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는 서쪽으로 독일과 접한 유틀란트 반도, 동쪽으로 셸란(Zealand), 퓐(Funen), 롤란(Lolland) 등의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일은 제170사단이 유틀란트 반도 양측 해안가를 따라 병행 진격하고 제198사단이 외부와 연결된 요지를 신속히 점거하여 동쪽의 섬들을 고립시키기로 계획했다. 덴마크를 점령하는 데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없었지만 특이한 점은 실전에서 사상 최초로 공수부대 투입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 독일의 덴마크 침공 계획도. 셸란 섬과 올보르에 공수부대 팔슈름야거를 투입하여 길목을 차단함과 동시에 진공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출처: (cc) Realismadder at Wikimedia.org>
독일이 우선 탈취할 목표로 정한 곳은 비행장이 위치한 유틀란트 북부의 올보르(Aalborg)로, 수도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 섬과 발트 해를 제압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침공과 동시에 독일의 공수부대인 팔슈름야거(Fallschirmjäger)가 투입되어 요충지를 선점하고 지상군 본진이 올 때까지 사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덴마크는 처음부터 단지 노르웨이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예정된 곳이어서 최대한 빨리 점령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1940년 4월 9일 02시에 현지 주재 독일 대사가 덴마크 정부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예상되는 침략으로부터 귀국을 보호해 줄 독일의 군사 행동이 05시에 개시될 것’임을 통보했다. 한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명분을 내세운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섬에 상륙할 침공군은 그 이전에 이미 배에 타고 출항한 상태였고 지상 국경 일대에는 모든 준비를 마친 육군이 대기 중에 있었다.
- ▲ 베저 강 훈련 작전을 통해 사상 최초로 공수부대가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진은 작전 첫날인 4월 9일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을 점령한 팔슈름야거 대원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05시, 낙하산으로 강하한 96명의 팔슈름야거가 셸란 섬 초입의 스토르스트룀(Storstrøm) 교량을 점거한 것을 시작으로 독일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마치 소풍 가듯 유유자적하게 국경을 넘었고 일부 부대는 총을 등에 멘 채 자전거를 타고 일렬로 진격하기까지 했다. 국경 일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덴마크군이 비상 대기하고 있었지만 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항복 대신 항전을 택했다
터무니없는 독일의 도발에 덴마크 정부는 분노했지만 항전을 계속한다면 많은 희생을 야기할 것이 확실했기에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과 협상을 벌인 후 곧바로 항복했다. 전쟁 개시 6시간 만이었는데, 이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있었던 모든 전역을 통틀어 가장 빨리 총성이 멈춘 사례였다. 외세에 쉽게 굴복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당시 독일과 덴마크의 국력이나 군사력을 비교한다면 저항은 무의미할 수 있었다.
- ▲ 덴마크 도심으로 진입하는 독일군 정찰 장갑차.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기력하게 굴복했다고 해서 덴마크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경 인근 룬드토프트페르그(Lundtoftbjerg), 포케루프(Hokkerup) 등에서 개전 초기에 작지만 격렬한 전투들이 벌어졌다. 덴마크군은 16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했지만 이들의 강력한 저항에 걸린 독일군은 전차 4대, 장갑차 12대가 격파당하고 덴마크의 6배가 넘는 20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최전선의 병사들은 정부의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열심히 싸웠다. 그들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고 도망간 것도 아니었다. 일부 지휘관들은 하달된 항복 지시가 잘못된 것이라 판단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다가 부대를 이끌고 스웨덴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령 정부가 항전을 택했다 해도 전쟁의 결과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 ▲ 도시 외곽에서 20mm 마드센 대전차포로 경계 중인 덴마크군. 정부의 명령이 하달되기 전까지 독일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덴마크는 항복을 택했기에 1943년 여름까지 여타 점령국에 비해 많은 자치를 누렸지만 저항 의식까지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국왕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X)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군복을 입고 산책하는 모습을 일부러 국민들에게 보이며 용기를 심어주었다.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의 폭풍에 휘말려든 약소국 군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반면 그의 친동생인 호콘 7세(Haakon VII)가 국왕으로 있던 노르웨이의 대응은 달랐다. 그들은 항전을 선택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노르웨이를 단지 전략적 우위의 확보를 위해 선점할 곳으로만 취급하고 함대를 출동시켰던 독일과 영국은 마침내 베저 강 훈련 작전 실시 하루 전인 4월 8일 10시경, 노르웨이 중부 남소스(Namsos) 인근 해역에서 조우하면서 최초의 해전을 벌였다. 독일 함대를 이끌던 순양함 히페르(Hipper) 제독호가 기뢰 부설 작업을 펼치던 영국 구축함 글로웜(Glowworm)을 격침시키면서 전쟁이 개시되었다.
