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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사천 종사랑파 선조행적|(從)榮州順興沙川(영주순흥사천)

바래미나 2015. 4. 6. 19:30

영주 사천 종사랑파 선조행적|(從)榮州順興沙川(영주순흥사천)

돈암 서한정이 15세기 중반 무렵에 영주로 들어온 이래, 이 집안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과거 합격자와 문중 학자 및 처사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돈암이 세운 처사적 풍모를 가풍으로 계승한 바탕 위에서, 다시 이상정(李象靖)・정종로(鄭宗魯)・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권연하(權璉夏)・이만도(李晩燾) 등 주로 호파(虎派) 계열의 주요 학자들에게 나아가 예학(禮學)과 심학(心學) 등 퇴계학의 본령으로 거슬러 갔다.

이들은 사마시 입격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족보를 편찬하고, 선대를 모신 서원을 건립하고, 선대의 문집을 간행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문중적, 사회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또한 인근의 단계서원과 소수서원의 강임(講任)을 맡아 유생들을 지도하고, 서원 일을 경영하는 등 지역의 교육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음이 주목된다.


서한정(徐翰廷)

1407년(태종7)~1490년(성종21)

호 돈암(遯菴). 생원(生員) 균(均)의 아들. 좌사간(左司諫) 충(衷)의 증손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청도군사(淸道郡事) 사민(士敏)의 손자. 생원시에 입격함.

공은 김응조(金應祖)가 편찬한 ������영주지(榮州誌)������에서는 “청조탁행(淸操卓行)”으로, 다른 본에서는 “낙선지행(樂善砥行 : 선(善)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음)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중되었다.”고 일컬어짐.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거상(居喪)에 있어 예법(禮法)을 준수하면서도 슬픔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함. 밤낮으로 단정하게 앉아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였음.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세상의 영리(榮利)에 마음을 쓰지 않았음.

좌사간을 지냈던 공의 증조 충은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다가 언론 사건에 연좌된 이후에 다시 출사(出仕)하지 않고 대구(大丘) 화원현(花園縣)의 마이산(馬耳山) 아래로 물러난 바 있었음. 후에 공은 사마시에 입격하기는 하였으나, 세조(世祖)가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대과(大科) 공부를 포기하고, 증조가 터를 잡은 대구로부터 처자를 거느리고 영주의 한성동(漢城洞 : 영주의 산이촌(山伊村), 곧 이산)으로 들어와 두문불출하며 세상사를 단념함.(공은 영주에 거주하던 참군(參軍) 손권(孫權)의 딸, 곧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정도복(鄭道復)의 외손과 결혼한 인연이 있음)

그러다가 다시 순흥 등강촌(登岡(登崗)村 : 당시로는 순흥부의 남쪽 죽계(竹溪)의 하류에 있던 궐봉(蕨峯)의 동쪽 촌락임. 운림(雲林)과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짐. 원래 이름은 등영(登瀛)이었으나, 공이 등강(登岡 혹은 登崗)으로 고침)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살 곳을 마련하고, 스스로 “돈암(遯菴)”이라고 불렀다고 함.

공은 등강촌에 신거(新居)를 마련하고 시를 짓기를,


    人說登岡合遯居   남들이 등강촌은 숨어 살기에 참 좋다고 하는데

    暮年新搆數間廬   늘그막에 이곳에 몇 칸 오두막 얽었네.

    春深僻巷人來少   깊은 봄 궁벽한 동네에 찾아오는 이 드무니

    遲日明窓坐看書   긴 해 밝은 창가에 앉아 책을 보노라.


라고 하였고, 또


    時事如今不欲言   세상일은 이젠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

    安身何處別區存   어느 곳에 몸 편안히 쉴 별구(別區) 있느뇨.

    擇仁晩卜幽棲地   인리(仁里) 가려 늘그막에 그윽한 곳에 깃들고 보니

    擧世咸稱孝子村   온 세상 사람들이 효자촌이라 일컫는다네.


라고 하였음.

회봉(檜峰) 권득평(權得平)이 공에게 증여한 시에서는 “맑은 표치는 백이(伯夷)의 반열에 못지않구나.[淸標不讓伯夷班]”라고 하였음.

������돈암선생일집(遯菴先生逸集)������이 간행되었음.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遯菴集序」를 짓고, 9세손 창재(昌載)가 「家狀」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遯菴徐公墓誌銘」을,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遯菴徐公墓碣銘」을 찬함. 이밖에 이헌경(李獻慶)이 「登岡記」를 지음. 특히 김홍(金㙆)은 ������上蔡相國濟恭������을 지어, 조정으로부터 차질 없이 공의 행적에 대한 포상이 내려질 수 있도록 청원하였음.

구고서원(九皐書院)에 모셔지고, 후에 절의(節義)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음.


서진(徐震)

1457년(세조3)~1551년(명종6).

돈암(遯菴) 한정(翰廷)의 아들. 종사랑(從仕郞) 참봉(參奉)을 지냄.


서호(徐浩)

?~1550년(명종5)

자 청지(淸之). 참봉(參奉) 진(震)의 아들.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음.

공은 훌륭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졌음.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죽계지(竹溪志)������에서 공을 비롯한 고을 선비 30여 인을 꼽으며 이르기를 “(앞에 열거한 30인은) 모두 즐거이 선(善)을 행하고 불의(不義)를 수치스럽게 여겼으니, 고을의 풍속이 후해지게 되었다.”라고 칭술하였음.


서치(徐治)

?~?

초명은 혼(渾). 자 국평(國平). 참봉(參奉) 진(震)의 아들. 공은 부장(部將)을 지내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음.


서명세(徐名世)

?~?

자 달부(達夫).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 호(浩)의 아들. 돈암(遯菴)의 증손. 공은 참봉(參奉)을 지냈고, 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음. 사후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음.


서덕일(徐德一)

?~?

자 수부(秀夫). 부장(部將) 치(治)의 아들. 돈암(遯菴)의 증손. 장사랑(將仕郞) 참봉(參奉)을 지냄.


서천일(徐千一)

1532년(중종27)~1597년(선조30)

자는 응회(應會). 초자(初字)는 희우(希遇). 호 동원(東園). 부장(部將) 치(治)의 아들. 돈암(遯菴)의 증손. 공은 30세가 되던 1561년(명종16)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하였음.

공은 처음 순흥(당시에는 풍기)에서 태어났다가, 장성하여서는 예안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였으니, 이는 공의 췌향(贅鄕 : 처가)임.

공은 재주가 특출하여 문사(文詞)가 일찍부터 성취되었음. 또한 당대의 명사(名士)들과 더불어 교분이 깊었고, 그들과 창수(唱酬)한 시가 많은데, 특히 공의 과거 합격 동기생이었던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이 차운하여 공에게 부친 시에 이르기를,


    雲外多雲岑外岑   구름 너머에 또 구름 많고 첩첩이 산이네만

    雲岑何礙十年心   구름과 산이 어찌 우리 십년의 마음 막아서랴!

