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육군은 1958년 PGM-11 레드스톤(Redstone) 미사일을 실전배치하면서 본격적인 탄도미사일 전력을 확보했다. 레드스톤은 폰브라운이 직접 설계책임자를 맡으며 개발을 이끌어 V-2 로켓의 직계 후손이라고 불릴만 했다. 그러나 초기의 액체연료 탄도미사일이 갖는 단점들을 그대로 보유했기에 야전 운용성이 의문시됐다. 결국 당시 국방부장관인 맥엘로이는 1958년 1월 10일 레드스톤을 대체할 새로운 고체연료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지시했다.
새롭게 개발될 미사일에 대한 요구조건은 꽤나 엄격했다. 기동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하여 중량은 1만 파운드 이하로 제한됐다. 사정거리는 최소 100해리, 최대 200~300해리였으며, 이 거리에서도 정확히 기능할 수 있는 유도장치가 요구되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사정거리가 200해리 이상이 되는 미사일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해군이 폴라리스 SLBM을 개발하면서 고체연료 추진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자 200해리 이상의 고체연료 미사일을 육군도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신형미사일에서 중시된 것은 기동성이었다. 고체연료를 사용하여 액체연료와 산화제의 충전이 필요없게 된 것은 기동성 측면에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야전 전개와 발사에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던 레드스톤에 질린 육군은 신형미사일에서는 작고 가볍고 기동성 높은 무기체계일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했다. 따라서 미사일은 별도의 트레일러에 실려 현장에서 발사대에 조립되는 방식을 피했다. 대신 아예 기립형 발사대 겸 운반차량(transporter-erector-launcher; TEL)에 싣고 이동하여 곧바로 발사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이에 따라 현장에 도착하면 수분 내에 미사일을 발사가 가능하여 '사격후 회피'가 가능한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신형미사일은 일단 레드스톤-S(S는 고체연료solid propellant의 줄임말)로 불렸는데, 개발과정에서 사거리가 200해리로 제한되었던 것은 맥엘로이의 전임자인 윌슨(Charles Erwin Wilson, 1890-1961) 국방장관 때문이었다. 윌슨 장관은 200해리 이상의 미사일은 육군이 아니라 타군에서 담당해야만 한다는 지침(윌슨 메모랜덤으로 불림)을 내림에 따라, 1956년에 500~750해리 짜리 미사일을 만들고자 했던 미 육군의 시도는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엘로이가 들어서면서 이 지침은 폐기되었고, 신형 미사일은 사거리 400해리를 목표로 개발을 추진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미사일로 진화하면서 신형 미사일은 레드스톤-S라는 가칭을 버리고, 1차대전의 명장인 존 퍼싱(John J. Pershing, 1860-1948) 원수를 기념하여 '퍼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사일의 개발부서는 미 육군 레드스톤 조병창에 위치한 육군 탄도미사일 사업청(Army Ballistic Missile Agency; ABMA)이었다. 개발업체의 선정에는 크라이슬러(Chrysler), 록히드(Lockheed Corporation), 더글라스 항공(Douglas Aircraft Company), 제너럴 일렉트릭 콘베어 디비전(Convair Division of General Dynamics), 파이어스톤(Firestone Corp.), 스페리-랜드(Sperry-Rand Company), 마틴(Martin Company) 등 7개사가 참가하여 불꽃튀는 경쟁을 벌였다. 당시 육군성 장관인 브루커(Wilber Marion Brucker, 1894-1968)는 미시건 주지사를 역임했기에 미시건에 기반을 둔 크라이슬러로 지정해달라는 로비의 압박이 심했다. 그러나 탄도미사일 사업청장인 메다리스(John Bruce Medaris, 1902-1990) 소장은 브루커 장관에게 ABMA에게 결정을 맡겨달라고 설득했고, 심사결과 마틴을 개발업체로 선정했다.
