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5 이글 전투기 (사진은 가데나 공군기지의 F-15C 제공전투기) <출처: 미 공군>
F-X의 시작
미 공군은 1965년 4월 F-111 장거리 타격기와 F-4 팬텀II 전투기와는 별도로 제공 전투용 장거리 전투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F-111의 초도비행으로부터 불과 1년 만에 신형 장거리 제공전투기를 검토하게 된 것은 역시 F-111에게 공중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미 공군이 보유한 F-101 침공전투기를 대체하여 F-111 장거리 타격기를 엄호 호위하는 기체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전투기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공군은 F-4 전투기보다 더욱 뛰어난 중량 대 추력비를 가진 이상적인 공대공 전투기를 요구했다. 새로운 전투기의 무장으로는 F-4의 레이더와 적외선유도미사일 조합에서 개량된 버전이 제안되었다. 유럽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소련의 전투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모두 1천 대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막상 개념이 정리되고 의회에 의한 검토절차에 들어가자 의회는 미 공군 지휘부의 요청을 기각하고, 예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면서 2차적으로 공대지 능력을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까지 도입했던 F-4나 F-111 등 기종이 모두 공군만의 요구능력이 아니라 합동성을 감안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자신들에게 최적화된 전투기를 애타게 찾던 공군으로서는 맥나라마 장관의 합동성 요구에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공군은 1965년 12월 8일 F-X(차기 전투기)의 제안요구서(RFP)를 13개 업체에 발송했다. 여기에 8개 업체가 응신을 했고 1966년 3월 18일에 보잉, 록히드, 노스아메리칸 3개사를 선정하여 개념형성연구(Concept Formulation Study)사업을 수여했다. 한편 CFS 사업에 선정되지 못했지만 맥도넬 더글라스는 F-4의 사업책임자였던 돈 맬번(Don Malvern)을 중심으로 회사 차원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사업이 끝나자 공군은 각 사가 제시했던 CFS 제안설계를 모두 거부했다. 공대지 능력이 요구됨에 따라 기체의 공대공 능력이 너무도 떨어졌던 것도 이유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TFX 사업이 남긴 여파이었다. 여전히 업체들은 F-111을 탄생시킨 TFX 사업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가변익에 AIM-7 스패로우 4발, 신형 공격용 항법장비, 2.9톤이 넘는 기체를 추진할 강력한 터보팬 쌍발엔진의 설계에 집착했다.
새로운 바람
한편 초기 CFS사업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은 이후 F-X 사업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일련의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미 공군의 전투비행학교(Fighter Weapon School) 교관으로 '공중전 연구(Aerial Attack Study)'의 저자인 존 보이드(John R. Boyd) 소령이 조지아 공대(Georgia Technology College)와 에글린(Eglin) 공군기지에서 에너지 기동(Energy Manoeuverability)이론을 구체화시킨 일이었다. 그는 이 이론의 틀을 바탕으로 공군의 초기형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이용하여 다양한 상황, 고도, 중량, 그리고 대기속도에서 전투기들의 성능을 분석했다. 이 연구결과가 1964년 5월 발간되면서 엔지니어들에게 제안된 설계모델의 전투성능을 검증할 툴이 주어졌다.
에너지 기동이론을 적용하자 F-X의 방향성은 바뀌었다. 기존의 무게인 2.9톤에서 1.8톤으로 줄어들었고, 기체의 최고속도도 마하 2.7에서 마하 2.4로 좀더 실용적으로 조절되었다. 이에 따라 기체소재 면에서도 경제성을 추구할 수 있었고, 추력 대 중량비도 1:1로 정해졌다. 그러나 가변익 설계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한편 1967년 7월 모스크바 에어쇼에 돌연 MiG-23과 MiG-25, 그리고 Su-15 요격기가 예고 없이 소개되었다. 특히 MiG-25 폭스배트의 등장은 공군에게 기존 개념형성연구의 방향전환에 커다란 확신을 주었다. MiG-25는 XB-70 발키리(Valkyrie)나 SR-71 블랙버드(Blackbird) 정찰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마하 3의 성능을 추구했고, 1965년부터 1977년 사이 수많은 세계 비행기록을 갱신했다. 마치 MiG-15의 등장이 미군을 긴장시켰듯이 MiG-25의 등장도 미 공군에게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MiG-25가 등장한 덕분에 미 공군은 F-X 요구성능에서 공대지 소요를 줄이고 공중우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8월 11일 7개사에 입찰참여요청이 발행되었다. 새 입찰의 결과 맥도넬 더글라스와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선정되었고, 노스 아메리칸, 록히드, 페어차일드 리퍼블릭, 그루먼 4개사의 제안은 회사 스스로 연구를 진행하는 조건으로 포함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해군은 고질적인 중량초과를 해결하지 못한 F-111B형을 취소하면서 VF-X 사업을 통하여 새로운 함대방공전투기를 찾기로 결심했다.
