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잊을수 없는 추억이 쌓인곳-

지명 이야기-2-

바래미나 2007. 7. 20. 01:13
섬지골

가삼이에서 북쪽 매봉산 쪽으로 뻗은 골짜기 마을로 한때는 4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섬지라고 부르는 작은 연못이 있었으므로 '섬지골'이라 불렀는데 그 우측에는 섬지골의 우백호에 해당되는 매봉산 줄기인 '우백골'이 있고, 좌측에는 매봉산이 뻗어내려 작은 낙맥을 형성한 곳으로 묘가 많이 있으므로 '미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험악한 산악 지대로 공비가 자주 나타나 양민들을 학살했던 오지 마을이다.


범찬바위

구름재에서 가삼이로 가는 도로 우측에 있는 바위이다. 예전에는 범찬바위 밑에 있는 계곡을 따라 길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여 이곳 너럭바위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에 큰 범(호랑이)이 와서 꼬리로 얼굴을 툭툭 건드리자 이 사람은 깜짝 놀라 일어서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호랑이를 걷어 찼더니 호랑이는 멀리 도망쳤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범찬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삼

섬지골 위쪽으로 가삼주유소가 있는 마을이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이곳은 물이 귀한 동네였는데 어느 날 마을에서 키우는 개가 우연히 샘을 찾아냈으므로 '개샘'이라고 불렀으나 후에'가삼'으로 변했다고 한다.

거무실

가삼주유소 건녀편으로 마을 뒤쪽에 거미혈의 명당이 있으므로 '거미실→거무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사는 김성동 씨는 거무실과 밤산골 사이에 있는 거미형국의 명당에 쇠말뚝이 박힌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매봉산맥이 흘러내리는 승량이(삼량) 뒷산에는 투구를 쓰고 앉은 장군 형상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 장군바위 뒤에도 일본인들이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쇠혈을 질렀는데 지금도 쇠가 남아있다고 한다.


사시내(사천동)

가삼이의 하천 건너 옥동천 옆에 있는 마을이다. 내덕리(內德里)와 덕구리(德邱里)사이로 흐르는 냇가에 형성된 동네이므로 '사잇내'인 '삿'이 연음현상으로 '사시내'로 표기되었다. '삿'은 '사이'라는 뜻이다. 덕구리는 원래 경북(慶北)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이었는데 사잇내를 두고 영월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천평리와 함께 강원도로 이속(移屬)되었다.

그 당시 강원도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넘어갔는데 사람들은 일개 군(郡)을 리(里)와 바꾸었다고 하였다. 마을 뒤에는 문처럼 생긴 '문바우'가 있고 사시내 밑에는 '대리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금댕이골

가삼과 원천 사이로 뻗은 계곡으로 그 길이가 10여리가 넘으며 매봉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 시대가 금광을 채굴하기 이해 금광 구덩이를 팠던 곳이므로 '금구덩이골'에서 '금댕이골'로 변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골짜기 좌측 어귀에는 큰금댕이골과 작은금댕이골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큰 너래바위가 있다. 계곡의 끝자락인 매봉산 밑에는 옛날 산신제(山神祭)를 올리는 산제당이 있었던 '지당골'이며, 그 서쪽에는 큰 바위가 벼락을 맞은 '벼락고데이'가 있다. 계곡이 깊고 오염되지 않은 개천물이 흐르는 곳으로 밤나무골, 수가매골, 작은멍골, 큰멍골이 있으며, 푸른 산죽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음지대밭골'이 지당골 밑에 있다.


