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좋은 이야기-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바래미나 2015. 8. 7. 04:37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당신을 생각하면서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 해 몸을 묶고 싶었다

래서, 내 몸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부러져나갔다 


- 겨울 나무 / 김혜순





이마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바람이 지나가고
머리카락이 눈썹을 건드립니다
언제 머리를 잘랐더라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머리카락이 막 눈썹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그만큼 지나갔음을 압니다
그리고 소년처럼 즐거움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 훅 불어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불량스런 모양도 흉내냅니다
그렇게 얼마쯤은 이마를 흔들면서 그 느낌을 즐기기도 하다가
그 느낌까지 시들해지면 머리를 자르러 가게 됩니다
자른 머리가 자라나 눈썹을 건드리는 그 시간의 흐름만큼 자연스레,
그리고 그 머리카락이 눈썹을 간지럽히는 불편한 즐거움만큼
당신은 있는 듯 없는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그만큼 내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 푸른 이마 / 장석남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 가을 / 조병화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 놓았나
윗 눈꺼풀과 아랫 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성차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 놓았나
흰 낮과 검은 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 당신의 첫 / 김혜순





씨앗은 땅을 나오면서 고개를 가웃거린다

온몸 물음표가 되어 푸른 질문을 던진다

대답 못하는 당신 향해 아나, 쑥떡을 먹인다

그리고는 마녀처럼 머리를 반으로 나누어

작 짝 짝 신나게 박수를 친다

당신이 박수 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소매 안에서 슬쩍 비둘기를 꺼내 날리는 마술사처럼

새싹은 손바닥 안에서 스윽 꽃대를 뽑아올린다

당신이 한 눈 파는 사이,

씨앗은 햇빛과 바람과 물을 흙에 잘 버무려

웃음 같은 얼굴 하나 당신 코앞에 들이민다

잘 보셨나요? 그럼 이만 안녕, 안녕,

내년에 또오 하며 씨앗이

제 향기를 뭉텅 잘라 허공에 던지고 간다


- 푸른 마술사 / 양희순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다시,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나는 집을 나온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 신경림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순간의, 그 꿈꾸는 듯한 속도에 실려 출렁이는
저 푸른 돛배의 계절을 보셨나요 가을이거나
또 다른 겨울의 틈새, 간혹 눈 내리는 초겨울
탁구공 같은 우주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흘러가거나 멈추는 것들의 영원, 
그 매 순간의 황홀하고도 무거운 영원 속에서
수십 장의 나뭇잎들이 몸 뒤척일 때마다
푸른 돛배로 바뀌는 신비를 보았나요
촛불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푸른 돛배
그대 무심히 내뿜는 담배 연기 속의 푸른 돛배
그 푸른 돛배가 황금의 노을로 사라질 때까지
눈감지 못하는 그대 눈동자 속의 푸른 돛배
그대 눈동자 뒤편에서 출렁이는,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가볍고도 아름다운 그 동그란 공기 속에서
가기도 잘도 가는
푸른 돛배 한 척


- 푸른 돛배 / 박정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듯이 안 보일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 푸른 것만이 아니다 / 천상병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 번짐 / 장석남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몸을 떤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도 후회 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를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 육교를 건너며 / 김정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방문객 / 정현종





사랑아,
너는 항상 행복해서만은 안 된다
마른 가지 끝에 하늬 바람불어
푸르게 열린 하늘,
그 하늘을 보기 위해선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굽이쳐 흐르는 강,
분분한 낙화,
먼 산등성에 외로 서 문득 뒤돌아보
늙은 사슴의 맑은 눈,
달더냐,
수밀도 고운 살 속 눈먼 한마리 벌레처럼
붉은 입술을 하고서 사랑아,
아른 아른 피던 봄 안개는,
여름내 쩡쩡 울던 먹구름 속의 천둥은
이미 지평선 너머 사라졌는데
하늬 바람 불어
푸르게 열리는 그 하늘을 위해선 사랑아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 푸르른 하늘을 위하여 / 오세영





우리는 매일 표절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 표절 / 김경미





짧은 한평생이라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구나

안경알을 닦으면
희미하게 생각나는
지난 일들

가다가 가다가 서글퍼
주저앉으면
안경알 저쪽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짧은 희망

다시 가다가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 한 세상 / 박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