이례적인 비행전 구매
해군이 사업을 취소하자 공군은 F-X사업을 하루라도 빨리 진행하고자 했다. 새로운 행정부가 들어서서 기존의 사업들을 검토하면서 국방예산에 손을 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F-X 사업을 진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공군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기존의 시제기 제작절차를 건너 뛰고, 기종을 선정한 후에 시제기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사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공군은 해군의 VF-X와는 다른 운용개념을 강조했는데, F-4에서처럼 비행사와 후방관제사로 구성된 복좌형으로 신 기종을 구상하는 해군과는 달리 공군은 단좌형 기체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F-X 개발개념서에 제시된 기체는 최종적인 쌍발엔진에 최고의 시야각을 보장하는 조종석, 내부연료 만으로도 260마일의 작전반경이 가능하고 기관총을 내장한 모델이었다. 한편 경량전투기의 옹호자였던 보이드 소령과 국방장관실 소속의 시스템 분석가 피에르 스프리(Pierre Sprey)는 가격 상승과 기술적 결함과 낮은 신뢰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설계를 피하고 더욱 단순하고 경량화된 전투기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특히 에너지 기동성 이론을 창시한 보이드는 무겁고 복잡한 초기의 F-X 사양으로는 목표한 비행성능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이러한 '전투기 마피아'들의 주장은 단가상승으로 일선급 전투기를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던 공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지적이었다.
공군은 전투기 마피아들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훗날 F-X 기종의 절반 가격으로 F-16을 도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추후의 일이고 당시로서 미 공군은 절실히 F-X를 필요로 했다. 전투기 마피아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긴 했어도 F-X 사업 자체의 추진은 더욱 가속되었다. 심지어는 아직 기동을 정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공군은 1968년 9월 12일 F-X 기종을 F-15로 명명했다.
한편 1968년 9월 30일 공군은 1967년 8월 입찰에 참가했던 7개사에 노스롭까지 더하여 모두 8개사에 제안요청서를 발송했다. 그러나 가장 초기부터 활발한 참가업체였던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초기에 제외되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개념정의단계 계약에서 선정된 업체는 노스 아메리칸, 페어차일드-힐러, 그리고 맥도넬 더글라스 3개사였다.
단련되는 독수리
F-15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 많은 능력이 요구되었다. 우선 공중급유 없이 미 본토에서 유럽전선까지 단번에 날아가 유럽 미 공군(USAFE)을 증원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쌍발엔진으로 최대 마하 2.5까지 비행이 가능할 것에 더하여, 최대 이륙중량은 4만 파운드(약 18톤), 기체수명은 최소 4천시간 이상이 요구되었다. 비행시간 당 정비인시(mmh/fh)는 11.3을 넘지 않도록 높은 신뢰성을 요구했는데, 항전장비에 운항정비 교환품목(LRU : Line Replacement Unit)을 적용함으로써 이 문제는 해결하고자 했다.(그러나 실제로 F-15A/B형에서는 32.3 mmh/fh에 이르렀다.) 베트남 전 당시 레이더의 잦은 문제발생으로 고장간 평균시간(MTBF; Mean Time Between Failures)이 길어서 재앙과도 같았던 정비소요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무장은 기본적으로 미사일 8발을 운용하는 것에 더하여 강력한 펄스도플러 레이더로 룩다운, 슛다운 능력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을 요구했다. 한편 보이드나 스프리 같은 전투마피아들의 의견도 반영하여, 이미 입증되어 위험성이 낮은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가격상승이나 체계통합 실패를 방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주요부품들은 이미 정부지원사업으로 개발되는 성과물을 채용하게 되었다. 한편 조종계통의 높은 신뢰성, 연료와 전기계통의 신뢰성, 그리고 구조통합성 등도 강조되었다. 베트남전의 경험으로 F-15에서는 전투시 생존성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F-15가 상대할 적기였다. 여전히 바르샤바 조약군의 주력기종은 높은 기동성을 자랑하는 MiG-21이었다. F-15는 기동성과 무장 그리고 전술면에서 수적 우세에 있는 MiG-21 전력을 제압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MiG-25처럼 빠른 비행속도를 자랑하는 최신예 기종에 대항하기 위해 뛰어난 장거리 레이더와 미사일을 장착해야만 했다. 결국 MiG-25를 떨쳐낼 수 있을만한 속도와 함께MiG-21 편대를 압도하는 기동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야만 했다.