사실 마틴은 이미 1957년 플로리다에 미사일 공장을 열었는데, 육군도 빈번히 사용하던 공군 미사일시험장의 인근에 위치했기에 신형 미사일 개발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마틴이 선정된 것은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틴의 전문성은 상당했는데, 마틴의 품질보증 담당자인 필 크로스비(Philip B. Crosby, 1926-2001)는 무결점 운동(Zero Defects) 개념을 만들어 퍼싱의 개발에 적용했으며, 이는 추후 품질관리의 표준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미 육군은 1958년 3월 28일 마틴과 CPFF(cost-plus-fixed-fee, 고정 수수료 가산 원가)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개발은 가속화되었다.
퍼싱은 최초의 시제모델인 XM14 '개발형(R&D) 퍼싱1'(P-01)이 1960년 2월 25일 처음으로 시험발사 되었다. 이후 약 5개월만인 7월 26일, XM-14(P-06)가 TEL 이동식발사대에서 최초로 발사되었다. 퍼싱의 개발은 느리지만 신중하게 진행되어 무려 시제미사일이 56발이 제작되어 발사되었으며, 이 중에 시험에서 실패한 미사일은 5발에 불과했다. 한편 실전배치를 염두에 두고 훈련용인 XM19 '비활성(inert) 퍼싱1'도 등장하였다. 1963년 7월 육군의 제식명 변경과 함께 XM14는 XMGM-31A로, XM19는 XMTM-31B로 재명명되었다.
퍼싱은 1962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양산이 시작된 후에도 개발은 계속되었으며, 1963년 8월 20일 최초의 실전검증 발사 이후에도 1967년까지 무려 36발이 더 발사되었다. 퍼싱1은 1964년 실전배치가 선언되었는데, 이듬해 MGM-13 메이스(Mace) 순항미사일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버전인 퍼싱 1A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1월 마틴 마리에타가 체계개발업체로 선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MGM-31B 퍼싱 1A 미사일이 개발되었다.
퍼싱은 미소의 핵경쟁에서 소련의 핵위협에서 유럽을 지키는 핵심무기로 인식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개발 중인 퍼싱을 보기 위하여 케이프 커내브럴(Cape Canaveral)과 포트 베닝(Fort Benning)을 차례로 방문했고, 그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케네디도 무려 3차례나 퍼싱을 참관했다. 심지어는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행렬에서 퍼싱발사차량이 간이 열병식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심 속에 1962년 6월 첫 퍼싱 전술미사일대대가 창설됨으로써 배치가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MGM-31A 퍼싱1의 제식화가 시작되었다.
2개의 고성능 추진체로 인하여 퍼싱1은 발사 후 순식간에 마하 8의 속도에 이를 수 있다. 최대 사정거리는 740km(약 400해리)를 날아가는데 약 5분이 소요된다. 퍼싱1 이전에 사용되던 레드스톤 미사일은 무려 21m에 이르는 대형발사체였지만, 사정거리는 고작 320km(약 175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절반 정도의 길이에 불과한 퍼싱1은 그 2배 이상의 거리를 비행하여, 추진체계 기술의 발전을 몸소 보여준 미사일이었다.
퍼싱1은 고체연료 미사일이므로 액체연료 미사일과는 달리 별도의 연료주입과정이 필요없으며, 이 과정에서 유해가스에 노출될 일도 없다. 따라서 전개하자마자 안전하고 빠르게 실전적으로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 퍼싱1의 가장 큰 장점이다.
퍼싱1은 당연히 탄도미사일이지만, 미익을 사용하여 탄도를 수정하면서 지정한 표적에 명중시킨다. 1단에는 3개의 수직미익이 장착되며, 2단에는 사격형의 미익 2개가 90도 각도로 장착되어 미사일을 제어한다. 항법장치로는 단순한 관성항법장치가 장착되었는데, 정확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어서 원형공산오차는 400m에 불과했다. 그러나 항법장치가 단순했기 때문에 전자전 공격에 대해서는 높은 생존성을 자랑했다.
