB로 된 부분 공식에 따른 동일한 음악을 붙인 형으로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가장 높은 성부에 선율적 및 리듬적 중요성이 나타난 3성부로 된 작품이었다.

③ 론도 : 원래 론도는 트루베르라고 하는 모노포니 가곡 형식에서 나왔고 ABaAabAB의 공식에 따른 것이었다. 이 경우 몇번이라도 되풀이되는 반복부인 A는 동일한 가사와 음악을 갖는 부분이었다. 론도는 2성부, 3성부, 4성부로 된 형식으로 작곡될 때도 있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독창 성부와 보다 느린 움직임의 리듬에 다른 악기를 위한 두 개의 낮은 성부를 갖는 악곡이었다.

④ 비를레 : 14세기에 있어서는 샹송 발라데라고도 했다. 이 형식은 론도와 같이 트루베르에 따른 모노포니 형식에서 나왔고 시의 각 연에 근거를 둔 AbbaA라는 부분 구성에 따르고 있었다. 대부분 모노포니였지만 폴리포니로 작곡된 작품도 많이 나타났다.


부르고뉴 악파


음악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싹은 1420년경에 부르고뉴(Burgundy, 오늘의 남부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부 프랑스 지역)와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음악가들은 이태리에서 나타나고 있던 새로운 인간 정신을 수용하고 당시에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싹튼 고상한 음악 표현법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활기차고 조화로운 음악", "즐겁고 명쾌한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영국 음악가들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한 3화음에 의한 화성적 표현방법은 가락의 진행과 수직적 화음 형태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5세기 최대의 작곡가인 기욤 뒤파이에 대해서 다른 이들과 다르게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다. 뒤파이의 명성은 전 유럽에 걸쳐서 깊은 존경을 모았다. 부르고뉴 악파의 성립에는 영국음악의 영향이 중요했는데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부르고뉴 악파의 양식은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발전되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뒤파이 시대의 관례로서 이후 약 180년 후 르네상스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습관으로서 어느 성부를 확실하게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고 명확하게 기록하는 일은 하지 않고 그 때마다 주어진 조건과 효과를 고려하여 지휘자, 지도자가 그 경우에 맞는 악기를 선택한다. 뒤파이의 기지는 풍부하게 매력 넘치는 프랑스의 샹송과 이탈리아 가곡, 장대하고 위엄이 가득한 미사곡, 변화에 뛰어나고 화려한 음의 향연으로서의 모테트와 축전곡 등 그의 음악은 생생하고 힘찬 박력으로 오늘의 청중마저도 매료시킨다.

같은 세대의 대표자로 질 뱅슈와가 있는데 종교곡과 세속곡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특히 프랑스의 가곡, 샹송에 훌륭한 작품이 많다.


뒤파이(Guillaume Dufay,1400-74),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85-1453), 파워(Leonel Power, ?-1445), 벵슈아(Gilles Binchois, 1400-60) 등의 부르고뉴 및 영국 작곡가들은 자연스러운 흐름결과 더 투명한 음향 조직, 3화음을 바탕으로 한 신선한 화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3성부의 다성 음악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고, 병행 6도화음(디스칸트 discant-영국, 포부르동 fauxbourdon-부르고뉴)과 정선율(대위법)도 사용하였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였던 15세기 후반(1475-1530)에 이르면서 음악의 주도적인 역할은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1440-1521)를 비롯한 유럽의 플레미쉬(Flemish)학파가 맡고 있었다. 그들은 로랜즈(Lolands, 오늘날의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 지역) 출신이었으며 그들의 음악 양식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16세기의 음악 전반에 걸쳐 지배적이었다.

조스캥과 오케겜(Johannes Ockeghem, 1430-95), 오브레히트(Jacob Obrecht, 1450-1505) 등의 작곡가들은 4성부 작법을 주로 사용하였고 성부들간에 구조적인 동등성과 균형을 이루는 다성음악을 작곡하였다.

모방을 중시하면서 새로운 카논(cannon)형태를 창조했고, 수직적 화음을 대위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악곡 속에 가사의 내용을 뚜렷하게 투영하였다. 특히, "모방 대위법"은 이 시대의 음악 양식에서 가장 중요한 경향이었다. 그것은 첫 성부가 진행되면 그것을 둘 이상의 다른 성부가 모방하면서 대조적인 가락을 이루어가는 성부 조직을 뜻한다. 이 기법은 그 후 17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뒤파이, 기욤

Guillaume Dufay (1400경 에노 지방-1474 캉브레) ;  프랑스의 작곡가.