    孔顔樂處須尋得   공자, 안자가 즐긴 바를 연구해야 하니

    莫轍生平日日尋   평생토록 날마다 공부 쉬지 말게나.


라고 권면하였음. 특히 퇴계(退溪)가 금난수(琴蘭秀)에게 준 편지에 “백지(白紙)를 보내었으니, 서(徐) 아무개와 나눠 쓰는 게 어떠하겠는가? 마침 종이가 부족하여 각각 따로 보낼 수 없으니 한스럽네.”라고 할 만큼, 공을 생각하고 배려하였음.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여러 차례 장의(掌議)에 임명되기도 함. 임진왜란 때에 일향(一鄕)이 의병을 일으키고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자, 공은 조목(趙穆)・금난수・이숙량(李叔樑)・김부륜(金富倫) 등과 함께 각각 미곡(米穀)을 갖추어서 군량 조달에 이바지함. 후에 김부륜이 통방회(通榜會)를 열어 술자리를 갖추고 공을 부르니, 공은 여기에 참석하여 시를 읊어서 난후(亂後)의 감회를 표현하였음.

이용구(李龍九)가 「東園先生徐公墓碣銘」을 찬함.


서태(徐兌)

?~?

자 사열(士說). 참봉(參奉) 명세(名世)의 아들. 장사랑(將仕郞)을 지냄.


서량(徐亮)

1564년(명종19)~1656년(효종7).

자 사신(士信). 호 시시당(是是堂). 참봉(參奉) 명세(名世)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받음.

공은 학식과 훌륭한 행실이 있었음. 공이 일찍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었을 때에, 거재(居齋)하던 유생들이 취한대(翠寒臺)에서 방탕하게 놀고 있자, 공이 “바위는 비록 말을 하지 않으나, 경자(敬字)는 아직 그대로 있다.[巖雖不言, 敬字猶存]”는 8자를 손수 써서 보이니, 제생들이 감복하였다고 하였음.


서광(徐光)

?~?

자 여휘(汝輝). 참봉(參奉) 덕일(德一)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하고,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고 함.


서긍(徐兢)

?~?

자 근보(謹甫). 동원(東園) 천일(千一)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고, 참봉(參奉)을 지냈다고 함.


서신(徐兟)

1573년(선조6)~1653년(효종4).

자 진보(晋甫). 호 화산(華山). 동원(東園) 천일(千一)의 아들. 공은 광해군 때에 이이첨 등 대북(大北) 정권에 가담하여 상소를 통해 폐모론(廢母論)을 적극 지지하였다가, 반정 이후 위리안치형을 받았음. 공의 이러한 행적으로 말미암아, 특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공의 손자 인룡(仁龍) 계(系)가 인정반정 이후에 뿔뿔이 흩어져, 그 자손들의 분계(分系)를 상세히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

그러나 공의 필법(筆法)만큼은 당대에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 초절(超絶)하였음.


서후행(徐後行)

1595년(선조28)~1671년(현종12)

자 백순(伯順). 호 동고(東皐). 시시당(是是堂) 량(亮)의 아들. 돈암(遯菴)의 6세손.

공은 일찍이 문단(文壇)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모두 12번이나 향시(鄕試)에 입격하기도 하였음. 또한 행의(行義)가 드러나서 향리(鄕里)의 모범이 되었다고 함.

공이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러 갔을 때에, 두 동생 후득(後得)・후종(後從)과 함께 모두 초시에 입격하여 복시(覆試)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은 자들은 모두 뜻을 이루던 형편이었으나, 공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이이첨을 한 번 만나볼 것을 권하는 자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과거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곧장 귀향하였음. 후에 이이첨이 패사(敗事)하였고, 사주를 받아 권하던 자도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어 가게 되었는데, 그가 도리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지경이었음. 또한 군(郡)의 아전배들도 “행실에 돈독한 군자를 알려 하거든, 서(徐) 공의 행동을 보라.”고 할 만큼, 독실한 군자로 칭송받았다고 함.

만년에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는데, 장랑(長廊)을 설치하여 이들을 늘 거처하게 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운집하였고, 학업을 성취한 자도 많았다고 함.

특히 공은 순흥부의 복설(復設)을 청원하는 소(疏)를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음.

현손(玄孫)인 창재(昌載)가 「處士東皐徐公墓誌」를 찬함.


서후득(徐後得)

1599년(선조32)~1659년(효종10)

자 중선(仲先). 시시당(是是堂) 량(亮)의 아들. 선교랑(宣敎郞).

공은 효성과 우애를 갖추었고, 도량이 넓어서 아주 어린 나이에도 큰 뜻을 품었다고 함. 조금 성장하여 배움에 힘을 쏟아, 서사(書史)에 박통하였는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불리(不利)하였음.

큰 형님과 함께 서울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권문(權門)에 빌붙은 한 종인(宗人)이 공의 형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공의 형제는 이를 준엄하게 배척하고,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돌아옴. 그러자 그 종친이 고을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사천(沙川)의 조카들이 나를 원수처럼 미워하니, 정말로 모기가 철우(鐵牛)에게 달려들고 비가 연잎을 치는 격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나, 끝내 무사하였음.

공은 평생 검약함을 지키고, 또한 마땅한지를 미리 따져서 남이 주는 물품을 받았으므로 구차하지 않았음. 창락찰방(昌樂察訪) 이유원(李惟源)은 평소 공과 잘 지내온 사람이었는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갈 때에 공에게 관용(官用) 물품과 지속(紙束)을 보내주니, 공은 다만 지속(紙束)을 받고 나머지 관용 물품은 모조리 돌려보냈다고 함. 공은 사람들을 성심껏 대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잘 구호하여 주었음.

손자 성구(聖耈)가 「王考宣敎郞府君遺狀」을 찬함.


서후종(徐後從)

1610년(광해군2)~1674년(현종15).

자 계선(季先). 호 사주(沙洲). 시시당(是是堂) 량(亮)의 아들.

공이 약관 때에 병자호란을 당하게 되자, 시를 지어 이르기를 “晋時日月今猶在, 捃拾淸風臥北窓”이라 하며 존주(尊周) 의식을 표출하고, 평생 일개 처사(處士)로서 생을 마쳤다고 함. 공은 1638년(인조16) 무렵 소백산 아래에서 우거(寓居)하던 화당(化堂) 신민일(申敏一)과 교유하여, 신민일이 「浮石寺次徐生後從韻」을 짓기도 함.

유고가 있음.


서령(徐玲)

1620년(광해군12)~1670년(현종11).

자 차진(次珍). 후장(後長)의 아들. 생부는 후치(後穉). 장사랑(將仕郞) 태(兌)의 손자. 선무랑(宣務郞)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를 지냄.


