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모차르트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B장조, K.207

바래미나 2016. 1. 22. 01:01

모차르트 /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B장조, K.207



Violin Concerto No.1 in Bb major, K.207

모차르트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Iona Brown, violin & cond.

ASMF(The Academy of St. Martin-in-the Fields)

 

Takako Nishizaki, violin

Johannes Wildner, cond.

Capella Istropolitana

전 악장 이어듣기

 

David Oistrakh, violin &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Anne-Sophie Mutter, violin

Camerata Salzburg

I. Allegro moderato 

David Oistrakh, violin &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2. Adagio

David Oistrakh, violin &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Anne-Sophie Mutter, violin

Camerata Salzburg


3. Presto

 

이 곡은 19세때 1번부터 5번까지 5곡을 1775년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동안 초 스피드로 만든 곡으로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적 스타일로 만든 곡이라 한다.

 

언젠가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모르긴해도 제 바이올린 솜씨는 유럽 최고일거에요"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아버지 레오폴트는 점잖게 다독거린다. "너 스스로는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법을 모르고 있지. 알고 싶으면 자신을 믿고 전력투구해서 연주해야 한다. 혼과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래, 맞아. 마치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이야".

 

어쨌거나 젊은 볼프강은 바이올린 곡을 작곡할 때만은 자신이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생각했다. 그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탄테 작품으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위대한 작품인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론도 C장조, 아다지오 E장조, 그리고 그의 작품으로 확증된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6번, 7번 협주곡은 진작 여부가 확실치 않음)을 우선 들 수 있다. 그외에도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콘체르토네" ('대 협주곡'이라는 의미)가 하나, 그리고 많은 다악장 세레나데와 카사치온 작품들을 남겼다. 협주곡들이 작곡된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단지 모차르트가 직접 독주 파트를 연주했다는 점만은 확실한 사실로 자리잡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다른 연주자가 연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1777년 모차르트의 뒤를 이어 잘츠부르크 궁정 오케스트라 악장이 된 안토니오 브루네티(Antonio Brunetti)나 잘츠부르크의 또다른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안톤 콜프(Johann Anton Kolb)가 연주했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1775년 4월에서 12월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협주곡 1번 자필 악보의 필체를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보다 대강 2년 정도 전에 작곡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1773년 5월 작곡된 콘체르토네와 같은 시기에 씌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 B플랫 장조 협주곡에서 협주곡 양식을 구사하고 있는 모차르트의 조숙함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모차르트는 이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을 다소간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네개의 다른 협주곡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던 프랑스 론도, 혹은 "롱도(rondeau)" 형식을 쓰고 있는 점과는 다른 것이다. 아울러 곡 전체를 마무리할 때 곡이 끝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상투적 공식을 사용하지 않고 보다 부드러운 말로 살짝 끝낸다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3번 협주곡부터이다. B플랫 장조의 협주곡은 3,4,5번에 비해 선율적 개성이 약하긴 하지만 작곡술에서는 결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1악장의 음향은 2번의 1악장보다 훨씬 모차르트 답다고 할 수 있다 (2번은 친구이면서 선생이기도 했던 하이든의 양식, 즉 조금은 뻣뻣한 듯한 유사 바로크 양식으로 되돌아간다).

 

독주(솔로) 파트는 바이올린적인 조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B플랫 장조의 흐름 안에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별로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의 다른 협주곡들에서도 모두 해당된다. 모차르트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는 기술적 어려움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언젠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쓴 이 귀절이 그 핵심이다. 그는 열 일곱살 나이에 벌써 음악적 도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베토벤 같은 대가도 30대가 되어서야 완전히 알게되었던 점이다. 모차르트는 이 문제를 젊음의 매력과 넘치는 선율적 재능으로 해결한다. 무심하게 생각없이 지나쳐버리는 청자는 얼마나 자주 교묘하게 이런 해결에 도달하고 있는지 알 수 가 없다.

