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만에 돌아온 명품 '산수도' 그린 이는 누구?입력 2017.12.01.
기존 소장 '산수도'와 쌍둥이처럼 닮아
양팽손 작품 여부 놓고 학계선 논란
500년 만에 이산가족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일본 수장가와 협상을 벌여 16세기 명품그림인 <산수도>를 환수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작품은 가로세로 88.7×56.7㎝의 종이에 먼 산과 강을 배경으로 화면 오른쪽에 기괴한 암봉과 소나무 언덕 풍경을 아련하게 그린 수묵화다. 화폭 위쪽에 유려한 글씨로 4언시를 쓰고 붉은 인장도 찍었다. 지난해 11~12월 일본 나라현 야마토문화관의 전시 ‘조선의 회화와 공예’에 선보이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 뒤 환수 여론이 일자, 박물관이 올봄 현지 수장가한테서 억대의 거액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이 그림에 관심이 집중되는 건 국내에 희귀한 조선 초 명품산수화인데다, 박물관에 쌍둥이처럼 닮은 동시대 <산수도>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박물관 소장 <산수도>는 1916년 이왕가미술관(국립박물관 전신)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기증한 작품으로 암봉과 바위의 방향이 화면 왼쪽에 쏠린 것만 다를 뿐 소재·화법·글씨체·인장까지 빼닮았다. 박물관 쪽이 두 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종이 지질도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상 한 병풍에서 짝을 이룬, 같은 작가 그림으로 판명된 셈이다. 박물관 쪽은 12월8일 재개관하는 서화실 전시에 두 <산수도>를 나란히 비교 전시할 예정이다.
두 그림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동안 두 <산수도>는 15~16세기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1482~1519)의 지인이던 문인 학포 양팽손(1488~1545)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학포는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8년간 전라도 화순에 은둔했고,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은 뒤 주검을 거둔 인물이다. 글씨에 능했지만, 화가로 활동했다는 당대 기록은 없다. 그의 그림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동국문헌론>에 나오는 게 유일하다.
환수된 <산수도>는 일본 전시도록에 양팽손 작품으로, 박물관 소장품에는 양팽손이 그렸다고 전한다는 뜻의 ‘전칭작’으로 표기돼 있다. <산수도>가 양팽손 작품이란 인식이 굳어진 건 일제가 <조선고적도보>에 작품을 실으면서 ‘전(傳) 양팽손 작’으로 표기한 것이 해방 뒤에도 관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국회화대관>(1969)은 양팽손 작으로 단정했고, 국립박물관의 ‘한국미술오천년전’(1975) 등에서도 이런 인식을 따라가다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국보전’에서 이원복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관이 이견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표면화됐다.
현재 국내 학계에선 대체로 양팽손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환수품과 박물관 소장품에 같이 찍힌 인장은 양팽손이 소장했다는 뜻의 ‘양팽손장’(梁彭孫藏)으로 판독되는데, 똑같은 인장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윤두서의 대작 <심산지록> 등 18세기 화가들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양팽손 인장이라면, 200년 뒤 사람인 윤두서의 작품에 찍힐 리 없다. 화폭에 적은 시구의 글씨체도 조선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사가인 홍선표 전 이화여대 교수는 “이렇게 뛰어난 산수도를 남길 정도면 화가로 활동한 기록이 보여야 하는데 없다”며 “조선 초 사대부들이 고도의 기법을 요구하는 화원풍 그림을 기피한 관행을 감안하면 학포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야마토문화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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