서숙(徐琡)

1628년(인조6)~1698년(숙종24)

자 숙옥(叔玉). 후에 이름을 숙(璹)으로 바꾸고, 자를 수옥(壽玉)으로 바꿈. 호 기암(寄菴). 선교랑(宣敎郞) 후득(後得)의 아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할 뿐만 아니라,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에 이미 문예(文藝)가 칭술되었다고 함.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공이 지은 「하득신동부(賀得神童賦)」를 고시(考試)하였는데, “이 글을 지은 자도 또한 신동(神童)이로다.”라고 하였음. 또 공의 나이 17세 때에 「누관책(樓觀策)」을 지어 한성별시(漢城別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고관(考官)이 같은 고을 출신의 어린 응시자라고 의심하여 공을 3위로 하였다고 함. 그 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와 경시(京試)에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는 불리(不利)하였음.

공은 이로부터 과거의 성패를 운명으로 돌리고, 문을 닫아걸고 단정히 앉아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였음. 공은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봉양하였고,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예(禮)와 슬픔을 지극히 하였음. 또한 공이 서울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 있던 친구가 벼슬하지 못하던 공의 형편을 애석하게 여겨, 인사 부서에 공을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도록 하였으나, 공은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만류하고 내려왔음.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정직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이나 일의 시비를 함부로 말하지 않았음. 공은 만년에 아름다운 산수를 매우 좋아하여, 바위가 둘러쳐진 으늑한 곳으로 옮겨 살고, 당(堂)을 “야일당(野逸堂)”, 대(臺)를 “관란대(觀瀾臺)”라고 명명하여, 노닐면서 시를 읊는 곳으로 삼았음. 또 ‘생(生)은 기(寄)이다.[生寄也]’라는 말에서 뜻을 취하여 기암(寄菴)이라는 호를 지음.

공은 평소 생업을 돌보는 데에 힘쓰지 않았으나, 소수서원 등 유궁(儒宮)을 경영하는 데에는 온 정성을 쏟아서, 기울어지고 무너진 건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서원의 규모가 잡히도록 하였음. 이에 안홍정(安弘靖)이 시를 짓기를 “신재옹께서 품은 천년 장수(藏修)의 뜻을, 영남의 높은 선비가 어기지 않고 전하였네.[愼翁千載藏修意, 高士南州不負傳]”라고 하였음.

공의 아들인 성구(聖耈)가 「先考處士府君遺狀」을 찬함.


서찬(徐璨)

1633년(인조11)~1691년(숙종17).

자 덕옥(德玉). 동고(東皐) 후행(後行)의 아들. 공은 훌륭한 행실이 있어, 사림(士林)의 추중을 받았다고 함.


서완(徐琓)

초명은 경(璟). 자 완옥(完玉). 초자(初字)는 경옥(景玉). 사주(沙洲) 후종(後從)의 아들. 생부는 후득(後得).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음.


서천석(徐天錫)

1639년(인조17)~1714년(숙종40).

자 하숙(嘏叔). 무(珷)의 아들. 호군(護軍)을 지냄.


서천운(徐天運)

1656년(효종7)~1742년(영조18).

자 형숙(亨叔). 호 청학당(聽鶴堂). 나은(懶隱) 위(瑋)의 아들. 공은 특히 효성과 우애로 널리 알려졌음.


서성구(徐聖耈)

1663년(현종4)~1735년(영조11).

자 희언(希彦). 호 눌헌(訥軒). 선교랑(宣敎郞) 후득(後得)의 손자이자, 기암(寄菴) 서숙(徐琡)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함.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함. 6, 7세에 이미 향학(向學)에 뜻을 독실하게 하여, 비록 다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책상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함. 공은 증광(增廣) 진사시에 입격하고서도, 그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욱 분발하여 공부하였으나, 문과(文科)에서는 불리(不利)하였음.

공은 서법(書法)에 더욱 장기(長技)가 있어, 소년 시절부터 이미 기위(奇偉)한 대자(大字) 글씨를 썼고, 특히 초서는 당대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니,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공의 글씨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듯이 하였다고 함.

그러나 공은 이러한 재주로 이름을 이루고자 하지 않고, 침식을 잊어가며 역학(易學)에 잠심하였음. 또 이수(理數) 공부에 있어 스스로 터득한 바를 기록하여 「학리도설(學理圖說)」이라 명명하였음.(이에 대해서는 김도화(金道和)의 「학리도설서(學理圖說序)」를 참조할 것.) 만년에는 고금(古今) 제현(諸賢)들이 사례(四禮)에 대해 논한 것을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의례논변(疑禮論辨)」이라 하였음.

만년에 공은 정침(正寢) 동쪽에 작은 서재를 지어 ‘눌헌(訥軒)’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는 선산(先山)이 눌곡(訥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선대에 대한 추모의 정을 깃들이기 위함이었음. 또 집 옆에 있던 긴 둑에 송죽(松竹)을 죽 심어놓고, 다시 그 위에 대(臺)를 만들어 ‘세한대(歲寒臺)’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가한 날 산책하면서 시를 읊었음. 늘 좌우의 곁에 성현(聖賢)의 잠계(箴戒)를 비치하였고, 손수 “친척돈목(親族敦睦), 형제담락(兄弟湛樂)” 등의 말을 써서 벽 위에 걸어놓고 늘 보면서 행실을 닦는 준칙으로 삼았다고 함.

후진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힘을 써서 공의 문하에서 재주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많았는데, 공은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설강(設講)하곤 하였음. 공은 위의(威儀)가 특출하였기 때문에, 수령인 신필하(申弼夏)가 그러한 공을 보고 향약(鄕約)을 시행할 때에 공을 도약정(都約正)으로 삼기도 하였음.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서울 사람이 공의 행동거지와 논의를 보고 “내가 서울의 위인(偉人)들이 많음을 보았지만, 일찍이 이러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고 함.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해 순흥에 의병진이 결성됨에, 공은 황수익(黃壽益) 등과 더불어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임명되었음.

공이 돌아간 후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몸을 다스림이 청렴(淸廉)하고, 행실이 구차스럽지 아니하며, 조심하고 삼갔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하며, 평생토록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또한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곧 일세(一世)의 공변된 말이다.”라고 하였음.

문집이 간행됨. 족손(族孫) 창재(昌載)가 「進士訥軒徐公行狀」을 찬함.


서엽(徐曄)

?~?

돈암(遯菴) 한정(翰廷)의 8세손. 공은 덕성(德性)이 진순(眞醇)하고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성취되었다고 함. 무신란(戊申亂)에 대응하기 위해 순흥에 의병진이 결성되자, 공은 안하징(安夏徵) 등과 더불어 유사(有司)로 임명되었음.


서정구(徐鼎耉)

1669년(현종10)~1736년(영조12).

자 태언(台彦). 호 죽은(竹隱). 통덕랑(通德郞) 완(琓)의 아들. 송은(松隱) 명구(命耈)의 동생.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 호(浩)의 후손. 생원시에 입격함.

공은 천품이 강직하고 방정하였으며, 의리(義理)에 따라 독실하게 실천하여, 사류(士流)의 추중을 받았다고 함. 공은 무신란(戊申亂)에 대응하기 위해 순흥에 의병진이 설치되자, 류이관(柳以觀)과 더불어 관량도총(管糧都摠)을 맡았음.


