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직전에 탄생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러시아의 주력 전략폭격기로 활약 중인 Tu-160 <출처: (cc) Alex Beltyukov at Wikimedia.org >
개발의 역사
1960년대 들어 핵폭탄 투사 플랫폼이 급격히 미사일로 재편되어 나가자 미국은 폭격기 전력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지 생존성, 신속성, 정확성만 놓고 보더라도 굳이 폭격기를 운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언론 매체 등에서 폭격기를 엄청난 무기로 묘사하는 경향이 많지만 공격력에 비해 기동력이 뒤지고 속도가 느려서 하늘에서 전투기와 만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표물 상공까지 날아가 폭탄을 던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고심 끝에 핵폭탄 운용 수단이 다양할수록 좋고, 그 외 대규모 재래식 폭격처럼 여전히 폭격기가 담당할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계속해서 전력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같은 고민을 하던 소련도 미국이 전력 유지를 결정한 이상 대응 전력을 계속 갖춰야 했다.
소련은 B-29를 무단 복제한 Tu-4를 시작으로 Tu-16, Tu-95 등을 연이어 선보이며 폭격기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지만 격차는 여전히 컸다. 비록 폭격기를 폭격기로 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실은 냉전 시기에 동구권을 이끄는 초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미국이 B-52를 후속할 XB-70 개발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소련은 조속히 대항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1972년, 소련은 35톤 이상의 무장을 장착하고 최대 마하 2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호위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대륙 간을 횡단하여 적진에 침투도 가능한 차세대 폭격기 사업을 개시했다. 이러한 구체적인 조건은 바로 직전인 1969년에 개발을 철회했던 XB-70과 이를 대신해서 새롭게 프로젝트를 시작한 B-1을 철저히 의식한 것이었다.
미야시스체프(Myasishchev)의 M-18, 수호이(Sukhoi)의 T-4 등이 참여한 경쟁에서 대형기 제작에 일가견이 있고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Tu-144을 만들어 내기도 한 투폴레프(Tupolev)의 제안이 선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걸작이 오늘날도 러시아의 주력 전략폭격기로 활약 중인 Tu-160 블랙잭(Black Jack)이다. 모든 것이 비밀스러웠던 냉전 시대였기에 Tu-160의 자세한 개발 과정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1981년 11월, 모스크바 인근의 라멘스코예(Ramenskoye)에 위치한 항공 시험 센터에 주기된 시제기가 미국의 첩보위성에 촬영되면서 Tu-160은 처음으로 외부에 존재를 드러냈다. 그런데 B-1을 연상시킬 만큼 모습이 유사했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카터 정부가 중단시킨 B-1의 개발을 새로 집권한 레이건 정부가 재개하기로 결정한 시점이었다. 때문에 공백 기간 동안 B-1의 기술이 유출되었다는 우려가 심각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자력 개발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전반적인 기체의 형태, 가변익 구조, 엔진의 배치 등은 B-1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Tu-160 정도의 폭격기는 설령 자세한 정보를 획득했더라도 거의 같은 시기에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무기가 아니다. 이는 한편으로 소련의 항공 기술력과 관련 인프라가 얼마나 대단하지 알려주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Tu-160은 1981년 12월에 초도 비행에 성공했고 이후 여러 실험과 개선을 거치면서 개발 당시에 요구된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1987년부터 배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때는 곪아있던 소련의 체제 모순으로 말미암아 경제 상황이 극도로 나빠진 때여서 양산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붕괴하며 방치되다시피 했다가 러시아의 경제가 회복한 후 개량을 거쳐 현재 핵심 전략폭격기로 활약 중이다.
Tu-160의 러시아 공군 운용장면 <출처: 유튜브>
특징
Tu-160은 현존 전략폭격기 중에서 최고, 최대라는 부문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종이다. 마하 2.05의 최고 속도는 어지간한 전투기와 맞먹는 수준인데, 라이벌인 B-1B의 마하 1.25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고속의 고고도 비행이 효율적인 침투 수단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면서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이런 빠른 비행 속도는 개발 당시에 철저히 마하 3의 XB-70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속으로 비행이 가능하지만 Tu-160은 라이벌인 B-1B처럼 저공으로 목표에 침투한다. 하지만 목표 위까지 직접 다가가 폭탄을 던질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주익이 고도와 속도에 따라 최적의 비행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20˚, 35˚, 65˚의 3단계로 움직이는 가변익 구조이나 그만큼 정비 요소가 많다. 기체가 전면이 좁고 각진 부분이 없는데다가 RAM도료를 칠하면 RCS가 상당히 작게 나오는 것으로 알려진다.
45톤의 내부 폭장 능력도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그만큼 덩치도 커서 Tu-160은 자체 중량이 가장 많이 나가는 폭격기이기도 하다. 강력한 사마라(Samara) NK-321 터보팬 엔진 4기를 장착한 덕분에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폭탄을 싣고 빠른 속도를 비행할 수 있다. 또한 최대 12,300km의 비행 거리는 이론적으로 소련 본토에서 지구상 어느 곳까지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는 수준이다.
운용현황
1987년, 제184폭격연대를 시작으로 실전 배치가 개시되었다. 1990년까지 100기를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운용상에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생산이 지연되고는 했다. 폭격기나 군함처럼 소량만 생산되는 고가의 무기는 드러난 문제점을 수시로 개선하며 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는 그다지 큰 문제로 삼기 어려웠다. 하지만 1991년에 있었던 소련의 붕괴는 Tu-160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개량은커녕 유지보수마저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고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던 19기의 귀속 문제를 놓고 마찰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박물관 전시용 1기를 제외한 전부를 1999년 러시아가 인수했고 이중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업그레이드해서 재배치했지만 16기에 불과했다. 이후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성능이 향상된 최신형 Tu-160M2가 제작되어 2018년 1월 초도 비행에 성공했고 추후 9기를 추가 생산해 배치할 예정이다.
Tu-160은 2018년 12월 10일에 2기가 베네수엘라에 배치된 것처럼 러시아가 대외에 무력을 과시할 때마다 좋은 수단이 되었다. 특히 NATO와 접한 북해나 발트해는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다. 실전은 2015년 11월 17일 시리아 내전에서 재래식 탄두를 장착한 Kh-101 순항미사일을 발사한 것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평했지만 정확한 전과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8년 12월 베네수엘라에 전진배치한 Tu-160의 모습 <출처: 유튜브>
한편 러시아 정부는 2018년 12월 10일 베네수엘라와 연합 군사훈련을 위해 Tu-160 블랙잭 폭격기 2대를 파견했다. Tu-160 편대는 1만km 거리를 중간기착 없이 13시간 비행하여 베네수엘라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은 10시간 동안 카리브해 상공을 비행하면서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