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송

I Really Don't Want To Know - Eddy Arnold

바래미나 2017. 4. 25. 10:02

I Really Don't Want To Know - Eddy Arnold


I Really Don't Want To Know - Eddy Arnold

How many arms have held you
and hated to let you go?
How many, how many, I wonder,
But I really don"t want to know.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껴안았는지
그래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지는 않아요


How many lips have kissed you
and set your soul aglow?
How many, how many, I wonder,
But I really don"t want to know.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키스를 하여
당신의 영혼에 불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지는 않아요


So always make me wonder
always make me guess.
And even if I ask you,
darlin" don"t confess.

그런데 말만 그렇게 할 뿐
전 항상 더욱 더 궁금해요
항상 저는 알고 싶답니다
그렇지만 만일 제가 당신에게 묻는다 해도
고백하시지 말고


Just let it remain your secret
But darli" I love you so.
No wonder, no wonder I wonder.
Though I really don"t want to know.

그냥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니까요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정말로 알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해놓고도
이러는 제 자신이 말입니다.

  

Eddy Arnold 에디 아놀드

생년월일:1918.5.15 

국적:미국 테네시

에디는 테네시의 한 농장에서 성장하였으며, 당시 청춘 스타이던 빙 크로스비나 진 오트리 같은 가수를 존경했다. 40년대에 그는 가수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Pory)에 등장했다. 쇼의 담당자였던 조지 헤이는 에디에게 닉네임이 필요하다고생각하여 에디는 ‘테네시 시골 Em기’로 불려졌다. 에디는 1945년엔 RCA 레코드사와 계약했다. 이 무렵 콜로넬 톰 파커(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와 만나 두 사람은 매우 친숙해졌다. 그때부터 톰 파커는 애디의 개익적인 매니저가 되었다. 초기 “Eddy Arnold Years" 8년 동안 그는 <Cattle Call>, <Any Time>, <Benquet of Roses>등 컨트리 히트를 기록했다.


첫 번째 중요한 TV출연은 1949년 밀턴 벌의 쇼 프로에서 이루어졌다. 톰 파커와 에디는 1953년에 헤어졌으나 1964년 다시 만났다. 이 때는 에디가 새로운 매니저 제리 퍼셀을 만나 에디의 가수 생에 중에 초기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때이다. 1965년 에디는 퍼셀에게 그가 티미 유로 레코드에서 들었던 <Make the World Go Away>라는 곡을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그 곡을 녹음하여 싱글로 발매했는데, 보기좋게 톱 10에 올랐다. 에디가 1954년 이래로 녹음한 모든 곡들중에서 그는 <I Really Don't Want to Know>가 그의 애창곡이라고 말한다. 에디는 그의 부인과 함께 내쉬빌에 거주하면서 RCA에서 녹음하며 전국 각지의 TV및 콘서트에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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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 뮤직은 촌사람들의 음악, 시골음악이란 뜻이지만 대중음악분야에서는 구체적으로 미국 백인들의 전통음악을 말한다. 20세기 100년 동안 미국 백인들이 주도한 음악으로는 '스탠더드 팝'과 본래는 흑인 연주음악이나 백인들이 더 강세를 보인 '재즈'가 있다. 하지만 두 음악은 결코 민초들의 구전(口傳)에 의한 음악 이를테면 민요라고 할 수 없다.
스탠더드 팝과 재즈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이주민들 가운데서 공식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았거나 클래식 음악의 연주경험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반면 컨트리 뮤직은 백인 이주민들 가운데 하층계급이나 민초들에 의해 미국이란 새로운 환경에 맞춰 정착된 것이다. 말하자면 백인민요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컨트리 뮤직은 미국 흑인민요인 블루스와 인종적으로 정반대에 위치한다.
18세기에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이주해온 궁핍한 백인들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부의 대도시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로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 주변에 모여 살았고 따라서 컨트리는 처음에는 유럽에서 그들이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친숙한 노래'(familiar tunes) 또는 산(山)지역사람들의 노래라고 해서 '마운틴 뮤직'(mountain music)으로 통했다. 아무래도 현악(string)밴드의 성격이 강했던 컨트리의 주요악기가 피들, 하프, 루트(옛 기타) 등 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의 토속악기라는 것도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증거가 될 것이다. 나중에는 여기에 밴조, 도브로(기타의 일종), 만돌린, 그리고 스틸 기타가 더해져 오늘날의 특징적인 컨트리 음악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민초들의 바이올린이라고 할 수 있는 피들(fiddle)은 빠르게 줄을 켜면서 컨트리 특유의 흥을 내며, 역기 컨트리 음악에서 자주 들리는 '우는 듯한' 기타소리는 앉아서 연주하는 좌판형의 스틸 기타(steel guitar)의 몫이다. '두 악기가 없다면 컨트리도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피들과 스틸 기타는 요즘에도 컨트리 사운드의 색깔을 띠는데 필수적인 악기로 통한다. 한국에서 컨트리는 어떠한가. 지금은 컨트리 색채가 있는 음악을 좀처럼 듣지 않으려고 하지만 과거에는 가요의 맹주역할을 했다. 그만큼 컨트리는 국내 가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포크시대였다는 1970년대에도 통기타로 연주되었을 뿐 실은 포크보다도 컨트리 스타일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조영남이 불러 유명한 '내 고향 충청도', 윤항기의 '노래하는 곳에', 서수남 하청일의 '서울 구경'은 모두 미국 컨트리 송을 번안해 부른 노래였다. 트위스트로 알려진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의 전주도 피들이 주도하는 컨트리음악 형식을 취하고 있을 정도다. 가요관계자들은 "포크는 단순한 가사의 나열로 멜로디가 부각되지 않는 반면 컨트리는 경쾌하고 낭만적인 선율패턴과 리듬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훨씬 한국인의 정서에 맞았다"고 설명하고있다.


시대를 풍미했던 컨트리가 국내에서 맥이 끊긴 것은 1980년대 이후 헤비메탈과 랩의 강세 때문이었다. 청취자들의 귀가 강하게 바뀌어버린 것이다. 또한 신세대들은 컨트리 음악이 너무 미국적이며 기성세대의 케케묵은 소리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실정이다. 지금처럼 흑인음악 힙합과 팝 댄스가 판치는 상황에서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컨트리가 부활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컨트리가 기성세대의 젊었던 시절을 지배한 음악임을 감안하면 컨트리를 넘지 않고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음악문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컨트리 음악은 실로 지금의 댄스와 발라드가 왜 인기를 누리고있는가를 역으로 살펴볼 수 있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