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의 역사
이스라엘의 건국과 분쟁의 시작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서구 열강은 식민지나 보호국을 하나씩 차례로 독립시키게 되었으며, 중동 지역에서도 식민지 지배권을 갖고 있던 영국이 1946년부로 압둘라 1세(Abdullah I, 1882~1951)에게 트랜스요르단 지역의 독립을 허용해주면서 독립의 물결이 시작됐다. 이집트의 경우 1936년에 체결한 영국-이집트 협정에 의거하여 영국이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긴 했으나 형식적으로는 이미 1922년에 독립을 승인한 상태였고, 프랑스 또한 1943년을 기점으로 레바논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1946년에는 시리아도 프랑스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을 떠돌며 살아온 유대인들은 기원 후 60년대에 유대왕국이 로마 제국에게 멸망 당한 뒤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겪으며 유럽과 미국 등지에 정착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6백만 명에서 1,700만명까지 살해당한 유대인 대학살, 통칭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계기로 독립국가 수립에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으며, 이미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게 협력하면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내용의 ‘벨포어 선언(Belfour Declaration)’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영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문제는 유대인이 독립국가를 재건하길 희망한 유대왕국 시절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계인 팔레스타인 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약속해준 영국은 이 복잡한 방정식을 세심하게 푸는 대신 1945년에 막 창설한 국제연합(United Nations)에 이 문제를 떠 안겼고, 결국 UN 총회는 1947년 11월 29일부로 UN 결의안 제 181(II)호를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하나의 ‘팔레스타인’ 내에서 각 지역의 민족 분포에 따라 독립하라는 분할독립 안을 채택했다. 국가 수립을 준비 중이던 이스라엘 측은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연맹 측은 수용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이 UN 권고안대로 1948년 5월에 독립을 강행하자 곧장 신생 이스라엘과 아랍연맹 간에는 ‘이스라엘 건국’을 막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10개월간의 전쟁은 유럽과 미국 유대인 사회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데다 이미 오래 전부터 팔레스타인 내에서 강력한 자경조직인 ‘하가나(Hagana)’를 운영해 온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제 1차 중동전쟁으로 불리게 된 이 전쟁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기나긴 생존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절박함이 야기한 전화위복 – 프랑스의 대 이스라엘 금수조치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독립을 쟁취한 이스라엘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하가나’를 정식 군 조직인 이스라엘 방위군, 통칭 IDF(Israel Defense Forces)로 재편했다. 신생 이스라엘은 소수의 병력으로 주변의 적대적인 아랍국가 전체(‘아랍 연맹’)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항공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으며, 시몬 페레즈(Shimon Peres, 1923~2016) 국방장관은 IDF의 항공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항공유지관리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록히드(Lockheed)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인 유대계 미국인 알 쉼머(Adolph William Schwimmer, 1917~2011)를 영입하여 베덱(Bedek) 항공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베덱 항공은 1959년 프랑스 푸가(Fouga) 사의 V형 미익 훈련기인 마지스떼르(Magister)를 ‘트주키트(Tzukit)’라는 이름으로 면허생산하며 처음 항공기 조립을 시작했으며, 1960년대 초까지 주로 항공기 면허생산과 유지정비에만 집중했다. 이스라엘 항공기 산업(Israel Aircraft Industries, IAI: 2006년에 다시 Israel Aerospace Industries로 개명)으로 사명을 변경한 베덱 항공은 1965년에 처음으로 자체 설계 항공기 개발에 손을 대어 1969년에 최초로 20인승 단거리 이착륙(STOL) 수송기인 아라바(Arava)를 제작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다쏘로부터 면허 생산권을 받은 적은 없지만, 이미 금수조치가 내려지기 전부터 미라주 시리즈의 상세 설계도를 비롯한 주요 문서를 대부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정확하게 어떻게 모든 서류를 손에 넣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 공개된 바는 없으나, 항공관련 전문작가인 돈 맥카시(Donald J. McCarthy, Jr.)는 이스라엘이 오래 전부터 해외첩보부인 모사드(Mossad)를 통해 관련 서류를 수집해왔다고 주장하며, 일각에서는 다쏘의 창업주로 유대계 프랑스인인 마르셀 다소(Marcel Dassault, 1892~1986)가 의도적으로 관련자료를 모두 이스라엘에 넘겼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IAI는 이들 자료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미라주 V의 카피판인 ‘네셔(Nesher)’를 1972년부터 실전 배치하여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으며, 1975년에는 네셔의 설계를 바탕으로 자체 제작한 베스트셀러인 크피르(Kfir)를 내놓을 수 있었다.
