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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1805 박지원[朴趾源]의 열하 일기

바래미나 2007. 7. 20. 03:14
타고난 내 기질 탓에 일생 험난… 끝내 고칠 수는 없었다"
"…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니"
실사구시 새시대 지향 담은
청나라 문물 1200㎞ 기행문
"입으로만 하는 학문은 풍월"

'열하일기'는 조선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재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친척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썼다. 박지원이 44세 때 되던 해로 박지원 일행은 연경에 들어갔다가 황제가 피서 차 쉬고 있던 열하를 거쳐 돌아왔다.

박지원은 약 2개월 간(1780년 6월 24일~8월 20일)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애초의 목적지인 연경에 갔다가 당시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휴가를 취하고 있어서 열하까지 갔기 때문에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열하일기'에는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조선 후기 한 지식인의 실학 정신이 녹아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글 필사본. 일본 도쿄대에서 새로 발견된 이 필사본 '연암열하일긔'는 254쪽 9만2000여자 분량이다.


멀고도 힘들었던 곳, 열하

박지원이 열하까지 간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약 2300여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700리로 육로 3000리의 긴 여행이었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상한 날씨는 여행을 더욱 힘들게 하였지만 박지원은 뜻밖의 행운에 이 모험을 즐기며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여행스케치를 했다.

열하는 강희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들의 별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름 최고 기온이 24도를 넘지 않는 시원한 곳이었다. 그러나 열하로 가는 길은 험준한 지세에다 황제의 불같은 재촉이 이어지면서 사신단 일행은 하룻 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度河記)'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황제 일행이 이곳에 간 것은 피서라는 목적 이외에 북방 민족인 몽고족의 성장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열하는 화려하고 웅장함이 연경보다도 더했고 박지원은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 몽고, 위구르, 티베트, 서양 등 이국문명을 접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문화 충격을 받게 된다. '열하일기'가 단순한 중국 기행문이 아닌 세계문명과의 접촉임을 보여주는 점도 '열하'라는 곳의 지리적 특수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여행 기간은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약 5개월 간이었으며, 한양-박천-의주-요양-성경(심양)-거류하-소흑산-북진-고령역-산해관-풍윤-옥전-계주-연경(북경)-밀운성-고북구-열하 등이 주요 행선지였다.

곳곳에 녹아있는 이용후생의 정신

박지원은 가는 곳곳마다 예리한 눈으로 청의 문물을 관찰했고, 조선에 새로운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수레 만든 법식(車制)'이란 글을 보자.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입으로만 욀 뿐이며,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하는 데는 연구가 없으니 이야말로 건성으로 읽는 풍월뿐이요, 학문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어허! 한심하고도 기막힌 일이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 종사하지 않는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수레'를 통해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변명에 대하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직접 수레를 만들어 활용하면 수레를 이용할 길은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수레를 단순한 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수레의 활용에서 비롯되는 도로망 건설 등 국가 산업 전반의 발전을 꾀했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이용후생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열하일기에는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한 '허생전'이나 '호질'과 같은 글을 실어 누구나가 쉽게 읽으면서 현실의 폐단을 생각하게 했다.

조선후기 베스트셀러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현재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열하일기' 필사본이 9종이나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열하일기'가 당시에 어느 정도 유행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열하일기'가 이렇게 유행하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글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인은 '열하일기'가 종종 턱이 빠질 정도로 웃도록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기도 하였고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체 문체를 사용하는 등 당시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판에 박힌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면서,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암의 글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의 글은 문체와 그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점잖은 글을 쓰는 양반들에게 '열하일기'는 경박하거나 비속한 책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박지원의 글이 지닌 파격성과 그 비판적 성격 때문에 정조는 직접 하교를 내려 박지원의 문장이 비속함을 지적하였고, '열하일기'가 전파되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약 80년 후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열하일기'는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활자본으로 출간되면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북학사상의 선구자 박지원의 이름은 후대인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유머와 역설이 풍부하면서도 시대를 꿰뚫는 치밀한 실학 정신이 녹아 있는 책, '열하일기'를 통해 시대를 앞서간 조선시대 한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는 작업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 박지원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 큰 키에 몸집 장대 陽氣<양기> 가득한 전형적 태양인



연암 박지원 하면 왠지 호리호리한 몸매에 매서운 눈매를 지닌 그런 지식인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이라는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버지 연암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박지원은 큰 키에 살이 쪄 몸집이 매우 컸다. 얼굴은 긴 편이었는데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불거져 나오고 눈은 쌍꺼풀이 져 있었다. 목소리는 매우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밖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렇게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 큰 몸집과 어우러져 좌중을 늘 압도하고는 했다.

중년에 초상화가 하나 있었는데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모습의 10분의 7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없애 버리도록 지시하였으며 다시 초상화를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외모에 만족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초상화가를 믿지 못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박지원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강건하여 늘 쉽게 타협하지 못하였다. 연암을 종유하였던 김기순이란 이는 "연암은 순수한 양기(陽氣)를 타고나서, 반 푼의 음기(陰氣)도 섞여 있지 않다. 그래서 지나치게 고상하여 매양 부드럽고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하여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하니 태양인이다"라고 하였다. 박지원도 자신의 단점을 잘 알아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니, 바로잡고자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다. 일생 동안 이러저러한 험한 꼴을 겪은 것도 모두 그러한 기질 탓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비판과 풍자로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심적 고통을 겪으며 고뇌했던 지식인, 그가 바로 박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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