서준(徐晙)

1672년(현종13)~1763년(영조39).

자 숙경(夙卿). 호 고암(皐菴). 청학당(聽鶴堂) 천운(天運)의 아들. 공은 문사(文辭)가 전아(典雅)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받았음. 족후손(族後孫)인 상탁(相鐸)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함.


서창(徐昶)

?~?

돈암(遯菴) 한정(翰廷)의 8세손. 공은 몸과 행실을 잘 닦았으며, 일찍부터 시명(詩名)이 났다고 함.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진이 순흥에 결성되자, 공은 기패관(旗牌官)을 맡았음.


서만유(徐萬維)

1680년(숙종6)~1739년(영조15).

초명은 황(晃). 자 여장(汝張). 호 동활재(童豁齋). 송은(松隱) 명구(命耈)의 아들. 죽은(竹隱) 정구(鼎耉)의 조카. 생원시에 입격함.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하여 순흥에 의병진이 구성됨에, 공은 박경지(朴敬祉) 등과 더불어 서기(書記)에 임명되었음.

교관(敎官) 김서일(金瑞一)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하였고, ������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 강좌(江左) 권만(權萬), 석문(石門) 장후상(張后相), 월포(月浦) 이인보(李仁溥) 등이 재명(齋銘)을 지었다고 하였음.


서지달(徐志達)

1684년(숙종10)~1739년(영조15).

초명은 익래(益來). 일명 익번(益蕃). 자 선칙(善則). 천익(天翼)의 아들. 동고(東皐) 후행(後行)의 증손. 공은 증광(增廣) 생원시에 입격하였음.


서만희(徐萬禧)

1693년(숙종19)~1753년(영조29).

자 백휴(伯休). 호 우암(愚庵). 눌헌(訥軒) 성구(聖耈)의 아들. 공은 예(禮)로써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다고 함.


서창섭(徐昌燮)

1714년(숙종40)~1782년(정조6).

초명은 창호(昌鎬). 자 보경(輔卿). 호 죽수(竹水). 우암(愚庵) 만희(萬禧)의 아들. 유고가 있음.


서창재(徐昌載)

1726년(영조2)~1781(정조5).

자 상보(尙甫). 호 오산(梧山). 엽(曄)의 아들. 내자시정(內資寺正) 연(兗)의 후손.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오하여, 7세 때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을 배울 때 능히 글자마다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 10세 때 이웃 마을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자리가 벌어져 온 동네가 시끄러웠으나, 공은 단정히 앉아 태연하게 독서를 하니, 공의 부친이 “너만은 어째서 가서 구경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공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 그 경사를 이룰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하게 남의 영화를 부러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함.

15세가 되어 ������상서(尙書)������를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의 집전(集傳) 부분에 이르러서 윗사람이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공은 방에 단정히 앉아 침식을 잊어가며 연구하여 마침내 밝게 이해하였고, ������역경(易經)������은 스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능히 대의(大義)를 이해하였다고 함. 또한 음양(陰陽)・복서(卜筮)・병진(兵陣)의 학설도 폭넓게 공부하여 모두 그 귀결점을 이해하였음.

약관에 되어, 공령문을 공부하여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이후 37세 무렵에는 완전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및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취하여 잠심하여 쉼 없이 연구하였음. 공은 권구연(權九淵)・홍준(洪遵)・권정운(權正運)・배시진(裴是袗) 등과 같은 고을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서로 강마(講磨)하였고, 이상정(李象靖)과는 누차 만나고 또 많은 서신을 왕복하였음.

공은 유생들이 단계서원(丹溪書院)에서 거재(居齋)할 때에 훈장(訓長)으로 추대되어 유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 계발시켜 주었으며, 다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좌에 나가서 경전을 토론하니, 원근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 매우 많았음.

공은 만년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주정(主靜)”이라고 명명하고, 좌우에 퇴계(退溪)의 유묵을 걸고 책상에 성현(聖賢)의 글을 놓아두고 항상 완미하였으며, 글 가운데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깊이 사색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음.

또한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더욱 힘을 써서 여러 해 동안 연구하면서, 「중용질의(中庸質疑)」를 저술하기도 하였고, ������수학계몽(數學啓蒙)������의 주석을 연구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풀어서 자질(子姪)들에게 보이기도 하였음.

또한 예서(禮書)에도 유의하여, ������가례(家禮)������의 편목을 나누고, 송대(宋代) 명현으로부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들의 변론에 이르기까지 뜻을 다해 수집하여 내・외편을 만들었음.(곧 ������가례집해(家禮輯解)������임. 후에 여기서 관례 부분이 ������관례고정(冠禮考定)������으로 출간되었음.)

문집이 간행됨. 이상정이 「梧山處士徐公行狀」을 찬하고, 채제공이 「處士徐公墓誌銘」을 찬함.


서창경(徐昌鏡)

1726년(영조2)~1799년(정조23).

자 정보(正甫). 호 사천(沙川). 생원(生員) 만유(萬維)의 아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음.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독실하여, 책을 읽고 글자를 묻는 일 외에는 반드시 부친께 여쭈고 나서 행동을 결정하였음. 아버지 만유가 그런 공을 평하기를 “이 아이의 자성(資性)은 스승을 따라 학문을 해낼 수 있겠다.”고 함. 14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을 때에, 관 앞에서 호곡하고 애통해 하기를 충심으로 하였다가, 며칠이 지나자 혼절하기도 하였음.

같이 놀던 이웃 아이가 가난하여 겨울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못되었는데, 공이 새로 지은 겨울옷을 벗어주니, 공의 어머니가 헌옷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자, “저는 옷이 해지면 고쳐도 되지만, 저 아이는 고칠 방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였다고 함.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더욱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잘 미루어 체득하여 모심. 공이 노년에 모상(母喪)을 당하자, 여름에도 상복을 벗거나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옷을 두껍게 껴입거나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지 않았음.

공은 평소에 ‘장경(莊敬)’을 위주로 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이 마음을 부지런히 경계시켜서 늘 깨어 있고 어둡지 않게 하는 것이니, 곧 마음을 다스리는 제일의 공부이다.”라고 하고, 아울러 일상(日常)의 행위에서 실천하고 익숙하게 하는 공부를 강조하였음.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나, 1762년(영조38) 이후에는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이후 대나무, 국화, 파초(芭蕉)를 심어 뜻을 깃들였고, 봄가을 경치가 좋을 때는 산책을 하며 시를 읊조리면서 담박한 마음을 지녔음.

공의 선조이자 경태(景泰) 연간의 유일(遺逸)로 명성이 있던 돈암(遯菴)의 유사(遺事)를 공의 족형(族兄)인 오산(梧山) 창재(昌載)와 더불어 수집하고, 당세의 큰 학자에게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청하기도 함. 또한 ������문중전수록(門中傳守錄)������을 편집하여, 초기 조상들이 남긴 시와 뇌문(誄文) 및 관련된 읍지와 묘지의 기록을 모으고 일록(日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함.