모방을 거친 기술력의 축적: ‘라비’ 프로젝트의 출범
이스라엘 공군은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기존에 운용하던 A-4 스카이호크(Skyhawk)와 크피르의 차기 기종을 고려하기 시작했으며, 이 두 기체의 성격을 볼 때 전투기와 폭격기의 임무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다목적 전투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공군은 1978년부터 미제 F-16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이듬해 이란 공군을 대상으로 진행되던 F-16 수출이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취소되자 해당 사업이 이스라엘로 전용되어 피스마블(Peace Marble) I 사업이 추진되면서 조기에 F-16을 인도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프랑스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 때문에 별도로 자체적인 항공기 개발을 추진했으며, 1980년 2월에 이스라엘 공군이 차기 전투기 요구도를 발행함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는 이에 적합한 신규 항공기의 개발을 승인했다. 특히 이스라엘 정부는 소련이 주변 중동권 국가를 지원하기 시작함에 따라 향후 개발할 차세대 전투기가 ‘현존하는 그 어떤 기종에도 성능이 밀리지 않아야 하는’ 반면, 무장은 미제 무장과 호환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1980년 2월에 “라비” 사업이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며, 최초 설계 목표는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 및 전장 항공 차단(BAI: Battlefield Air Interdiction)을 주 목적으로 삼되 방공임무를 부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투기로 설정됐다. 향후 라비는 A-4 스카이호크, F-4 팬텀 II와 크피르를 교체할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이스라엘 국내 소요만 최대 300대 이상이 예상되었다.
IAI는 2대의 단좌식과 3대의 복좌식을 포함하여 총 5대의 시제기를 개발하기로 계획을 잡아 복좌식인 B-01과 B-02, 그리고 단좌식인 B-03,04,05를 설계하여 총 다섯 개의 동체가 생산됐지만 사업 기간 중에 완성된 시제기는 B-01과 B-02 단 두 대뿐이었다. IAI는 1985년에 라비의 실물크기 목업(Mock-up)을 공개했으며, 1986년 12월 31일에 초도 비행에 들어가 총 26분간 비행을 실시한 후 강한 측풍이 부는 가운데서도 안정적으로 활주로에 안착했다. 사업계획 상 라비의 첫 양산기체는 1990년까지 이스라엘 공군에 인도될 예정이었으며, 초도운용능력(IOC: Initial Operational Capability) 선언은 1992년으로 잡혔다. 당시 IAI의 추산으로는 최대 생산에 들어갈 경우 월간 12대 생산이 가능했으며, 이후 라비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스라엘 공군의 주력 전투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치 못한 국내외적 난관
하지만 시제기까지 완성된 라비는 기체의 성능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실용개발이나 양산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노동당 등 야당 진영은 ‘라비’가 천문학적인 개발비가 들어가는 반면, 수출시장에 나가더라도 결국 미제 F-16C/D나 F/A-18C/D와의 경쟁을 버텨내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업 진행을 반대했다. 이스라엘 재무부나 이스라엘 중앙은행 역시 예산 상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전투기를 개발하는 사치를 누리다간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경제성장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라비’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지연되거나 중단해야 하는 타 개발사업이 많았기 때문에 군마저도 ‘라비’ 사업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 공군에서는 이미 도입이 시작된 F-16이 ‘라비’와 유사 등급의 전투기일 뿐 아니라 가격도 훨씬 싸고, 기체 자체도 검증이 끝났다는 점을 들어 ‘라비’ 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특히 아비후 벤-눈(Avihu Ben-Nun, 1939~)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소장)은 라비 사업을 취소하면 대신 75대의 F-16을 도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반면 ‘라비’ 사업을 옹호하는 진영은 이것이 향후 이스라엘 항공산업이 도약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며, 관련 항공기업들이 기술을 축적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기회라고 맞섰다. 