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物 巡禮
寶物 383호 敦化門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寶物 384호 弘化門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건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寶物 810호 景福宮 慈慶殿十長生 굴뚝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寶物 811 景福宮 峨嵋山의굴뚝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寶物 809호 景福宮 慈慶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寶物 812호 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寶物 813호 昌德宮 仁政門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寶物 814호 昌德宮 宣政殿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寶物 816호 昌德宮 大造殿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寶物 818호 昌慶宮 通明殿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寶物 819호 德壽宮의中化殿 및 中化門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寶物 820호 德壽宮 咸寧殿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寶物 385호 明政殿 同廻廊및明政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광해군 시절 다시 지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인데,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을 하였다.
寶物 821호 宗廟 永寧殿
종묘는 조선시대 왕·왕비·공신 등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 중 영녕전은 종묘의 일부로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영녕전을 짓게 된 동기는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세종 3년(1421)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지은 것으로,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寶物 386호 玉泉橋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이 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2개를 이어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寶物 141호 서울 文廟
서울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이 역시 임진왜란으로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寶物 142호 서울 東廟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寶物177호 서울 社稷檀 正門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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