 

협주곡은 본질상 일종의 드라마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기원을 살펴보면 성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나오게 된다. 협주곡도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음악적인 힘을 서로 다른 크기와 재료로 구성된 부분들로 나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즉, 한 사람 이상의 독주자와 대, 소 규모의 오케스트라 파트로 나눈다는 점이다. 이런 분할로 인해 나타나는 원리는 개인과 대중 사이에서 성격들이 서로 대립, 대조를 이루면서 구체화 된다. 진정한 협주곡이라면 대조를 구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대조를 전체의 형식과 표현 성격의 토대로 이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기교의 과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이 분명해진다. 개인(독주자)이 어떻게 전체 대중(?襤聆?전체)을 지배할 수 있는가. 고함을 질러서 대중의 소리를 압도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육체적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대신 최고의 행동으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해야 한다. 그 행동은 대중은 본질상 감히 엄두도 못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한가지 방법은 개성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적어도 서구 문명에서 개성의 표현은 집단의 복합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것보다 즐겨 등장했으며, 보편적인 관심이기도 했다. 이런 개인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데 익숙치 않은 전통을 지닌 다른 사회들은 협주곡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를들어 인도 음악에는 전형적인 서양의 협주곡에 어울리는 진정한 고전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주자가 발휘할 수 있는 또다른 수단은 그의 기교를 과시하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독주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협주곡에서 기술의 과시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 과도하게 추구되어서는 안된다. 기교의 요구 정도는 해당 작품에서 오케스트라가 발휘하는 복잡성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요구되는 기술이 베토벤이나 브람스 협주곡에서보다 그 정도가 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던 당시의 오케스트라에서는 플루트와 오보에 파트를 동일한 연주자가 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로카텔리(18세기의 파가니니로 통하는 인물)가 협주곡을 썼을 때 독주곡에서는 즐겨 사용했던 써커스같은 비르투오조의 기교를 버리고 대신 참된 예술적 정신의 기예를 발휘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협주곡에서는 독주자의 지위를 확립하는 방법은 센세이셔널하며 무감각한 묘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정도의 기술적 자기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케스트라라는 통합체와는 대조적으로 개인적 성격, 즉 개성을 시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처리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히 주제와 조성의 배치법이다. 모차르트는 어린 나이에 이런 처리법에 통달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당대 어느 작곡가보다도 뛰어나다.

 

한편 오페라 작곡가로 깊은 신념과 감각을 지니고 있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 같은 작곡가도 클라리넷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귀여운 곡을 몇곡 쓴바 있다. 그러나 그의 곡은 독주자가 어느 순간, 왜 연주해야하고 연주하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게 해주지 못한다. 사실 이 곡들을 듣는 청자들은 도대체 클라리넷이 솔로 악기인지조차도 헷갈릴 경우가 있다. 베버의 클라리넷 콘체르티노 op.26에서는 클라리넷 독주자가 방금 연주했던 부분을 호른이 맡아서 의기양양하게 끝내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음악의 전체 흐름이 저해될 정도이다.

 

모차르트의 선배 작곡가들 가운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협주곡 형식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많은 이탈리아 대가들도 협주곡에 공헌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협주곡 형식은 이전의 정적인 리토르넬로 원리(오케스트라의 합주가 계속 반복 출현하며 그 중간 중간 독주자가 독주부분을 연주하는 형식)와 보다 동적인 소나타 원리(여기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조성이 발전부 후의 재현부에서 하나의 조성으로 화해한다)와 혼합된다. 이 두 방법이 혼합되어 나온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의 고전파 협주곡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이었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고전파 초기에 이 협주곡을 시도하여 공헌하였고, 모차르트는 직접 그의 협주곡을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바흐의 협주곡 서법은 정확하고 공감을 주지만 협주곡의 잠재적인 시적 능력과 극적인 능력을 깊이있게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내재된 인간적 가능성이야말로 많은 청중들을 끌게된 원동력이었고, 그것은 또한 위대한 협주곡의 감동적 드라마를 낳게 하였다. 모차르트는 처음부터 그런 가능성을 느꼈으며, 그것을 충족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모차르트 협주곡이 갖는 모든 개별적인 특징들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얻어진 것이다. 1주제와 2주제, 2중제시부 등과 같은 기술적인 세부 사항에 집착하여 나온 것이 아니다. 모차르트는 교과서에 실린 이런 소나타 형식과 협주곡의 관습적인 도식을 전혀몰랐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치 않다. 그런 용어들은 매우 다양한 그의 실제 음악과 모차르트 후배 작곡가들의 음악들을 일반화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멀고 적절치 못하다.