특히 옹호 진영 측은 라비 사업을 중도에 취소할 경우 관련 항공업체가 줄줄이 도산하는 최악의 상황 지적했으며, 야당에서 우려한 해외수출 문제도 이미 남아공, 칠레, 타이완,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도입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 400대 가량까지 수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한편, 라비 개발에 협력하고 있던 미국도 ‘라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국방비의 큰 할을 라비에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에 전력 유지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보이고 있었으며, 그 부담은 이미 미국이 지기 시작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3년 기준으로 라비 사업에 투입된 비용은 미화 64억 달러였으며, 이 중 40%는 미 정부가 지원하고 있었다. 그나마 순수 개발비는 $13억 달러 정도로 낮은 편에 속했는데, 이는 이미 개발된 기술을 활용한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우려는 결국 미국의 기술이 녹아 들어간 ‘라비’가 완성될 경우, 그 기술이 제3자에게 다시 흘러나갈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항공분야에서 남아공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라비’ 사업 초창기에도 남아공 업체가 일부 관여했기 때문에 더더욱 우려되는 바가 컸다. 미국은 이미 라비 1호기가 초도 비행을 하기도 전인 1983년에도 기술 유출 가능성의 우려 때문에 주익을 비롯한 여러 구성부품의 수출허가(E/L)를 내주지 않다가 이듬해에 가서야 겨우 미국 기업이 사이에 끼는 형태로 면허생산을 허가한 적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미 공군이 운용할 계획도 없는 기체일 뿐 아니라 완성 시 미국의 F-16 C/D나 F/A-18의 잠재적인 수출 경쟁자나 될 공산이 큰 항공기 개발을 지원하고 있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미 정부 입장에서도 라비를 계속 지원하기는 쉽지 않았다.
현실의 벽 앞에서 실현되지 못한 전투기 강국의 꿈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은 1985년에 개발비 산정을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미국 측이 ‘라비’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부터 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 침체에 빠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가 단독으로 라비 사업을 끌고 가는 것은 어려워졌다. 결국 1987년 8월 30일자로 이스라엘은 각료회의를 통해 라비 사업에 대한 표결을 붙였으며, 이스라엘 노동당은 전원 반대표를 던져 반대 12-찬성 11 (1명 불참)로 사업 취소가 결정됐다. 리쿠드(Likud) 당 소속으로 시몬 페레스 장관과 함께 라비 사업을 적극 지원했던 모셰 아렌스(Moshe Arens, 1925~) 장관은 표결 직후 장관직을 사임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라비 사업 취소 직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F-16C 90대를 도입하게 되었다.
특징
라비는 작고 가벼우며, 엔진 출력이나 출력대비중량도 F-16 등에 비해 적은 편에 속한다. 동체 설계는 특징적으로 카나드를 채택하면서 수평 미익이 없는 삼각익을 채택했으며, 리딩엣지(Leading Edge: 날개 앞전)는 54도가 처진 반면 트레일링 엣지(Trailing Edge: 날개 뒷전)는 각도가 얇게 처졌다. 삼각익 날개 끝은 뾰족하게 끝나지 않고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도록 미사일 레일이 설치됐으며, 이 곳에는 라파엘(Rafael Advanced Defense Systems)사의 파이슨(Python)-3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할 예정이었다. 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카나드는 전체가 움직이면서 기체의 피치(pitch) 조정을 가능하게 하며, 카나드의 움직임이 조종사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종석보다 낮게 설치했다. 주익과 카나드는 미국의 그루먼(Grumman, 現 노스롭-그루먼) 사가 설계했으며, 라비가 양산에 들어갈 경우 첫 20개의 양산을 맡을 예정이었다. 엔진 흡입구는 F-16과 유사하게 동체 하부로 냈으며, 전방 랜딩기어는 흡입구 바로 뒤에, 후방 랜딩기어는 동체 후미에 수납됐다. 동체와 수직 미익, 카나드, 랜딩기어 개폐문과 패널에는 복합재가 다량으로 사용되어 기체 중량과 항력을 줄였다. 라비는 전 기체의 22%에 복합재를 사용했으며, IAI 측은 그로 인해 라비의 레이더 피 탐지 면적(RCS: Radar Cross Section)이 동급 기체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고 주장한다.