# 요약: 15세기 최대의 작곡가. 부르고뉴 악파의 중심 인물.

16세기 이전의 유명 작곡가라 하더라도 평생의 경력을 더듬어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대개의 경우 자료의 대부분이 없어졌거나 분실되었기 때문)

유일하게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흔히 '15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 있고, 유럽 구석구석까지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는 제2의 직업일 뿐이었고, 자기를 교회에서 봉사하는 성직자라고 생각하였다.

뒤파이는 미사곡, 모테트, 찬송가, 샹송, 이탈리아어 가곡 등을 남겨 그야말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가교 역할을 했고, 사실 르네상스기의 음악어법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작품에는 15세기의 작곡가 중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이 발휘되어 있다.

긴 생애 동안 초기의 작품에서 후기의 작품으로, 명백한 발전이 엿보인다


출생지는 불분명하며 시메나 캉브레로 짐작된다. 소년 성가대원으로서 캉브레 주교구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당시의 캉브레는 종교음악의 중심지로서 그 명성은 바티칸에도 알려져 수많은 음악가들이 교황청에 초빙되고 있었다. 뒤파이는 브레이옹 V. Brion, 말랭 N. Malin, 로크빌 R. de Locqueville 등에게 배운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마쇼(Guillaume de Machaut)로 대표되는 아르스 노바(Ars Nova)와 뒤파이 자신이 최초의 대표자가 되는 프랑스 플랑드르 악파의 중간에 위치하는 작곡가들이다.


뒤파이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즉 ①캉브레에서의 수업시대(1419까지), ②이탈리아 시대(1439까지), 그리고 ③마지막으로 캉브레로 돌아온 시대(1440 이후, 단 1450-58에는 사보아에 체재)이다.


17세 때 콘스탄츠 종교회의에 출석하는 피에르 다이이 주교를 수행하게 되어 거기에서 만난 카를로 말라테스타 Carlo Malatesta의 초청으로 1419년 리미니 궁정으로 가서 142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영광스러운 사도 Apostolo glorioso> 같은 초기 모테트는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427년에 사제로 임명되어 5년간 로마에 머물렀다(1428-33). 그는 거기에서 같은 캉브레 출신인 니콜라 그르농을 만난다. 그 후 반란으로 교황이 망명을 할 때, 뒤파이도 함께 피렌체로 옮긴다.

1433년부터 1435년까지는 샹베리에 있는 사부아의 궁정에 머물렀는데, 이 궁정은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교역의 중심지였다. 피렌체로 돌아온 뒤파이는 1436년의 피렌체 대성당 낙성 기념을 위하여 모테트 <싱싱한 장미꽃이여 Nuper rosarum flores>를 작곡하였다. 같은 해에 캉브레 주교구 성당 참사회원으로 임명되는데 그 전에 그는 사부아의 궁정에서 3년간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높은 명성을 얻게 되고 많은 군주들(샤를르 7세, 루이 11세 등)의 인정과 호의를 받았다.

캉브레로 돌아와서는 소년 성가대의 일에 힘을 쏟았다. 그의 일생의 만년이 되는 이 시기는 음악적으로 가장 결실이 많은 시기였다. 뒤파이의 음악은 서로 보충하는 몇 가지 영향이 종합된 결과이다. 거기에서는, 그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마쇼의 프랑스적 기법이나 3도 음정의 우위를 도입함으로써 화성의 혁신을 수행한 던스터블의 영국풍의 독특한 맛이나 수많은 여행을 통하여 그가 얻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뒤파이의 작품은 매우 폭이 넓어 세속음악과 종교 음악의 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속 음악은 자연스러움, 선율의 솔직함, 풍부한 감수성 등으로 높이 평가되며, 종교 음악은 그 갈고 다듬어진 서법과 위대한 종교성의 확실한 감각으로 인정받았다.

뒤파이의 샹송(비를레 virelai, 발라드 ballade, 그리고 특히 론도 rondeau -모두 중세의 노래 형식임-)은 83곡에 이르며 그 가운데 8곡은 이탈리아어 가사에 의한 것이다.