F-15는 8발의 미사일을 장착하고 강력한 사통장치와 대서양 횡단에 필요한 충분한 연료를 탑재해야만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세워, 단발전투기를 요구하는 전투기 마피아들의 강력한 요구를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엔진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그 정도로 강력한 엔진은 아직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운 엔진을 개발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독수리에 날개와 엔진을 달다
벤자민 벨리스(Benjamin N. Bellis) 대령이 이끄는 기종선정평가위원회(Source Selection Evaluation Board)가 항공체계센터(Aeronautical Systems Center) 내에 구성되어 1969년 7월부터 12월까지 3개의 설계안을 검토했다. 그리고 1969년 12월 23일 맥도넬 더글라스의 설계안이 선정되어 F-15가 되었다.
F-15는 전작인 F-4와 거의 유사한 크기지만, 주익 면적이 F-4보다 더 넓었으므로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그러나 단순한 구조설계에 재질의 1/4 가량을 티타늄과 복합소재로 채택하여 F-4E 팬텀II에 비하여 무려 6천파운드(약 2.7톤)나 가벼워졌다. 내부구조나 장비는 동세대의 설계안에 비하여 다소 여유가 있게 설계되었다. 돈 맬번의 설계팀은 800여 개의 주익설계안 가운데 107개를 선정하여 풍동시험을 실시했다. 3개의 풍동시험장에서 무려 2만2천 시간 이상이나 풍동시험을 실시했는데, 이는 F-4의 주익개발보다 무려 3배나 긴 시간이었다.
F-15의 스핀 풍동실험 장면 <출처: 유튜브>
사실 F-15도 애초에는 VF-X처럼 가변익이 검토되었지만, 맥도넬 더글라스는 고정익을 고집했다. 주익은 전연후퇴각이 45도로 된 설계였는데, 이는 고속과 저속에서 모두 우수한 비행성능을 자랑하며, 실은 F-100부터 F-4에 이르기까지 전투기들에서 선호되던 주익형태이다. 넓은 주익을 채용하여 하중이 적게 걸림으로써 F-16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회전률을 가지게 되었으며, 구조강성도 높아서 F-4 팬텀II에 비하여 피로수명이 3배나 높아졌다.
그러나 엔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애프터버너 없이 5G 선회를 실시하고 마하 2.5까지 비행하며 공중급유 없이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 엔진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중량대 추력비를 1:1로 만들기 위해서는 엔진 한 개당 2만3천파운드(약 10톤)의 추력을 낼 수 있어야만 했다. 또한 연비를 생각하면 경량소재를 적용한 로우-바이패스 터보팬 엔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미 공군이 최초로 채택한 전술기체용 터보팬 엔진은 TF30였는데, 다년간 노하우가 쌓이면서 신뢰성이 높아진 최종형인 TF30-P-100이 F-111F 아드바크에 채용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터보팬 엔진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 스톨 현상이 자주발생했고, 미해군이 A-7A 코르세어II에 사용하던 TF30-P-6 엔진은 결구에는 롤스로이스/앨리슨의 TF41로 바뀌어 A-7D부터 적용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제적으로 준비에 나선 것은 프랫&휘트니(Pratt & Whitney)였다. 1968년 RFP가 나오자 P&W는 TF30과 J58엔진 등을 개발했던 코어(Richard J. Coar)와 베이슬러(R.T. Baseler) 등의 설계자를 투입하여, TF30보다 무게는 약 1천 파운드(450kg)가 가벼우면서도 연료소비율은 비슷하되 추력은 5천파운드(2.27톤)가 더해진 신형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편 GE(General Electric)는 F-15와 F-14에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엔진을 제안했지만, F-14 개발사업이 비용상승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불리한 위치가 되었다. 결국 1970년 2월 27일, P&W가 엔진사업자로 선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YF100 터보팬 시제엔진(추후 제식명 F100)이 만들어졌다.