공은 홀로 영월(寧越)에 들어가 금강정(錦江亭)과 청령포(淸泠浦) 사이를 주유(周遊)하면서 단종(端宗) 관련 유적지를 보고 돌아오기도 함.

공은 독서에 있어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고, 반드시 자구(字句)마다 정밀하게 공부하였음. 만년에는 대산(大山) 문하에 나아가 의례(疑禮)를 강론하였음.(������대산집������에 「答徐正甫昌鏡別紙」 등 논례(論禮)한 편지가 실려 있음) 또 박손경(朴孫慶)・유장원(柳長源)과 더불어 반복하여 고증하였음. 일찍이 거문고를 만들고는, 도잠(陶潛)의 ‘무현금(無絃琴)’의 뜻을 취하여 이를 “아금(啞琴)”이라 명명하며 회포를 달랬다고 함.

문집이 있음.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가 「處士徐公行錄」을 찬함.


서창열(徐昌說)

1733년(영조9)~1791년(정조15).

자 은경(殷卿). 호 대암(對巖). 생원(生員) 만유(萬維)의 아들. 공은 돈암(遯菴) 한정(翰廷)이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누차에 걸쳐 상언(上言)을 제출하여,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추증(追贈) 등의 은전이 내려지게 하였음.


서종윤(徐宗胤)

1740년(영조16)~1777년(정조1).

자 치승(穉承). 호 연사(烟沙). 창걸(昌傑)의 아들. 생부는 창현(昌鉉). 죽은(竹隱) 정구(鼎耉)의 증손.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서, 이미 압운(押韻)하여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함. 영조(英祖) 말년에 ������소학(小學)������을 중시하여 수령에게 명하여 친히 지방의 자제들을 권과(勸課)하도록 하였는데, 공은 늘 강석(講席)에 올라, 구두(句讀)와 문의(文義)를 모두 분명하게 하니, 강관(講官)이 칭탄해마지 않았다고 함.

10여 세에 ������주역총목(周易總目)������을 보고, 오산(梧山) 창재(昌載)에게 뜻을 가르쳐달라고 하였으나, 오산이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고 하며 청을 물리치자, 공은 며칠 동안 부지런히 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는데, 오산이 가르쳐 준 이외의 부분까지도 능히 스스로 이해하니, 오산이 크게 놀랐다고 함.

구사재(九思齋) 김낙행(金樂行)이 공의 과거 답안 1편을 보고 이르기를 “이러한 아이는 매우 기력(氣力)이 있으니, 다만 과유(科儒 : 과거 합격에만 몰두하는 유생)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고 함. 공은 주자서(朱子書)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일찍이 한두 번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하에 나아가 질의한 바가 있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창재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음.

공은 부형들과 함께 돈암공(遯菴公)의 행적을 드러내는 사업에 매진하고, 후에는 자제들의 재주에 따라서 그들을 부지런히 계몽하여 주었음.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점(曾點)의 뜻을 취하여 산수 그윽한 곳에 나아가 세상일을 잊고자 하는 마음을 피력하기도 하였음. 후에 창재와 더불어 서사(書舍)를 경영하여 동몽(童蒙)들을 훈육하는 곳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함.

정와(貞窩) 황룡한(黃龍漢)이 「亡友徐君行錄」을 찬하고,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이 「烟沙處士徐公墓誌銘」을 찬하였음.


서홍윤(徐弘胤)

1760년(영조36)~1826년(순조26).

자 의겸(毅兼). 호 초천(草川). 사천(沙川) 창경(昌鏡)의 아들. 돈암(遯菴)의 10세손.

공은 스스로를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다스렸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음.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됨.

공은 구고이사(九皐里社)의 등서루(登西樓)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의 완성을 담당하였음.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복례(喪服禮)에 관해서 질의하기도 하였음.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가 「輓徐毅兼弘胤」에서 이르기를,


    東南名勝盡飄零   영남의 원로들께서 모두 돌아가심에,

    瞻望沙川若曉星   사천(沙川)을 새벽별처럼 우러렀었지.

    養病十年多定力   10년 동안 양병(養病)하여 정력(定力) 많이 쌓였고

    傳家三世有遺經   3세 동안 대물림되어 옛 경전(經傳) 남아 있다네.

    自來蘊藉無塵累   본디 온화한 성품에 속된 때 없었고

    愈益謙恭見典刑   더욱 겸손하고 공경하니 전형(典刑) 보게 되었네.

    宿約梨亭如昨日   이점(梨店)에 정자(亭子) 짓자던 옛 약속 어제 같으니

    溪山依舊待人靑   계산(溪山)은 변함없이 반가운 낯빛으로 기다린다네.


라고 하였음.


서간발(徐榦發)

1774년(영조50)~1833년(순조33).

자 유상(幼祥). 호 남애(南厓). 복윤(福胤)의 아들. 생부는 연사(烟沙) 종윤(宗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인혜(仁惠)하고 총명함이 비범하였다고 함. 또한 평소 정아(靜雅)하면서도, 호기(豪氣)가 있었음. 4세 때에 생부를 잃게 되자, 오산(梧山) 창재(昌載)가 공을 거두어 길렀음.

약관 무렵에 양양(襄陽 : 예천의 옛 이름을 가리키는 듯함.)의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공부하면서,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의 유교(遺敎)를 들었으며,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 가은(稼隱) 성언근(成彦根)을 찾아뵙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았음.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에서는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불리(不利)하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1814년(순조14)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움. 공은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과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으며,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송서(松西) 강운(姜橒), 석남(石南) 권보(權補)와 절친한 교분을 맺었음. 또한 귀천(龜川) 서성렬(徐成烈)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서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창수(唱酬)하는 즐거움을 나누었음.

일찍이 세 번이나 영월(寧越)에 들어가 단종(端宗)의 고적(古迹)을 유람하면서 감회를 쏟아내기도 하였고, 청량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를 따라 금강산의 경승을 모두 구경하기도 하였음. 공은 후진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송상규(宋相奎)와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임(講任)을 맡아서, 유생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문예를 고과(考課)하였음.

공이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서성렬과 더불어 ������태극도(太極圖)������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공에게 한 말씀하시기를 청하자 “천명(天命)에 순응할 따름이다!”라고 하였고, 어린 손자를 보고는 “불의(不義)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음. 일찍이 강운이 공에 대해 “오당(吾黨)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나, 늙어서 끝내 죽고 말았구나!”라고 아쉬워하였다고 함.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이 「挽徐幼祥榦發」에 이르기를


    鶴下于皐物外翔   학이 언덕으로 내려와 물외에 노니니

    登西樓畔月如霜   등서루(登西樓) 가 뜬 달이 서리와 같구나.

    梧翁詩禮承衣鉢   오옹(梧翁 : 서창재)이 가르친 가학은 공이 의발을 이었고

    楓嶽烟霞裹笈箱   풍악(楓嶽)의 아름다운 경치는 책 상자에 담겨 있네.


