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구리(德邱里)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상도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땅이름의 유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삼동산'의 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덕구리'라 하였다. 덕구리는 '고심골, 굽돌이, 양지말, 음지말, 질가부, 중말 등의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75가구 262명(1992년 기준)을 주로 고랭지 채소와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고심골(高深谷)
원천(먼내벌) 건너편 굽돌이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 전에는 서너 가구가 살았으나 화전촌 철거와 울진, 삼척 공비 출몰로 인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고심골은 약 8km가 넘는 깊은 골짜기로 당목이재와 등어치를 넘어 경북 춘양면 우구치(牛口峙)로 갈 수 있으며, 당목이 고개 마루에는 아름드리 참나무 당목 밑에 돌탑을 쌓아 올린 쿠시당이 있었다. 지명의 유래는 그 지세(地勢)가 높고 골짜기가 깊으므로 '고심골'이라 하였다.
고승골(高僧谷, 절골)
고심골 어귀에 있는 말바우와 문바우를 지나 남서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이곳 절터에서는 청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앞에는 푸른 소(沼)와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즉, 옛날 고승(高僧)들이 수도를 하던 절이 있었던 곳이므로 '고승골'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굽돌이
원천(먼냇벌)을 지나 고심골로 들어가는 어귀로 마을 앞으로 상동천이 구비쳐 돌아드는 곳이므로 '굽돌이'라고 불렀다. 다른곳에 비해 넓은 들녘이 있으며 일찍부터 보(洑)를 이용한 논농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장승백이
승량리에서 1965년에 개통된 통합교를 건너면 덕구리의 장승백이이다. 김덕연(金德淵)씨 집과 사슴 목장이 있는 예전 우전거리(소시장) 길 옆에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여진 목장승이 서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장승은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로 들어오는 질병, 잡귀, 재앙 등을 막는 동시에 강원, 경상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길손들에게는 이정표의 구실을 하는 노표(路慓) 장승의 역할도 했었다. 장승백이 노인들이 말에 따르면 長丞祭는 주민 중에서 生氣福德에 맞추어 祭官과 有可를 뽑은 후 장승과 제관집 문 앞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뒷산의 황토를 가져다 뿌렸다. 제관은 목욕을 하고 부정한 것을 안 보고 가급적이면 문밖 출입을 피하며 부인과 합방(合邦)도 하지 않는다. 제물(祭物)은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 산적, 떡 등을 장승 앞에 진설했다고 한다.
장승제(長丞祭)의 절차는 강신(降神)→초헌고축(初獻告祝)→첨작(添酌→아헌(亞獻)→종헌(綜獻)→소지(燒紙)→음복 순으로 진행되었고 장승제가 끝나면 한마당 마을 잔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옛날 주막집이 있었던 곳이므로 일명 '질가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태미골
옛 덕구국민학교 뒤쪽으로 곧게 뻗은 골짜기로 큰묘가 있어서 '태미골'이라 하였다.
진골
덕구리 마을 뒤쪽으로 길 게 늘어진 골짜기로 봉우재 마을로 질러가는 길이었다.
등어치
덕구리(德邱里)남쪽으로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우구치리(牛口峙里)와 경계인 해발 933.3m 등어치(登於峙)로 가는 고개이므로 '등어치'라 부른다. 옛날 영월 사람들이 춘양장을 보기 위해서는 굽돌이와 고심골을 지나거나, 장승백이와 등어치를 넘어 가당목이의 국시당 당마루에서 만난 후 여러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길이 험한 등어치를 넘어 경상도로 들어섰다. 1923년 일본 사람들이 상동 중석광업소를 세울 때 작은 기계 부속들은 춘양에서 등어치와 아홉살이를 넘어 운반했다고 한다.
장자터
덕구리(삼의동) 등어치에서 아홉 살이 재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남쪽에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살던 곳이므로 '장자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홉 살이재
덕구리 등어치에서 우구치와 금정(금정)으로 가는 옛고갯길이다. 산꼭대기에서 이고갯길을 내려다보면 마치 국수사리를 사려놓은 것 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아홉구비나 휘어진 고개이므로'아홉 살이재'라 부르게 되었다.