 

충분히 성숙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최초의 작품은 G장조 협주곡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도식적 규정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곡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느린 악장의 순수한 선율적 균형과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의 다섯개의 협주곡 가운데서 모차르트는 처음으로 유일하게 오보에 주자들이 그들이 불던 악기 대신 한 쌍의 플루트를 불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어지는 D장조와 A장조의 협주곡들은 3번 협주곡만큼 친근한 매력은 없지만 스케일면에서는 두 작품 모두 장대하다. 마지막 악장은 모두 론도로 되어 있다. 이들은 대조적인 속도 가운데서 광대한 영역에 걸쳐 악상을 펼쳐보인다. D장조에는 지그와 가보트가 나오며, A장조에는 '터어키' 협주곡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그림같은 부분이 출현한다.

1776년 안토니오 브루네티가 이 작품을 연주했을 때 모차르트는 느린 악장을 E장조의 아다지오 K.261로 대치했던 것으로 보인다.(이 아다지오 악장 역시 플루트가 오보에를 대신하고 있다) 5년뒤 브루네티의 빈 연주를 위해서는 론도 C장조 K.373을 썼다. 이 곡의 알레그레토 그라지오소라는 속도는 편안하게 흐르는 곡의 성격을 아주 적절하게 나타낸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플랫 장조는 여러가지 면에서 위의 협주곡들과 매우 다르다. 이 작품은 1779년 잘츠부르크에서 씌어졌다. 이곡을 쓸 때 모차르트 나이가 23살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곡 첫 부분의 현저하게 대조적인 액센트에서 이미 이 작품의 지닌 사고의 엄청난 폭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독주자나 다수의 연주자를 위한 작품에서 흔히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모차르트는 카덴차를 직접 썼다. 카덴차는 정서적 분위기를 더욱더 고조,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단조의 안단테에서 그러한데, 이전 작품, 피아노 협주곡 K.271 느린 악장에서의 강렬한 표출 충동을 더욱 더 심화 시키고 있다. 이어지는 론도 소나타 형식의 피날레 악장은 광대하며 변화 무쌍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감동의 세계를 넘어 활기차며 우아하며 햇살이 비치는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도 드라마는 사라지지 않고 은근히 숨어있는 것이다. (역: 김방현)

 

'협주곡'을 지칭하는 영어 (불어, 이태리어)의 'concerto' (독어: Konzert)라는 용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두 단어가 음악 학자들 간에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concertare이며 '경쟁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경쟁'은 스포츠적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미, 즉 여러 가지의 음향 매체가 마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동일한 음악적 사고 (Idee)를 공동으로 실현한다는 의미에서의 경쟁이다. 다른 하나는 conserere이며 '서로 결합한다'의 뜻을 가진다. 여기에서는 두 악기군이 서로 어우러져 대조와 조화를 이루면서 음악적 진행을 수행한다고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중의 어느 단어로부터 'concerto' (Konzert)가 유래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실정이다. 모차르트는 총 23편의 피아노 협주곡, 5편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다수의 목관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파곳, 호른)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바이올린 협주곡 5편은 1775년 한 햇동안 자신의 연주를 위해 작곡된 것이며, 오늘날 여전히 자주 연주되고 애호 되는 작품들이지만, 음악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적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찾아진다.

 

아르튀르 그뤼미오 (Arthur Grumiaux 1921~ 1986)

 1921년 3월 21일 벨기에 에노주(州)의 샤를루아(Charleroi) 근교에서 태어났다.
샤를루아음악원과 벨기에 왕립음악원(Royal conservatories)을 거쳐 파리음악
원의 조르주 에네스코(Georges Enesco)에서 수학하였다. 1939년 비외탕상
(Vieuxtemps Prize)을 수상하였고 1년 뒤에는 벨기에 정부에서 수여하는 프리
드 비르튀오지테(Prix de Virtuosite:훌륭한 연주상의 뜻)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1940년 브뤼셀에서 데뷔한 직후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함에 따라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45년 활동을 재개하여 그해에 런던에 데뷔하였고 곧
유럽과 미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1949년에는 스승이었던 알프레드 뒤부아
(Alfred Dubois)의 뒤를 이어 브뤼셀음악원(Brussels Conservatory)의 교수가 되었다.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모짜르트. 짧은 나이로 많은 걸작품을
남긴 천재 작곡가이다. 4세때 이미 들은 곡을 칠 수 있을 정도였고
7세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출판, 11세엔 비엔나서 황제의 명으로 오페라를
작곡, 22세때부터 비엔나에 정주하면서 1,000 여곡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고전주의 음악가로 내용과 형식을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