라고 하였음.

������봉해첩(逢海帖)������ 및 유고가 있음.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南厓徐公墓碣銘」을 찬함.


서승렬(徐承烈)

1773년(영조49)~1836년(헌종2).

자 현지(顯之). 호 죽서당(竹漵堂). 간석(榦碩)의 아들. 돈암(遯菴)의 8세손.

공은 1807년(순조7)의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삼례도찰방(三禮道察訪) 및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음. ������영주영풍향토지(榮州榮豊鄕土誌)������에, “청렴으로 알려지다.”라고 함. 공은 소수서원의 원임(院任)을 맡기도 하였고, 향시관(鄕試官)이 되어 유생들에게 출제하고 고과하기도 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였음.

유고가 있음. 족질(族侄)인 재우(在愚)가 가장(家狀)을 찬함.


서성렬(徐成烈)

1783년(정조7)~1838년(헌종4).

자 약선(若先), 호는 귀천(龜川). 간동(榦東)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하였음.

공은 경학(經學)과 문장이 유림의 사표가 될 정도로 조예가 깊었음. 특히 삼남(三南)의 유생들이 을사명현(乙巳名賢)인 무위재(無爲齋) 강백진(康伯珍)의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하였을 때에, 공을 소수(疏首)로 추대하기도 하였음.

소수서원에서 유생들을 모아놓고 고과(考課)할 때에, 서승렬(徐承烈)이 향시관(鄕試官)으로 참여하였고, 공도 서간발(徐榦發)・황연한(黃淵漢)・김휘덕(金輝德)과 함께 답안을 고점(考點)하고 방(榜)을 내는 일에 참여하였음. 또한 1828년(순조28)에는 이태순(李泰淳)・이병운(李秉運)・이가순(李家淳)・황수한(黃秀漢)・서간발(徐榦發)・김낙주(金樂周)・류정문(柳鼎文)・서동열(徐東烈) 등과 함께, 옛날 퇴계(退溪)가 소백산을 유람하던 때와 꼭 같은 시기에 소백산에 올라, 여러 사람들과 연구시(聯句詩)를 짓고 아울러 이때 기록된 유람록의 발문(跋文)을 작성하기도 하였음. 또 한편으로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을 현양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음.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는 「輓徐進士若先成烈」에서 “문장이 호방하기는 예부터 이러하였거니와, 그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명성은 더욱 뛰어났네.[文章落拓古如此, 君不出世名愈奇]”라고 하였음.

유집이 있음. 이중철(李中轍)이 행장(行狀)을 찬함.


서간표(徐榦表)

1783년(정조7)~1823년(순조23).

자 경직(景直). 택윤(宅胤)의 아들. 생부는 홍윤(弘胤). 동활재(童豁齋) 만유(萬維)의 증손. 공은 옛것에 해박하고 경전(經傳)에 통달하여 유생들 가운데 신망이 두터웠음.


서동렬(徐東烈)

1784년(정조8)~1864년(고종1).

자 사희(士曦). 호 송사헌(松沙軒). 간주(榦周)의 아들. 공은 덕과 그릇이 충만하고 넓어서, 유림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음.

유고가 있음.


서간승(徐榦昇)

1788년(정조12)~1857년(철종8).

초명은 간회(幹晦). 자 경엽(景燁). 호 심락재(尋樂齋). 증윤(曾胤)의 아들. 공은 약관 무렵에 돈암(遯菴)의 주손(冑孫)이 되어, 절검(節儉)으로 가규(家規)를 이루었음. 공은 청렴(淸廉)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효우(孝友)로 집안을 다스렸다고 함.


서재우(徐在愚)

1804년(순조4)~1879년(고종16).

자 원직(元直). 호 운재(耘齋). 귀천(龜川) 성렬(成烈)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함.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

공은 어려서 총명하였고 초목(樵牧)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음. 6세 때에 아버지 성렬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문희연(聞喜宴)을 여는 날에, 공이 능히 아버지가 응시하였던 답안을 줄줄 암송하니, 가은(稼隱) 성언근(成彦根)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손녀와 공의 혼사를 의논하여 맺어줌.

8세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음. 서울에서 내려온 한 손님이 운(韻)을 뽑아 공을 시험하니, 공이 “내 나이 이제 여덟인데, 서울 사람은 첨 봤네.[兒年今八歲, 初見洛陽人]”라고 곧장 응수하였다고 함. 공이 친구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아버지 성렬이 공에게 바둑알을 입에 넣었다가 모조리 바깥으로 토해내게 하자, 이로부터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시를 짓기를 “300개의 자기(磁器) 바둑알 입에 넣었다 뱉어낸 후론, 아버님 가르침 평생토록 지켰네.[三百磁碁含復吐, 先君遺訓守平生]”라 하였음.

삼가례(三加禮)를 치른 후에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이 공을 위해 자사(字辭)를 지어 공을 권면함. 10여 년 동안이나 산에서 침식을 잊고 공부에 전념하여 사마시에 입격하니, 아버지 성렬이 팔영(八詠)을 지어 권면, 경계시킴. 부친상을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처리하고, 여가에 유고를 정리함.

공은 세도(世道)가 옛날과 같지 않음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고서 류치명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으며, 1855년(철종6)에 류치명이 유배를 갈 때에 수철교(水鐵橋)까지 배종하였으나 류치명이 공의 어머니에게 병환이 있다는 이유로 만류하여 마침내 공은 집으로 돌아옴. 만년에는 소수서원에서 고을 선비들을 모아 놓고 재주에 따라 그들을 성취하게 하였으며, 1878(고종15)에는 냉산(冷疝)으로 누워있는 와중에서도 날마다 침상에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읽었음.

문집이 있음.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成均進士徐公墓碣銘」을 찬함.


서학렬(徐學烈)

1804년(순조4)~1884년(고종21).

자 응학(應學+欠). 간관(榦寬)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음.


서운렬(徐雲烈)

1806년(순조6)~1866년(고종3).

자 제응(際應). 호 미오(薇塢). 간수(榦秀)의 아들. 공은 학식과 행실로 세인의 추중을 받았음. 유고가 있음.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행장(行狀)을,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가 묘갈명(墓碣銘)을 찬함.


서장렬(徐長烈)

1807년(순조7)~1871년(고종8).

자 현상(玄祥). 호 안주(鴈洲). 간문(榦文)의 아들. 사천(沙川) 창경(昌鏡)의 증손. 공은 자신의 몸가짐을 겸손하게 가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였다고 함.

유고가 있음.


서공렬(徐恭烈)

1813년(순조13)~1895년(고종32).

자 현묵(玄黙). 호 후사(后沙). 간문(榦文)의 아들. 공은 뜻을 독실하게 하여 배움에 힘을 쏟았는데, 회시(會試)에서는 끝내 불리(不利)하였음. 후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음.

재종손(再從孫)인 상탁(相鐸)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함.