F-15 이글의 초도비행 영상 <출처: 유튜브>
독수리, 날아오르다
이외에도 F-15가 해결해야할 기술적 난제들은 많았다. 일례가 기관포였다. 미사일 만능주의로 전투기에서 기관포를 제거했다가 월남전에서 호되게 당한 미군은, 실제 공중전에서 사용빈도가 많건 적건 기관포는 필수무장으로 장착하기로 했다. F-15에서는 AIM-82A 도그파이트 미사일과 AIM-7F 스패로 개량형, 그리고 GAU-7 25mm 기관포가 무장으로 계획됐다. GAU-7은 기존의 M61 20mm 개틀링 기관포를 대체하기 위하여 개발되었으며, 탄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야심차게도 탄두내장형 탄약(telescoped ammunition)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3년 9월까지 무려 1억불의 비용을 투입하면서 개발했지만 성과가 시원치 않자 미 공군은 추가개발을 취소시켜버렸고, 결국 F-15는 다시 M61A1 기관포를 사용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건 레이더였다. 미군은 이미 F-4E에 APQ-120 레이더를 채용함으로써 룩다운, 슛다운 능력을 가진 펄스도플러 레이더를 실전배치했다. F-15에서는 더욱 탐지거리가 늘어나고 동시교전능력이 향상된 APG-63 레이더가 개발되었는데, APG-63은 원래 미 해군의 F-14A용 레이더로 개발되던 AWG-9의 기술을 활용하여 개발비용과 시간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APG-63은 이후 개량이 거듭되어 IFF 신호가 없이도 적기여부를 탐지하는 NCTR(Non-Cooperative Target Recognition) 기능을 1980년대에 들어 포함시켰고, 지상매핑 모드를 활용하여 정밀 폭격까지도 지원할 수 있도록 개량을 거듭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F-15는 미 공군의 절박한 도입스케쥴에 맞춰 시험평가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두 20대의 선행양산기체가 만들어졌는데, 12대가 제작사 초기시험평가(카테고리 I)에, 나머지 8대는 전술공군 합동평가단과 공군체계사령부에 배치되어 카테고리 II 시험평가에 투입되었다. 선행양산1호기(F1, 기체번호 71-280)가 1972년 7월 27일 초도비행에 성공한 이후, F1부터 F10와 TF-1/2 등 선행양산기체들이 제작사 시험평가를 시작했다. 시험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F2 기체는 엔진 테스트용, F3 기체는 레이더 장착시험용, F4 기체는 구조시험용, F5 기체는 M61 기관총과 외부장착 연료탱크의 시험평가용, F6는 레이더와 무장통제시스템 평가용, F7은 외부무장평가용, F8은 연료체계 조정 및 스핀회복시험용으로, F9은 기체 및 엔진 성능평가용, F10은 레이더·항전장비·TEWS(Tactical Electronic Warfare System) 평가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제작사의 카테고리 I 시험평가가 끝난 이후 1974년 3월 14일부터 공군은 카테고리 II 시험평가를 시작했다. 시험평가의 결과 수정사항은 23개에 불과했으며, 내부 배선의 변경이나 볼트의 재설계 등 대부분 작은 변경에 머물렀다. 그러나 F100엔진은 비록 시험평가기준을 통과하긴 했지만 아직 충분히 기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이후 F-15 초기형의 약점으로 남을 터였다. 그럼에도 시험평가를 마친 조종사들은 F-15가 미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과 가속력을 갖춘 기체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974년 11월 14일 카테고리 II 시험평가가 종료됨과 동시에, 베트남전에서 가장 적기를 많이 격추시킨 전투기 운용제대인 제555 전투비행대대가 F-15를 최초로 배치받는 부대가 되었다. 1975년 3월부터는 공군 시험평가센터(AFTEC)에서 카테고리 III 시험평가가 시작되어 넬리스 공군기지의 제422 시험평가비행대대가 후속시험평가를 실시했다. 1976년 6월 23일 루크 공군기지에서 제4461 전술전투훈련대대가 창설됨으로써, F-15 이글은 드디어 본격적인 실전배치가 시작되었다. F-15의 전설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F-15 소개영상 <출처: 유튜브>
저자 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쳐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을 공부했다. 중동지역에서 군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아덴만 지역에서 대(對)해적 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요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수석연구위원 겸 WMD 대응센터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학에서 대테러실무를 가르치며, 합참·방위사업청,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 연재인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기도 하다. From: Web, 출처/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kr 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