운용 현황
‘라비’ 사업은 기체의 성능과 무관하게 정치적인 문제가 사업의 생명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캐나다의 CF-105 애로우(Arrow) 사업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나, 정치적인 측면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일각에서는 라비가 끝까지 진행되어 양산이 됐다면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항공분야의 최고 선진국 대열에 낄 전기가 됐을 것으로 보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천문학적인 개발비에 비해 실속은 떨어지는 악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느 쪽의 주장이 옳았는지는 이제 와서 분명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라비’와 관련된 의혹 중 하나는 이 기술이 훗날 중국으로 흘러가 청두비기공업집단(成都飛機工業集團), 통칭 AVIC사가 제작한 젠(殘)-10(J-10) 항공기 개발에 영향을 주었는지의 여부다. 이 의혹은 라비와 J-10의 외관이 흡사한데다 최대이륙중량이 같고, 2008년경 영국의 제인스 디펜스(Jane’s Defense) 사가 한 러시아 엔지니어를 인용하면서 ‘J-10의 기술이 라비 프로젝트에서 나온 기술 정보를 토대로 개발됐다’고 보도하면서 불붙었다. 문제의 러시아인 엔지니어는 중국인 동료들과 작업하면서 이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는 정도로 증언했으나, 구체적인 증거나 자료는 없기 때문에 신빙성은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오히려 한 해 전인 2007년, J-10을 설계한 중국의 엔지니어인 숭웬총(宋文驄, 1930~2016)씨는 J-10과 라비의 관련성을 부인했으며, ‘외양상의 이유로 두 기체의 관련성을 주장한다면, 1960년대에 AVIC에서 개발한 J-9도 외양상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관련국 중 어디도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한 적이 없는데, 일각에서는 ‘라비’의 기술이 유출됐다면 미국의 기술이 적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중대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미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므로 ‘라비’의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은 미국의 기술이 아니더라도 최첨단 고급 기술이 잠정적인 적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며,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이 자체 제작한 조기경보통제(AEW&C)용 AESA 레이더인 EL/M-2075 팔콘(Phalcon) 레이더의 잠재 적국 수출을 저지한 사례가 있다. 무엇보다 전문가들도 라비와 J-10은 “외양만 유사할 뿐, 내용은 완전히 상이한 기체”라는 의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J-10은 “구식 기술을 현대 전투기의 외양으로 감쌌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두 기체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파생형
IAI 라비: 시제기만 총 3대가 완성되었으며, 1번기(B-01)는 1986년 12월 31일에, 2번기(B-02)는 1987년 3월 30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으나 라비 사업 자체가 1987년 8월에 취소됐다. 현재 남아있는 시제기 중 B-02번기 동체는 베에르셰바(Be’ersheba) 외곽에 위치한 핫체림 공군기지 내 이스라엘 공군 박물관에 야외 전시 중이며, B-03번기는 이스라엘 로드(Lod)시 외곽 벤 구리온(Ben Gurion) 국제공항에 위치한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 본사에서 기술 시연기로 운용 중이다.
- 종류: 다목적 전투기
- 제조사: 이스라엘 항공기 산업(現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 IAI)
- 승무원: 1명
- 전장: 14.57m
- 전고: 4.78m
- 날개길이: 8.78m
- 날개면적: 33.0㎡
- 날개하중: 303.2kg/㎡
- 자체중량: 7,031kg
- 최대이륙중량: 19,277kg
- 추진체계: 프랫&위트니 20,600 파운드급 PW1120 애프터버너 터보 팬 엔진 X 1
- 엔진 제원: 정적 출력 6,137kg, 증가 출력 9,337kg, 압력비 26.8, 중량 1,292kg
- 최고속도: 마하 1.6
- 항속거리: 3,700km
- 실용상승한도: 15,240m
- 상승률: 254 m/s
- 추력대비중량: 0.94
- 기본 무장: 30mm DEFA 기관포 X 1
- 최대 무장 탑재중량: 7,260kg
- 개발비: $15억 달러(1987년 사업 취소 시점 기준)
- 대당 가격: $1,100만 달러 (개발 당시 예상 가격)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From: Web, 출처/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kr 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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