비를레는 무용의 노래로서 주선율과 테너, 거기에 콘트라 테너의 3성부로 이루어진다. 발라드와 론도도 대부분이 3성부의 곡이며, 최고 성부가 노래로 불려지고 다른 2성부는 보통 악기가 맡는다. 뒤파이의 발라드(<일어나세요 Reveillesvous et faites chiere lie>, <그것은 당연한 일 C'est bien raison>, <내 마음과 생각을 J'ay mis mon coeur et ma pensee>)의 수는 론도만큼 많지 않은데 이것은 당시 발라드가 비를레와 마찬가지로 유행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론도는 뱅슈아의 경우와 같이 뒤파이에 있어서도 15세기 중기에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내 마음의 귀여운 사람 La plus mignonne de mon coeur>, <그녀의 요새를 함락시키자 Donnez l'assaut a la fortresse>, < 안녕, 내 사랑 Adieu m'amours> 등). 현존하는 76곡의 모테트, 단편 미사곡 및 통작 미사곡에서 뒤파이는 간결한 작곡법을 사용하여 음악적 표현을 우선시킴으로써 아르스 노바의 기교 과잉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446년 이전에 씌어진 모테트에는 테너 성부를 아이소리듬 기법으로 처리하는 원칙이 아직 남아 있다.

차츰 주요 성부는 이미 테너가 아니라 선율을 이끄는 최고 성부로 바뀌고 모방 기법에 의한 작곡 경향이 분명해졌다. 때에 따라서는 뒤파이가 연주 악기를 특히 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나팔의 박자에 의한 글로리아 Gloria ad modum tubae>에서의 트럼펫). 아르스 노바의 모테트에서 상용되고 있는 서로 다른 가사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수법도 때때로 볼 수 있는데,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의 즉위를 위하여 작곡된 모테트 <충실한 교회의 수도 로마 Ecclesiae militantis>(1431)는 5성부로 되어있고, 각기 다른 가사를 가졌다. 또 유명한 <콘스탄티노플 성모 교회의 애가 Lamentation de Constantinople>(1454)에서는 예레미아 애가의 라틴어에 의한 단장이 프랑스어 가사와 중복되어 불려진다.


 뒤파이가 남긴 통작 미사곡은 세속 가곡이나 전례용 성가 또는 새로 만들어진 선율 등의 갖가지 테너 성부를 바탕으로 작곡되어 있다. 세속적인 테너는 <스 라 파스 에 팔(얼굴이 창백해져 있다면) Se la face aye pale>이나 <롬므 아르메 L'Homme arme>와 같은 유행가의 주제에 의한 것이 많다. 롬므 아르메는 오케겜이나 조스캥, 나아가서는 17세기의 카리시미에 이르는 수많은 작곡가에 의하여 몇 번씩 다루어지게 된다.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안티포나를 정선율로 한 그의 만년의 미사곡 <에체 안칠라 도미니 Ecce Ancilla Domini>와 <아베 레지나 첼로룸 Ave Regina caelorum>은 각각 1463년과 1464년에 작곡되었다. 뒤파이와 함께 프랑스 음악의 위대한 시대의 하나가 시작된다. 즉 100년 전쟁을 그 원류로 하며 16세기 말까지 그 영광을 간직하며 전유럽의 음악에 군림했던 프랑스 플랑드르 악파가 그것이다.

Organum / Discant / Conductus / Motet



1) 오르가눔(Organum)


① 11세기의 오르가눔(병행 오르가눔)

이것은, 두 개 성부(평성가 선율을 노래하는 Vox Principalis와 그 대응 선율인 Vox organalis)가 일정한 음정 차이(주로 5도나 4도)로 竝進行하거나 혹은 애초에 시작은 같은 음으로 하되 두성부가 4도 음정을 이루게 될 때까지 움직이다가 終止에 이르르면서 다시 동일한 음으로 합쳐 지는 모습의 음악을 뜻합니다.

두 성부 사이에 사용된 최초의 진행 형태는 병진행이었으나 차츰 斜進行 이나 反進行의 움직임도 사용되어, "성부간의 독립"을 향한 움직 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두 성부들은 종종 옥타브 음정으로 중복되어 노래되었는데, 그 결과 Vox organalis가 상성부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습니다.