서직렬(徐稷烈)

1814년(순조14)~1872년(고종9).

자 유형(幼馨). 호 만포(晩圃). 간례(榦禮)의 아들. 공은 배운 바를 실천하는 것이 독실하였고, 문장과 학식이 있었음.


서재무(徐在懋)

1816년(순조16)~1897년(광무1)

자 원미(元美). 호 동사(東沙). 귀천(龜川) 성렬(成烈)의 아들. 운재(耘齋) 재우(在愚)의 동생.

공은 문과에 급제하고,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과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였음. 공은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문학(文學)과 필법(筆法)이 매우 뛰어났음.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행장(行狀)을 찬함.


서재임(徐在恁)

1825년(순조25)~1879년(고종16).

자 원빙(元聘). 호 무첨재(無忝齋). 복렬(復烈)의 아들. 생부는 경렬(庚烈). 공은 덕스러운 도량이 관후하였으며, 흉금이 쇄락(灑落)하였음.


서재정(徐在正)

1829년(순조 29)~1898년(광무 2).

자 사강(士剛). 호 동호(東湖). 미오(薇塢) 운렬(雲烈)의 아들. 돈암(遯菴)의 후손. 생원시에 입격함.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

공은 윤리를 독실하게 실천하였고, 또 배우기를 좋아하였음. 공은 문장에 있어 특히 사부(詞賦) 방면에 명성이 났다고 하며, 정재(定齋) 문하에 출입하면서부터 식견을 더욱 넓게 쌓았음. 이때 류치명이 공에게 손수 「경재잠(敬齋箴)」을 써 주면서, “그대는 마음에 두고 복행(服行)하라.”고 하였다고 함.

과거 공부에도 힘을 써서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이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는 방편이었으므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대과(大科)를 단념하고 세간의 영욕(榮辱)에 마음을 두지 않았음.

공은 순흥 오현(梧峴)의 호암(湖巖)에 집을 짓고 살면서, “동호관(東湖觀)”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희(朱熹)가 지은 “東湖臺觀水雲深, 孺子高風何處尋”이라는 시 구절에서 뜻을 취한 것임.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부터 날마다 동호관에 있으면서 도서(圖書)를 곁에 두고 이를 읽고 사색하였으며, 문인(文人)과 큰 선비들을 대할 때면 학문을 토론(討論)하고 시를 창수(唱酬)하여 물외(物外)의 정취를 깃들였다고 함.

유고가 있음.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이 「東湖觀記」를 짓고, 류지호(柳止鎬)와 이중철(李中轍)이 각각 묘갈명(墓碣銘)과 행장(行狀)을 지었음.


서상렬(徐庠烈)

1830년(순조30)~1907년(융희1).

자 순칙(舜則). 호 만성재(晩省齋)・계암(溪菴).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아들. 공은 일찌감치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음. 또한 겸허함으로 자신을 다스렸음.

유고가 있음. 안두연(安斗淵)이 묘갈명(墓碣銘)을 찬함.


서상종(徐相鍾)

1833년(순조33)~1906(광무10).

자 여안(汝安). 재경(在慶)의 아들. 생부는 재응(在應). 송사헌(松沙軒) 동렬(東烈)의 손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음.


서상수(徐相銖)

1840년(헌종6)~1904년(광무8).

자 여형(汝衡). 호 급재(岌齋). 괴와(槐窩) 재응(在應)의 아들. 송사헌(松沙軒) 동렬(東烈)의 손자. 생원시에 입격함.

공은 천성이 강직하며, 학술이 정밀하고 깊었다고 하였음. 공은 특히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교분을 맺고 공부도 같이 하였는데, 향산은 공에게 ‘급재(岌齋)’라는 호를 양보하여 주고, 아울러 「급재기(岌齋記)」를 지어 공을 권면하는 뜻을 보이기도 하였음. 향산은 「급재기」에서, 공이 과거에도 합격하였으나, 분화한 서울에서 시속(時俗)에 영합하지 아니하고 조용한 골짜기로 내려와, 자신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는 공의 자세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음.

유고가 있음.


서재길(徐在吉)

1841년(헌종7)~1913년.

자 사윤(士潤). 통정대부(通政大夫) 학렬(學烈)의 아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음.


서상진(徐相振)

1842년(헌종8)~1911년.

초명은 상호(相鎬). 자 공벽(公璧). 호 자남(紫南). 공은 1902년(광무6) 12월에 상공학교(商工學校) 교관(敎官)에 임용되었음.


서상용(徐相鎔)

1842년(헌종8)~1911년.

자 여문(汝文). 호 봉천(鳳川). 재숙(在肅+心)의 아들. 생부는 재령(在寧). 공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 나아가 예학(禮學)을 질의하여, 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함.

유고가 있음. 족제(族弟)인 상추(相錘)가 묘지명(墓誌銘)을 찬함.


서상건(徐相建)

1843년(헌종9)~1915년.

과명(科名)은 봉전(鳳銓). 자 공건(公建). 호 동강(東岡). 동사(東沙) 재무(在懋)의 아들. 증광생원시에 입격하였음.

공은 문장과 필법에 가학(家學)의 연원이 있었음. 공은 1878년(고종15)에 경상도 유생들이 소두(疏頭)인 산천(山泉) 박주종(朴周鍾)을 중심으로 서원 복구를 청원하는 소(疏)를 올릴 때에 이에 참여하고, 또 직접 배종유생(陪從儒生)으로 서울에 올라가 복합(伏閤)하였음.

유집이 있음.


서재규(徐在奎)

1844년(헌종10)~1907년(융희1).

자 형백(衡伯). 호 봉남(鳳南). 응렬(應烈)의 아들.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손자.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독실하였으며, 슬기와 재주가 있었고 총민하였음. 공은 어린 나이로 어머니 상을 당함에, 변벽(拚擗 : 상을 당해 가슴을 치며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고 함. 공의 조부인 심락재가 공이 일찍 어머니를 잃은 것을 가련하게 여겨, 공을 가르침에 심하게 독려하지 않았으나, 공은 스스로 학업에 소홀하지 않았음.

1860년(철종11)에 진성이씨(眞城李氏)와의 혼사가 이루어져서 원대(遠坮)로 장가를 들었는데, 공은 이때 이만정(李晩正)・이만도(李晩燾)・이만인(李晩寅) 등과 망년지교를 맺음.

공은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극진히 하고 예법에 맞게 집례하였으며,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일이 날로 어긋나는 것을 보고는 과거를 그만두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에 힘을 썼음. 공은 특히 위선(爲先) 사업에 진력하여, 누대 위토(位土)를 잘 보전하고 송추(松楸)를 작벌하지 않았으며, 1896년(건양1)에는 서성구(徐聖耈)의 ������눌헌집(訥軒集)������을 간행하는 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뵙고 책의 편질(篇帙)을 정리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음.

공은 같은 해 가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가 특전(特典)을 베풀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순종(純宗) 가례 후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음. 그러나 공은 임종할 때에 자손들에게 당부하기를 명정(銘旌)에 자신의 직함을 참봉(參奉)으로 적으라고 하였음.

