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당구의 역사
글쓴이: chevillotte
1909년에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 왕실에 처음으로 당구대 설치. "순종 국정록"은 순종 임금의 장례식을 기록한 것으로서 순종으 생시 모습과 유품을 수록한 사진첨으로 되어있는데 화려하고 넓은 궁중 내실에 당구대 2대와 계산대, 큐대 등이 보이는 사진이 있으며 "운동상 필요한 옥돌"이라는 제목하에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 2대가 놓여 있어서 때때로 대신들과 큐대를 잡았다. 국내외 옥돌 선수가 경성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접견했다. 맞수가 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 경찰 서장인 야노였는데 게임에선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어떻게 하면 흥미있게 이끄 수 있을까 하는 고상한 생각으로 게임했으며 실력은 60점(현재 150점)에서 70점 정도였다...." 하고 기술. 원래의 4구게임은 빨간볼 2개와 흰� 2개로 경기하는데 자기 수구인 흽볼로 다른 3개의 적구중 2개 이상을 맞히면 득점. 흽볼과 빨간볼 하나를 맞히면 2점, 빨간볼2개 맞히면 3점, 3개의 적구를 다 맞히면 5점으로 계산 당구가 왕실에서 실내 스포츠로 애용되고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 직원들의 휴식처로서 남산 입구에 "경성구락부"를 세워 1층에 일반 직원용으로서 3대, 2층에 고관용으로 2대를 설치, 서대문 전매청 앞에 1대, 용산 우체국 뒤인 관사촌에 1대, 총독부 옆 왜성대에 3대를 설치하여 총독부 직원들만 애용. 영업용 당구장의 시초는 왜인촌이었던 진고개(충무로 2가)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파주정"(1대) 아하라가 경영하던 "지하지가"(2대), 충무로 1가 제일은행 본점뒤 "아사이"(2대) 당시 한 게임당 요금은 1인당 5전씩, 해방직전에는 1인당 8전씩하다가 시간제로 1원 20전씩 받았다. 1921년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임정호가 지금의 조흥은행 본점 건너편에 "무궁헌"으로 2대 설치.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이용. 윤치호선생이나 유진오 선생등도 학생들을 보기위해 자주 왕래. 일제하에 당구장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특수 계급층이나 종로에서 포목점, 양복점, 요식업 등을 하는 부호들과 사감모를 쓴 학생들. 게임후에는 의례 명월관이나 국일관등으로 갔다. 명월관 중니인 이기우라는 사람도 300점의 고수 1947년에 서울에만 10여개소 증가 6.25사변중 피난민들은 경남 지방으로 집중. 당구업계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1954년경 부산 광복동에 16대의 당구대에 각각 게임 계산을 해주는 여자 종업원을 고용한 당구장이 생겨났다. 1955년 11월에 뜻있는 당구인들이 모여 6.25사변으로 인한 당구계의 무질서를 잡기위해 "대한당구협회" 발족. 초대회장에 이재학(자유당 국회부의장)씨가 선출, 부회장에 방용하, 홍사철씨, 이사장에 이한종씨가 선출. 1957년에 서울에만 750개의 장구장이 성업. 4구 빨간볼치기가 유행했는데, 외국에는 없는 게임방식으로 우리나라 고점자들이 정식 4구게임에 싫증을 느껴 고안했다. 자유당 말기부터 내기당구의 성행으로 당구계의 혼한은 더 심해졌고, 1961년 5.16과 더불어 각종 유흥업소의 단속이 시작되자 내기 당구를 하는 업소들도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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