먼내벌(원천, 遠川)

금댕이골과 승량이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천평(川坪)과 어평(御坪)에서 흐르는 물은 농거리에서 합류되어 좁은 계곡을 이룬 후, 칠랑리와 아시내를 지나면서 넓은 하천을 형성한다. 먼내벌은 내덕천 언덕 위에 있는 마을로 사시내와 가삼쪽으로 흐르는 냇물과 들녘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므로 '먼내벌(遠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승양이(삼양, 三良)
먼내벌/사시내와 넓게 펼쳐진 들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내덕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덕구교(德邱橋)을 건너면 경북 봉화 땅이었던 덕구리(德邱里)로 갈 수 있다. 덕구교는 일명 '통합교'라고 하는데 1963년 경상도 땅이었던 덕구리가 강원도로 통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지명 유래는 양상리(良上里)였던 승양이 양중리(良中里)인 가삼, 양하리(良下里)인 구름재(운성리) 가운데서 가장 중심지였으므로 '삼양리(三良里)'라고 부르다가 '승양이'로 변하였다.

이곳은 태백산 줄기로 6.25를 전후하여 공비와 좌익 게릴라들이 많이 출몰하던 곳이다. 승양이의 31번 국도 옆에는 신배나무, 느릅나무, 소나무가 당목(堂木)으로 있는 서낭당이 있는데 당집은 새마을운동 때 불태워졌다.

승양이 앞으로 흐르는 하천에는 용(龍)이 승천했다는 '용소'가 있고 그 위쪽에는 '선드래소'가 있어서 여름 한철 동네 사람들의 천렵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승양이에서 주채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돌이 많아 '돌고개'라 부르고 있다.


도장골

승량이 밑에 있는 큰 골짜기로 '산 안에 있는 골"이라는 뜻이다. '산'은 옛말인 '달'과 "안골(內谷)'이 합쳐져서'달안골→돋안골→도단골→도잔골'로 변하게 되었다. 즉 '도장골'이란 지명은 � 높은 산 밑에 있는 산촌마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채

승량이늬 내덕국교를 지나 상동주유소와 휴게소 견너편에 있는 마을로 방문조(房文祚)의 처 효부 남원 양씨의 효부가과 통정대부 방진두(房鎭斗)의 효자각이 있다. 방진두 효자각은 내덕교 부근에 있었으나 1984년 도로 확장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마을 뒤쪽에는 '미수골'이 있다.

맷둥이

아시내 북쪽으로 해발 1,426,2m의 매종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서너가구의 화전민일 살던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매봉산 줄기의 산둔덕(매둔지)에 동네가 있으므로 '메둔지'라 불렀으나 훗날 '멧둥이'로 와전되었다.

반정리(半程里)

내덕리의 반정은 천평리의 봉우재에서 구래리의 법호실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반정리→반정이'라 하였다. 반정리 앞에서 백운산에서 흐르는 본구래천의 맑은 물이 길 옆 숲속 계곡으로 흘러 피서철이면 수백명의 행락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칠랑이골(七郞理谷)

상동중·고등학교와 칠랑교(七郞嬌)가 있는 곳이다. 칠랑교를 지나면 칠랑 약수터가 있는 치렝이골이 나온다.

자장법사가 강릉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뒤에 태백산의 '갈반지(葛蟠址)'를 찾기 위해 상동을 일곱 번이나 왔다가 이곳으로 지나가는 칡넝쿨(칠구렝이)를 발견하고 그 넝쿨이 멈추는 태백산에다 정암사(갈래사, 석남원)와 수마노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즉, 자장법사가 발견한 삼갈반처(三葛蟠處)의 칠구렝이가 지나간 곳이므로 '칠구렝이골→치렐골→치렝이골→칠랑이골'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구래리에 꼭두각시가 살았고, 이곳 칠랑리에는 신라의 화랑도(花郞道) 일곱 명이 물 좋고 산이 수려한 이곳에서 무술공부를 하였으므로 '칠랑이(七郞理)'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산태골(치랭이골)

농거리에서 합류된 천평천과 어평천이 칠랑이로 흐르는데 , 하천북쪽은 내덕리이고 남쪽은 천평리이다. 내덕6리인 이곳은 옛날 큰 산사태가 있었던 '산태골' 장산으로 가는 지름길인 '가는골' 화정정리사업으로 촌락 자체가 없어져 버린 '빈터골' , 그리고 명당을 찾아 가묘를 �던 '헛장골', 작은 암자가 있었다는 '절골'등의 지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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