퍼싱에 정밀한 항법장치를 장착하지 않은 것은 핵탄도미사일이기 때문이다. 퍼싱1에는 W-50 열핵폭탄이 장착된다. W-50은 폭파력을 50-200-400kt으로 조절할 수 있다. 명중률이 낮기 때문에 퍼싱에는 일반탄두는 장착되지 않았다. 핵탄두를 장착하므로 퍼싱1은 별 볼일 없는 정밀도에도 불구하고 왠만한 지상표적을 다 파괴할 수 있으나, 지하표적에 대해서는 여러 발을 발사해야 파괴할 수 있었다.
퍼싱 1A 미사일의 발사장면 <출처: 유튜브>
미사일 발사차량으로는 퍼싱1과 퍼싱1A는 서로 다른 종류를 사용했다. 처음 등장한 퍼싱 1은 M474 차량을 사용했는데, 이는 M113 장갑차에 기반한 M548 화물운반차량을 미사일 운반 및 발사차량이었다. M474는 궤도차량이므로 비포장로 뿐만 아니라 험지에서도 이동이 가능했다. 통상 퍼싱1의 발사를 위해서는 M474차량 2대에 한 대는 미사일 본체를, 나머지 한 대에는 탄두부와 핀 어셈블리 등을 장착하고 이동 한다. 그리고 전원공급차량, 네번째로는 AN/TRC-80 무전통신 장비를 탑재한다.
한편 퍼싱1A는 궤도식이 아니라 차량용 트레일러에 실려 운반되는 방식이다. 퍼싱 1A 차량으로는 M757 트랙터 트럭이 사용되었으며, 미사일은 M790 트레일러에 실려 운반되어 발사되는 방식이다. 전원공급장치와 제어차량은 M656 트럭에 실렸으며, 배터리제어장비가 별도의 차량에 실려 이동했다. 이에 따라 퍼싱 1A는 3대의 차량으로 이동하게 된 것인데, M474에서처럼 험지주파나 전개가 어려웠던 반면, M757/M750 한 대만으로 미사일 전체를 이동시킬 수 있었으며, 차륜형이라 빠른 전개가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운용의 역사
퍼싱 1은 레드스톤 미사일의 교체를 위해 개발되었다. 따라서 퍼싱도 바르샤바 조약국의 도발시 사용되는 전방배치 단거리탄도미사일로서 NATO 회원국에 전진배치되었다. 레드스톤과 달리 퍼싱은 고체연료 미사일로서 전개후 연료주입의 절차가 필요없어 빠른 발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사일의 크기로 인하여 M474 발사차량 2대로 탄두와 미사일을 별도로 분리하여 이동시키다가 발사 전에 결합하여 발사해야만 했다. 이런 번거운 절차로 인하여 발사시간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퍼싱 1A부터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압식 크레인을 장착했다. 유압식 크레인을 채용하자 미사일과 탄두의 결합시간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또한 기계식 기립장치의 성능을 개선하여, 미사일을 수평에서 수직으로 세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이내로 단축되었다. 또한 궤도차량 2대에 나누어 싣던 것을 차륜형 트레일러에 수납하여 신속히 전개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최초의 퍼싱 1 미사일대대는 1962년 포트 실(Fort Sill)에서 창설되었는데, 본부포대, 지원포대, 미사일포대 4개 등의 구조로 615명 규모로 발족되었다. 미사일 발사대는 포대당 1개가 배치되므로 대대는 모두 4발의 전술핵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었다. 미 육군은 이 시기 퍼싱 대대를 10개 발족하여 8개 대대는 서독에 1개 대대는 한반도에 배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산제약으로 부대 규모가 점차 줄어들어 5개로 줄였다가 1968년에는 4개로 확정되었으며, 1개 대대는 미 본토의 포트 실에 두고 나머지 3개는 서독에 위치한 육군 제7군 휘하에 배속하여 운용하도록 했다. 또한 전력지원계획을 통하여 서독 공군에서도 퍼싱 1을 운용하도록 하여 부족한 전력을 보강했다. 서독에서의 퍼싱 운용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 NATO회원국들은 막강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재래전력에 맞서 핵우위를 통하여 전쟁을 억제하는 '인계철선'이론을 바탕으로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NATO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Supreme Allied Commander Europe; SACEUR)이 제7군의 핵무기 통제권한을 가져가면서, 퍼싱 1의 1차적인 임무는 7군의 지원이 아니라 유럽전구 전체에 대한 신속대응경보(Quick Reaction Alert; QRA)를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퍼싱 대대는 2개 포대가 항시 대기 상태로, 1개 포대는 주둔지 대기, 나머지 1개포대는 정비 상태로 운용개념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전력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육군은 각 퍼싱 포대마다 발사기 2개를 배치하도록 하여 대대는 모두 8개의 발사차량을 보유했으며, 이에 따라 퍼싱 대대는 병력 1,100여명 규모로 증강되었다.
