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잊을수 없는 추억이 쌓인곳-

지명 이야기-4-

바래미나 2007. 7. 20. 01:04
 지명 이야기 (펌) -4 
천평리(川坪里)

본래 경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땅이었으나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울진군(蔚珍郡)이 경상북도로 이속(移屬)되고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읍으로 편입되었다.

천평리의 원래 지명은 '냇들', '내뜨리'라고 불렀으며 고직령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농거리에서 어평천과 합류한다. 이러한 냇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므로 '냇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태백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서쪽은 민백산과 옥녀봉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직령(高直嶺)이 가로막혀 있는 산상분지로 수만평의 넓은 땅이 있어 고랭지 채소, 감자, 약초 재배 등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1980년 농거리의 농거교 우측에 8231공군부대가 전투기 사격 연습장을 만들면서 천평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주민들은 삶의 흔적만 남겨놓은 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천평리 역시 하동면 와석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이 십승지지(十勝之地)인 『寧越正東上流踪亂』이라고 생각한 「정감록(鄭鑑錄)」에 심취된 비기파 신봉자들이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많이 찾아든 곳이다.

그 외에도 동학교도와 의병들이 몸을 숨기던 곳으로 일제 시대인 1940년에는 가는골에 살던 이낙림(李洛林), 당골(堂谷)의 윤상명(尹尙明), 최익한(崔翼漢), 유형호(柳亨浩) 등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과 함께 태백산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獨立祈願祭)』를 올렸는데 그 중 주동자 20여명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아시내

주채와 봉우재 사이로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은 내덕리와 천평리의 경계로 마을 앞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므로 '아시내'라고 불렀다. '아시'는 '작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천평(下川坪)

칠랑이 밑에 있는 아시내, 뱀밭, 봉우재 등 냇들(내뜨리) 밑에 있는 마을을 '하천평'이라 하고 공군 부대가 주둔하여 동네 자체가 없어진 가평, 가는골, 뒤나무골, 당골, 무래이골 등을 '상천평'이라 하였다.


봉우재(봉현)

하천평 남쪽으로 구래천을 사이에 두고 내덕리와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마을 뒤 산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는 큰 고개가 있으므로 '봉우리재→봉우재'라 하였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에 봉화를 올리던 봉화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뱀밭(불전리, 佛田里)

봉우재 휴게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 휴게소의이름은 '뱀밭휴게소'라 해야 하는데 그 지명이 좋지 않아 이웃 마을의 이름을 이용하였다. 뱀밭은 땅이 기름지지는 않지만 넓은 들녘이 있었으므로 일명 '부처뜰' 또는 '불전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지명의 유래는 옛날 법호실에 있었던 큰 절에서 부치던 사전(寺田)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사전리(뱀밭), 불전리, 부처 뜰' 등의 지명으로 구전되고 있다.


폐지댐

아시내와 봉우재 사이에 있다.1923년 중석광업소가 건립된 후 50년동안 이나 중석가루가 상동천으로 흘러내려, 하천이 오염되었으며 어린이들은 미술시간에 강물의 색을 회색으로 그릴 정도였다. 그 후 박병권 사장이 부임하여 2억원을 들여 높이 8m, 폭4m,길이 862m의거대한 댐을 막아 중석가루가 섞인 상동천을 맑은 무로 회생시켜 물고기가 놀 수 있는 하천으로 만들었다. 이 폐재처리장은 1972년 5월 14일에 착공하여 1973년 3월 3일에 준공식을 하였다.

각회골

상동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31번 국도 우측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각희대사(覺喜大師)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으므로 '각희골'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봉화군 춘양과 소천으로 이어지는 각화산(覺華山, 1,202m) 남쪽 산록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각화사'라는 절집으로 가는 길목이 되므로 '각화골'이라 불렀는데, 그 후 '각희골'로 변한 것 같다. 각화사 절터에는 3층석탑과 비석이 없는 귀부만 전해지고 있어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고려때 太白山人이라 불리던 승려 계응(戒膺)이 각화사를 중건하고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데 예종 임금이 여러 차례 궁궐로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계응은 태백산에서 끝내 나오지 않고 각화사에서 입적했으며 그의 사후(死後) 예종은 계응을 국사(國師)로 추증하였다. 작은각희와 큰각희가 있는데, 큰각희골에는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금광의 광석을 찧었는데 한 쪽에 4개씩 여덟 개의 방아공이가 교대로 빻았다고 한다.


조가집 골

서덕골 아래쪽으로 전에 약초를 많이 재배하던 조씨네가 살던 곳이므로 '조가집골'이라 한다.

서덕골

도장골과 조가집골 사이에 있다. 마을 뒤에 벼랑이 무너져 내린 큰 돌서덕이 있으므로 '서덕골'이라 하였다.

도장골

마을 입구 큰 벼랑 위에 장독처럼 생긴 큰 독바위가 있다. 31번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 독바위 밑으로 옛길이 있어서 목너미재를 넘어 가드래와 농거리로 갔었다. 높은 산 밑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므로 '달안굴→돋안골(山谷)→도잔골→도장골'로 변하였다.


목너미재

도장골에서 새고랭이러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목너미재'라 부른다.

농거리

어평,상천평, 칠랑이골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상천평 동쪽에 있다. 농거교를 경계로 영월과 태백으로 나누어지는 곳으로 농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서 '농거리'라고 한다. 농거교 우측에는 공곤부대가 있고 어평재(화방재)동쪽에 '태백학생 야영장'이 있다.