② 12세기의 오르가눔(자유 오르가눔)

본래의 오르가눔은, Vox principalis에 대해 그 대응 선율인 Vox orga- nalis가 4도나 5도 아래에서 장식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이 성부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어 Vox principalis가 언제나 아래 성부에 놓이고 그 음가가 상당히 길게 늘여집니다. 이에 따라 Voxor- ganalis는 상성부에 위치하여 아래 성부(Vox principalis)의 긴 음가 동안 다양한 길이로 악구를 노래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르가눔은 이러한 모습의 2성부 곡이었는데, 이와 같은 오르가눔을 '오르가눔 두플룸(organum duplum: 이중 오르가눔)' 혹은 '오르가눔 푸룸(or- ganum purum: 순수 오르가눔)'이라 고 부릅니다.

이때 낮은 성부는 테노르(tenor)라는 명칭으로, 윗성부는 2번째 성부라는 의미에서 두플룸(duplum)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2) 디스칸트(Discant)


① 디스칸트의 형태

오르가눔 하나하나의 음이 매우 길게 늘여져 있는 테노르 위에서 두플룸 이 한 음절을 길게 노래하는 멜리스마의 유형과는 달리, 이것은 두 성부 가 일정한 길이로 정해져 있는 박자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② 클라우줄라(clausula)의 발생

이것은 오르가눔 중간에 삽입된 디스칸트 부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클라우줄라는 차츰 오르가눔 전체를 지배하게 되어 결국은 오르가눔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또한 이것은 오르가눔으로부터 점차 독립적인 곡으로 발전을 하여 마침내는 새로운 형식인 모테트(motet)로 정립되게 됩니다.




3) 콘둑투스(conductus)


양식 콘둑투스라는 곡은 본래 의전 진행시 집전자가 이동하는 동안에 사용되었던 곡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레고리안 성가로부터 차용되거나 기타의 선율을 채택하여 이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 새로이 작곡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콘둑투스는 노트르담 악파에 의하여 다성부 음악으로 확장되었는데, 이 콘둑투스의 모든 성부들은 거의 똑같은 리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오르가눔과는 달리 '수직 화음'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13세기의 '수직 화음 방식'은 콘둑투스 양식이라 일컬어졌으며, 이 기법은 콘둑투스 이외의 여타 곡에도 사용되었습니다.




4) 모테트(motet)


클라우줄라가 오르가눔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곡으로 자라난 것이 모테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클라우줄라 부분의 두 플룸에 붙여진 가사를 motet라고 불렀으나(프랑스어로 '말, 낱말'이라는 뜻의 mot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클라우줄라가 독립된 새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자 그 새로운 양식 자체를 모테트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테트'라는 것은 어떤 양식의 곡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고, 모테트라는 형태의 곡에서 제2 성부(즉, 두플룸이라고 하던 성부)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테트는 곧 여러 형태의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특히 가사가 라틴 의전과 전혀 상관이 없는 세속 내용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테노르에 채택되었던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율과 그 라틴어 가사는 점점 무의미해져 갔던 것입니다. 마침내 테노르 파트의 선율(그레고리안 성가)은 성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가사 전달과는 무관한 기악으로써 대체 연주되기에 이르릅니다. 또한 모테트는 두플룸(모테트) 성부와 트리플룸 성부에 차츰 서로 다른 양식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모테트를 Franconian motet라고 함), 이러한 성향은 비단 두플룸과 트리플룸 사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점차 전체 성부에까지 확산되어 각 성부가 서로 독립성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만듭니다.


### 뒤 파이의 음악에서는 같은 시대 얀 반 다이크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특질 몇가지가 보입니다.


@ 선이 유난히 뚜렷하고 세부처리가 정교하며,색이 풍부하고 양식이 완벽하게"자연스러운" 점이 그것이에요.(반 아이크의 경우는 거의 컬러사진 수준임) 당대 가장 성공을 누렸던 음악가인 뒤 파이는 몇 세대에 걸쳐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여러 권문세가의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칭송하기 바빴다는군요.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미사"는 예술적으로 위대하다는 점 말고도 주목을 끄는 점이 하나 더 있읍니다. 팰로우스의 가설이 맞다면 작곡연대가 1440-50년대가 되는데, 이 시기에 뒤 파이의 작품이 극소수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읍니다. 다섯 개의 미사 통상문 악장은 내내 3성이며 이따금 2성이 오래 계속 되는데 테르노의 정선율(cantus firmus : 대선율을 갖다붙일 뼈대가 되는 테르노 성부의 가락)도 음악적 모토도 없죠. 오히려 정반대로 통상문이나 특정문이나 다 전적으로 성가에 바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 가락이 최상성을 이루면서 15세기 리듬 양식으로 약간 장식된 것이 아닌가 싶읍니다...^^