미 육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빠른 발사가 가능하도록 퍼싱 1 미사일을 개량하여 퍼싱 1A가 개발되었는데, 퍼싱 1A는 정비소요가 크고 이동이 느린 궤도차량을 대신하여 차륜형 트레일러 방식을 채용하였다. 또한 사전에 지정한 장소에 신속히 발사가 가능하도록하여 지형참조시스템을 추가함에 따라 발사시간이 대폭단축되었다. 미 육군은 기존의 퍼싱 대대에 퍼싱 1A까지 추가로 배치하여, 이제 퍼싱 1개 대대는 발사기가 36개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1개 포대에 9대의 발사차량이 배속되었으며, 퍼싱 포대는 약 200명의 병력을 소령이 지휘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이와 함께 QRA 상시대기 임무는 각 대대당 1개의 포대에게 맡기게 되었다.
퍼싱 1A는 1985년부터 퍼싱 2와 교체되기 시작했다. 한편 미소간의 INF(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중거리 핵전력 폐기) 협정으로 퍼싱 1A 미사일 169발 파기대상이 되었다. INF 협정에 따르면 협정이 발효된 이후 18개월 이내에 폐기를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미 육군은 1989년 7월 6일까지 퍼싱의 전량 폐기를 마쳤다. 미사일 해체는 롱혼 탄약창에서 실시되었으며 지상에서 고체연료를 완전연소한 이후에 미사일 본체를 압착파기 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고, 소련의 사찰팀이 폐기과정을 감시함으로써 조약준수 여부를 확인했다.
파생형
XMGM-31A : MGM-31A의 시제미사일. 최초에는 XM14로 명명됐었다.
XMTM-31B : 퍼싱 1 미사일의 훈련용. XM19로 분류되었으나 양산되지는 못했다.
MGM-31A 퍼싱 1 : XMGM-31A에 바탕한 초기 양산모델. M474 궤도형 발사차량에서 운용하며, 1960년부터 1969년사이에 모두 754발이 생산되었다.
MGM-31B 퍼싱 1A : 퍼싱 1의 개량형으로 신속 전개가 가능한 차량형 TEL을 활용한다. 전기계통과 항전장비가 개선되었으며, M750 트레일러형 TEL에서 발사된다. 퍼싱 1A는 1969년 최초로 실전배치되었으며,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 모두 754발이 생산되었다.
페가서스 : 퍼싱 1 미사일을 활용한 위성발사체. 제안 단계에 그쳤으며 실제 생산되지는 못했다.
MGM-31C 퍼싱 2 : 퍼싱 1의 개량형으로 시작했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새로운 무기체계로 분류된다.
제원
형식 : 고체연료 2단추진 단거리 미사일 추진체계 : 1단 TX-174 고체연료로켓 (115 kN) + 2단 TX-175 고체연료로켓 (85 kN) 전체 길이 : 10.55m 직경 : 1.02m 발사 중량 : 4,661kg 탄두 중량 : 190kg 장착 탄두 : W50 열핵탄두 최대 속도 : 마하 8 사정 거리 : 740km 원형 공산 오차 : 400m
저자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다. 현재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신안산대 경호경찰행정학과의 겸임교수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