새고랭이

도장골과 가드래(가평, 加坪)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새'는 '사이'를 뜻하며 '고랭이'는 '고라데이'와 마찬가지로 '골짜기'의 영월 사투리이다. 도장골에서 책상바위가 있는 목너미재를 넘으면 가드래로 갈 수 있다.


가평(加坪, 가드래)

농거리에서 칠랑이로 내려가는 국도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1936년 병자년 가력 때 산사태(沙汰)로 들녘이 더 넓어졌으므로 '가드래', '가들', '가평(加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즉, 홍수 때 산사태로 생긴 넓은 들이라는 뜻이다.


연작골(連作谷)

문바우 건녀편에 있는 골짜기로 태백 땅이다.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오는 관문인 고직령(高直嶺)과 민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은 천평리의 동네 가운데로 흐르는데 이곳을 경계로 영월과 태백으로 나누어진다.

골짜기 안쪽에는 큰 화전밭이 있는데 땅심이 좋아서 땅을 묵히지 않고 연작(連作)을 했던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에는 작은 연작골이 있고 그 안쪽 산등성이에는 옛날 태백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는 끝이 뾰족한 촛대바위가 있다.


쬐기골

작은 연작골을 지나 우측으로 올라가면 골짜기가 나온다. 산짐승을 잡기위해 쬐기를 설치했던 곳이므로 '쪼개골','쬐기골'이라 한다.

문바우

쬐기골 밑에 있다. 대문의 기둥처럼 생긴 큰 바위 두 개가 우뚝 솟아 있음으로 '문 바우'라 불렀다.

가는골

쬐기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큰가는골은 한때 30여 호가 살았고 작은가는골도 두 가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천평리 전체가 공군 부대의 사격장으로 변하여 민간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이곳에 조상의 산소가 있는 사람들은 성묘도 못한다고 한다.

특히 가느골은 옥녀봉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을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무공해 지역이다. 골자기가 가늘고 길게 뻗어 있으므로 '가는골'이라 한다.


뒤나무골

가는골 너머로 여섯 가구가 살았다. 마을 어귀 두 번째 집 뒤안에 세아름이 넘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었으므로 '뒤나무골'이라 하였다.

당골

가는골 냇물 건너편에 있다. 큰당골과 작은당골, 재피골, 소골 등이 있는데 이 모두를 합쳐서 당골이라 한다. 큰 당골을 넘으면 태백산 천황당(天皇堂)으로 갈 수 있으므로 '당골'이라 부르게 되어�.


갈골(葛谷)

천평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옥녀봉 아래에 있다. 마을 뒷사넹 칡이 많으므로 '갈골'이라 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때 갈골에 금광(金鑛)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채광된 금은 마차에 싣고 금정으로 옮겼다고 한다. 갈골 어귀에는 당목과 돌티미가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 당고사를 올렸다.


안간지골

갈골에서 옥녀봉 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옛날부터 이 골자기 안에는 호랑이 새끼인 개갈 강아지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므로 '안간지골'이라 했으며, 갈가지는 길 가는 사람들에게 흙을 뿌리며 놀라게 하는 짐승이라고 한다.


산태골

갈골에서 안쪽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작은 골짜기이다. 이 곳에 산사태가 났을 때 무너져 내린 흙더미 속에 금조각이 발견되면서 갈골에는 금광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즉 산사태가 난곳이므로 .산태골'이라 하였다.

참빗골

갈골 건너편으로 춤시리골과 골님이골 사이에 있다. 골짜기안의 작은 계곡이 있는데 , 마치 머리를 빗는 참빗처럼 생겼으므로 '참빗골'이라 한다. 그 위쪽으로는 춘양의 애당리로 넘어가는 곰님이골과 곰님이재가 있다. 곰님이재는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강원도 쪽에서는 경사가 완마하지만 경상도 춘양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곰'은 '큰고개'를 뜻하고 '님이'는 '너머'라는 뜻이므로 '곰님이재'는 '큰고개너머'라는 의미가 된다.

산시나무골

곰님이골에 있는 골짜기로 5월경에 흰 꽃이 피는 산사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무래이골

곰님이골 어귀에서 우측 민백산 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로 비가 오면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므로 '무래이골(물나오는골)'이라고 불렀다. 무래이골에 금광이 있었는데 장마가 지면 출근하는 광부들이 나무에다 줄을 묶은 다음 서로 당겨주면서 건너다녔다고 한다.

이곳 광산 역시 일본사람들이 개발한 금광으로 착암기가 없을 때는 징으로 광맥을 깨뜨리면서 금맥을 찾았는데 그 길이가 수십 리까지 뻗었다고 한다. 그 당시 잡일을 하는 인부는 하루에 45전, 대부리(기술자)는 60전의 노임을 받았는데 특히 무래이골에는 금광 노동자들의 사택이 많았다고 한다.


민백산(民白山)

무래이골 끝자락에 있는 산이다. 산의 지형이 둥글고 흰색의 돌바위가 많아 민백이(대머리)처럼 생겨서 '민백산'이라 한다. 민백산은 옛날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이 많았으므로 일명 '황장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민백산에서 경북 우구치로 넘어가는 고개를 '우구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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