가당목이
아홉 살이재와 등어치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옛날 내덕리에서 경상도로 가는 가장 끝에 있는 당마루로 길손들이 쌓은 돌탑인 국시당이 있었으므로 '가당목이'라 한다. '가'란 '가장자리'를 뜻한다. 이곳을 지나 330리를 가면 내덕초등학교 조제분교가 있는 하동면 내리 조제와 춘양면 하금정(下金井)과 서벽리(西碧里)로 갈 수 있다.
단지골
진골 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단지처럼 입구가 좁고 안자락이 넓은 지역이므로 '단지골'이라 한다. 삼우동에서 합친 세 계곡의 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단지골 계곡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
양지마을
진골과 고미등 사이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이다. 그 건너편에 있는 마을을 음지마을이라 한다.
음지마을
양지마을 건너편 삼동치 밑에 위치하며 햇볕이 들지 않아 겨울에 내린 눈이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 곳이다.
고미동
덕구리의 가장 끝자락인 장대바위골로 가는 고개 북동쪽에 있다. 천평리 각희골과 덕구리를 가로 지르는 해발 1,077,9m의 높은 메(산)가 솟아 있으므로 '고메동→고미동(高山洞)'이라 한다.
장대바위 골
덕구 2리에 있었던 동일 금광에서 갈골을 지나 천평리로 가는 긴 골짜기로 장대처럼 높이 솟아 있는 큰 바위가 있었으므로 .장대바위골'이라 불렀다.
삼동치(三洞峙)
내덕국민학교 삼덕분교가 있었던 마을로 한때는 금광과 탄광의 개발로 호황을 누리던 곳이다. 마을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인 삼동산이 있으며 지금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옛날부터 이곳 삼동산은 산나물은 만히 나던 곳으로 봄철 보릿고개 때면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던 곳이라 한다.
새로고침꾸미기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1일 강원도 땅이었던 울진군이 경상도로 이속되고, 덕구리와 천평리가 영월군 상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땅이름의 유래는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삼동산'의 큰 언덕 위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덕구리'라 하였다. 덕구리는 '고심골, 굽돌이, 양지말, 음지말, 질가부, 중말 등의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75가구 262명(1992년 기준)을 주로 고랭지 채소와 밭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고심골(高深谷)
원천(먼내벌) 건너편 굽돌이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 전에는 서너 가구가 살았으나 화전촌 철거와 울진, 삼척 공비 출몰로 인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고심골은 약 8km가 넘는 깊은 골짜기로 당목이재와 등어치를 넘어 경북 춘양면 우구치(牛口峙)로 갈 수 있으며, 당목이 고개 마루에는 아름드리 참나무 당목 밑에 돌탑을 쌓아 올린 쿠시당이 있었다. 지명의 유래는 그 지세(地勢)가 높고 골짜기가 깊으므로 '고심골'이라 하였다.
고승골(高僧谷, 절골)
고심골 어귀에 있는 말바우와 문바우를 지나 남서쪽으로 갈라지는 골짜기이다. 이곳 절터에서는 청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앞에는 푸른 소(沼)와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즉, 옛날 고승(高僧)들이 수도를 하던 절이 있었던 곳이므로 '고승골'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굽돌이
원천(먼냇벌)을 지나 고심골로 들어가는 어귀로 마을 앞으로 상동천이 구비쳐 돌아드는 곳이므로 '굽돌이'라고 불렀다. 다른곳에 비해 넓은 들녘이 있으며 일찍부터 보(洑)를 이용한 논농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장승백이
승량리에서 1965년에 개통된 통합교를 건너면 덕구리의 장승백이이다. 김덕연(金德淵)씨 집과 사슴 목장이 있는 예전 우전거리(소시장) 길 옆에 『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이라고 쓰여진 목장승이 서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장승은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로 들어오는 질병, 잡귀, 재앙 등을 막는 동시에 강원, 경상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길손들에게는 이정표의 구실을 하는 노표(路慓) 장승의 역할도 했었다. 장승백이 노인들이 말에 따르면 長丞祭는 주민 중에서 生氣福德에 맞추어 祭官과 有可를 뽑은 후 장승과 제관집 문 앞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뒷산의 황토를 가져다 뿌렸다. 제관은 목욕을 하고 부정한 것을 안 보고 가급적이면 문밖 출입을 피하며 부인과 합방(合邦)도 하지 않는다. 제물(祭物)은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 산적, 떡 등을 장승 앞에 진설했다고 한다.