다섯개의 특정문 악장의 기초가 된 성가는 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원전자료를 참조하면 악장마다 원곡이 어떤 수법으로 변형을 겪었는지 알 수 있구요. 다른 성가나 씨퀀스처리처럼 상성이 원곡의 음높이를 양식화된 리듬으로 이따금 경과음을 써 제시하며, 새로 만들어 붙인 저성은 생동감 넘치는 폴리포니로써 성가에서 따온 상성 가락을 받쳐주는 식입니다.

미사 통상문과 특정문을 담은 전곡은 최상성 가락으로 쓰인 그레고리안 평성가에 바탕한,다소 장식이 많고 15세기 리듬양식을 쓴 작품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할 단서는 통상문 악장에 몇 군데 나타나지만, 평성곡 원곡은 뒤 파이가 손수 쓴 단편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반면,특정문에서는 평성가의 원곡이 변형되는 수법이 뒤 파이의 손길임이 금새 드러나죠.

낮은 성부가 뒤 파이 초기 성가나 씨퀀스와 같은 수법으로 활기를 띠고있어, 중세 평성가가 뒤 파이 양식의 옷을 입고 초기 르네상스 폴리포니로 매혹적인 자태로 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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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사란 미사의 "고정된" 통상문 즉- 키리에,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와 베네딕투스),아누스 데이-과 특정 축일을 위한 특정문이 있는 미사)

GUILLAUME DU FAY (c.1397? - 1474)


"Missa Sancti Anthonii de Padua." (파두아의 聖 안토니

오 미사)


POMERIUM 

Director : Alexander Blachly

ARCHIV PRODUKTION (447-772-2)


(1) 먼저 이 곡의 가사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죠.

"Missa Sancti Anthonii de Padua." (파두아의 聖 안토니오 미사)

1.INTROITUS (입당송)

회중 앞에서 그가 입을 열자 주님께서 그를 지혜와 깨달음

의 영으로 채우시고 영광의 옷으로 입히셨다.

(집회서 15장 5절)

(사제) 야훼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노래하는 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사오리까. (시편 91편 2절)

성부와 성자께 영광! 또한 성령께, 태초부터 현재도, 또 영원무궁토록. 아멘.

회중 앞에서...(후렴)


2.KYRIE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3.GLORIA (하느님께 영광!)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축복합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주님의 영광 크시기에 감사하나이다.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외아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어린 양, 성부의 아드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우리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님.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고,

홀로 높으시도다. 아멘.


4.GRADUALE (층계송)

착한 사람의 입은 지혜를 속삭이고

그 혀는 정의만을 편다.

(사제)그 마음에는 하느님의 법이 새겨져 있으니

그의 발걸음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시편 36편 30~31절)

착한 사람의 입은...(후렴)


5.ALLELUYA (찬양송)

알렐루야! 

우리 옛적 여행의

좋은 벗 聖 안토니오여.

당신 이제 본향에 가 있사오니

우리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비소서.

저 위 그곳에서 영광의 벗으로

당신을 기릴수 있도록 비소서.

알렐루야 (후렴)


6.CREDO (사도신경)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독생자를 믿습니다.

세상보다 먼저 성부께 나셨으며

신 중의 신이요 빛 중의 빛이요.

하느님 중의 참 하느님이십니다.

지음받아 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그로 하여 만물이 지음 받았으나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시어 성령으로 몸을 입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사람으로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영광으로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리니

그 나라 가없으리라.

성령을 믿으며,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이시며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계시며

함께 경배와 영광 받으시고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뿐인 거룩한 공회, 사도들의 교회를 믿습니다.

하나의 세례와 죄사함을 믿으며

죽은 이의 부활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아멘.


7.OFFERTORIUM (봉헌송)

나의 진실과 은총이 이 사람에게 있으니

나의 이름으로 그의 힘이 드높여지리라.


8.SANTUS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온누리에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9.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아린양이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10.COMMUNIO (영성체송)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잘 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네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게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오복음 25장 20절~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