- ▲ 기뢰 부설 작업 중 공격을 받고 침몰한 영국 해군 구축함 글로웜. 하지만 격침되기 전에 독일 순양함 히페르 제독호를 들이받는 놀라운 용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노르웨이와 아무 관련도 없는 싸움이었다. 독일은 침공이 목적이었지만 영국도 노르웨이를 도우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독일의 수송로를 차단하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글로웜은 격침되는 긴박한 상황에도 고속으로 항진해 히페르를 들이받아 측면을 손상시키는 용맹함을 발휘했다. 노르웨이 전역에서 앞으로 독일 해군이 겪어야 할 참담한 운명의 서곡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본격적인 독일의 침공은 4월 9일 새벽, 오슬로 공항과 스타방에르(Stavanger) 공항에 팔슈름야거가 기습적으로 강하하면서 시작되었다. 독일군 상륙 방해에 나설 영국 해군을 염두에 둔다면 제공권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수비대가 없는 비행장을 팔슈름야거들이 점령하고 난 직후 독일 본토에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연이어 이동 전개를 완료하자 노르웨이 하늘은 순식간에 독일의 앞마당이 되었다.
- ▲ 독일 공군이 오슬로 공항을 점거한 직후의 모습. 독일은 이로써 노르웨이 일대의 제공권을 개전 당일에 장악하였다. <출처: Bundesarchiv>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고도 무려 7개월간 서부전선에서 잠잠한 상태로 있었으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알았다면 이전에 세워둔 R4 계획에 따라 지상군을 파견할 의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 선수를 빼앗기면서 영국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상륙은커녕 해상에서 작전을 벌이기조차 어려웠다. 결국 포브스 제독은 노르웨이 연안에서의 독일군 차단 시도를 포기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사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항공모함이다. 정작 영국은 항공모함을 제일 먼저 만든 나라였으면서도 그동안 함재기의 육성을 게을리한 나머지 독일 공군의 최신식 전투기를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노르웨이를 포기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마침 지난 겨울전쟁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를 도우려고 4,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가 소련과 핀란드가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철수를 준비 중인 상태였다. 두 나라는 이들을 우선 노르웨이 방어전에 투입하기로 했다.
- ▲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를 돕기 위해 파병된 노르웨이 의용군. 영국과 프랑스도 의용군 형식을 빌려 핀란드에 소수의 병력을 파병하였는데 이들을 우선 노르웨이 방어전에 투입하였다.
어려움에 처한 노르웨이의 입장에서 이들은 상당히 고마운 존재였지만 현실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엄밀히 말해 이들, 특히 영국은 노르웨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상황이었다. 만일 노르웨이의 지정학적 위치가 자신들의 안보와 무관했다면 연합군이 개입할 일도, 독일이 침공할 일도 없었다. 물론 노르웨이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한 달 후인 1940년 5월 10일, 영국은 독일의 북대서양 진출을 차단하고 영연방국인 캐나다, 향후 동맹을 고려 중인 미국과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중립국 아이슬란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강압적인 통치와 제국주의적 수탈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목적으로만 따진다면 노르웨이, 덴마크를 침공한 독일과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어떻게든 전쟁에서 이기려는 강대국에게 약소국의 주권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 ▲ 방어전을 준비하는 영국군과 노르웨이군. 독일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노르웨이는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제 가장 위협적인 대상으로 여겼던 영국 해군의 접근을 독일 공군이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자 침공군은 유유자적하게 상륙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R4 계획에 따라 영국, 프랑스 지상군이 노르웨이를 돕기 위해 이동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도착하기 이전까지는 노르웨이 혼자서 버텨야 했다. 노르웨이는 더 이상 중립국이 아니었고 이제 독일의 침공을 받은 이상 당연히 침략자를 격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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