장승제(長丞祭)의 절차는 강신(降神)→초헌고축(初獻告祝)→첨작(添酌→아헌(亞獻)→종헌(綜獻)→소지(燒紙)→음복 순으로 진행되었고 장승제가 끝나면 한마당 마을 잔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옛날 주막집이 있었던 곳이므로 일명 '질가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태미골
옛 덕구국민학교 뒤쪽으로 곧게 뻗은 골짜기로 큰묘가 있어서 '태미골'이라 하였다.
진골
덕구리 마을 뒤쪽으로 길 게 늘어진 골짜기로 봉우재 마을로 질러가는 길이었다.
등어치
덕구리(德邱里)남쪽으로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우구치리(牛口峙里)와 경계인 해발 933.3m 등어치(登於峙)로 가는 고개이므로 '등어치'라 부른다. 옛날 영월 사람들이 춘양장을 보기 위해서는 굽돌이와 고심골을 지나거나, 장승백이와 등어치를 넘어 가당목이의 국시당 당마루에서 만난 후 여러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길이 험한 등어치를 넘어 경상도로 들어섰다. 1923년 일본 사람들이 상동 중석광업소를 세울 때 작은 기계 부속들은 춘양에서 등어치와 아홉살이를 넘어 운반했다고 한다.
장자터
덕구리(삼의동) 등어치에서 아홉 살이 재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남쪽에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살던 곳이므로 '장자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홉 살이재
덕구리 등어치에서 우구치와 금정(금정)으로 가는 옛고갯길이다. 산꼭대기에서 이고갯길을 내려다보면 마치 국수사리를 사려놓은 것 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아홉구비나 휘어진 고개이므로'아홉 살이재'라 부르게 되었다.
가당목이
아홉 살이재와 등어치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옛날 내덕리에서 경상도로 가는 가장 끝에 있는 당마루로 길손들이 쌓은 돌탑인 국시당이 있었으므로 '가당목이'라 한다. '가'란 '가장자리'를 뜻한다. 이곳을 지나 330리를 가면 내덕초등학교 조제분교가 있는 하동면 내리 조제와 춘양면 하금정(下金井)과 서벽리(西碧里)로 갈 수 있다.
단지골
진골 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단지처럼 입구가 좁고 안자락이 넓은 지역이므로 '단지골'이라 한다. 삼우동에서 합친 세 계곡의 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단지골 계곡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
양지마을
진골과 고미등 사이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이다. 그 건너편에 있는 마을을 음지마을이라 한다.
음지마을
양지마을 건너편 삼동치 밑에 위치하며 햇볕이 들지 않아 겨울에 내린 눈이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 곳이다.
고미동
덕구리의 가장 끝자락인 장대바위골로 가는 고개 북동쪽에 있다. 천평리 각희골과 덕구리를 가로 지르는 해발 1,077,9m의 높은 메(산)가 솟아 있으므로 '고메동→고미동(高山洞)'이라 한다.
장대바위 골
덕구 2리에 있었던 동일 금광에서 갈골을 지나 천평리로 가는 긴 골짜기로 장대처럼 높이 솟아 있는 큰 바위가 있었으므로 .장대바위골'이라 불렀다.
삼동치(三洞峙)
내덕국민학교 삼덕분교가 있었던 마을로 한때는 금광과 탄광의 개발로 호황을 누리던 곳이다. 마을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인 삼동산이 있으며 지금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옛날부터 이곳 삼동산은 산나물은 만히 나던 곳으로 봄철 보릿고개 때면 경상도와 강원도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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