공은 ������명현록(名賢錄)������, ������염락풍아(濂洛風雅)������, ������팔대가(八代家)������ 등을 수집하여 손 가는 대로 정밀히 베껴, 문중 자제들에게 나누어주며 공부하게 하였음.

희암(希庵) 신태일(申泰一)이 「鳳南徐公墓碣銘」을 찬함.


서상도(徐相鍍)

1848년(헌종14)~1917년.

자 여경(汝敬). 호 영호(瀛湖). 무첨재(無忝齋) 재임(在恁)의 아들. 공은 성품이 담박(澹泊)하고 간독(懇篤)하여, 향리에서 추중을 받았음. 족질(族侄)인 병연(丙淵)이 묘지명(墓誌銘)을 찬함.


서상용(徐相鏞)

1849년(헌종15년)~1905년(광무9).

과명(科名)은 상철(相鐵). 자 성원(聲遠). 호 남초(南樵). 재은(在慇)의 아들. 공은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후에 상공학교(商工學校) 교관(敎官)에 임명되었음. 공은 명민하고 과단성이 있어, 일에 임하여 구차하지 않았음.

고암(古庵) 김세락(金世洛)이 묘갈명(墓碣銘)을 찬함.


서상옥(徐相鈺)

1850년(철종1)~1921년.

과명(科名)은 상호(相虎). 자 문옥(文玉). 호 목산(木山). 동호(東湖) 재정(在正)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하였음.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

공은 부친인 동호(東湖)와 조부인 미오(薇塢)의 학문과 행실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다시 김흥락의 문하에 나아가 그 추향(趨向)을 바르게 하고 견문을 넓히었음.

공은 근본과 실질을 숭상하고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였으므로, 과거에 입격하고서도 문을 닫아걸고 부모를 봉양하고 책을 읽는 데에 열중하였음. 공은 특히 동생들과 우애롭게 지내면서, 곧 지기(知己)가 되었음.

공은 ������주역(周易)������ 읽기를 좋아하여, 이를 깊이 탐구하고 자신의 처신에 이를 적용하여 스스로를 성찰하였음.

석강(石矼) 김석(金㙽)의 「輓徐文玉相鈺」에 이르기를, “영남에선 사림의 기대를 받았고, 성균관에선 집안 명성 계승하였네.[南州推士望, 東序繼家聲]”라고 하였음.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이 행장(行狀)을 찬하고, 대관재(大觀齋) 김회진(金晦鎭)이 「國子上舍木山徐公墓誌銘」을 찬하였음.


서재형(徐在衡)

1850년(철종1)~1928년.

자 성종(聖從). 호 괴암(槐庵). 후사(后沙) 공렬(恭烈)의 아들. 유고가 있음.


서상박(徐相鏷)

1853년(철종4)~1911년.

자 장옥(章玉). 호 모산(慕山). 동호(東湖) 재정(在正)의 아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명민하였으며, 과단성이 있었음. 또한 뜻을 독실하게 가지고 힘써 실행하였음. 공은 1901년(광무5) 11월에 승훈랑(承訓郞)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임명되었음.

김세락(金世洛)이 묘명(墓銘)을 지었음.


서병하(徐丙河)

1853년(철종4)~1921년.

자 계능(啓能). 호 만산재(晩汕齋).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종(相鍾). 공은 어려서부터 덕이 있는 분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성품은 강직하였음. 공은 또한 천성적인 자질에 후천적인 노력을 더하였다고 함. 유고가 있음.


서병영(徐丙永)

1856년(철종7)~1903년(광무7).

자 계효(啓孝). 호 희암(希菴). 급재(岌齋) 상수(相銖)의 아들. 송사(松沙) 동렬(東烈)의 증손.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

공은 성품이 과묵하고 평안하였으며, 부지런히 옛 책과 의리(義理)를 담론하였다고 함. 공은 타고난 재질이 영오하여, 5세 때 동렬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해가 물 흐르는 듯 막힘이 없었다고 함. 6세 때 부친 상수가 생원시에 입격하여 문희연(聞喜宴)이 떠들썩하게 열렸는데, 공은 마음을 가라앉혀 독서에만 열중하면서 마치 잔치를 보지 않은 듯이 하였다고 함.

9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슬퍼함이 마치 성인과 같았으며, 복(服)이 끝나고 나서 스스로 이르기를 “어머니께서 항상 나를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셨는데, 어찌 감히 내가 방탕하게 굴어서, 저승에 계신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더욱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에 매진하였음.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수업하였는데, 두 선생이 공을 모두 경중(敬重)하였다고 함. 사람을 가르침에 진심을 다하여, 이로 인해 성취한 사람들이 많았음.

유고가 있음.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이 「希菴徐公墓誌銘」을 찬함.


서상구(徐相銶)

1858년(철종9)~1914년.

과명(科名)은 상석(相錫). 자 우옥(禹玉). 호 사천(史川). 동호(東湖) 재정(在正)의 아들. 생원시에 입격함. 공은 일찍부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그의 인정과 장려를 받았으며, 어린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였음.

저서에 일고(逸稿)와 ������음청록(陰晴錄)������이 있음.


서상우(徐相祐)

1860년(철종11)~1928년.

자 윤길(允吉). 호 와운(臥雲). 재녕(在甯)의 아들. 공은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결하였으며, 조상을 추모하고 자신을 잘 다스렸다고 함.


서병렴(徐丙濂)

1862년(철종13)~1921년.

자 경숙(景叔). 호 율리(栗里). 통덕랑(通德郞) 상진(相鎭)의 아들. 공은 어려서부터 확고히 지킨 절조(節操)가 있었는데, 경술국치를 당하였을 때에는 꿈에서 “晉代江山餘栗里, 北窓高臥自如人”이라는 시를 짓고, 자신의 호를 율리(栗里)라 하였음. 이후에 공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의 행실을 지키는 것에 힘을 썼음.


서병준(徐丙濬)

1863년(철종14)~1929년.

자 명언(明彦). 자남(紫南) 상진(相振)의 아들. 공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음.


서병태(徐丙泰)

1864년(고종1)~1940년.

자 계첨(啓瞻). 호 회산(晦山).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종(相鍾)의 아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순후하여, 남들의 비방이 없었다고 하며, 유고가 있음.


서상우(徐相禹)

1865년(고종2)~1925년.

자 희백(希伯). 호 신암(愼庵). 괴암(槐庵) 재형(在衡)의 아들. 공은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조상에 관계된 일에 정성을 다함.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배우는 한편, 가학(家學)을 계승하고자 하였음.


서상회(徐相會)

1866년(고종3)~1914년.

자 우문(友文). 봉남(鳳南) 재규(在奎)의 아들. 공은 돈암(遯菴)의 주손(冑孫)답게 선대와 관계된 사업에 진력하였고, 종당(宗黨)이 공에게 많이 의지하였다고 함.


서병연(徐丙淵)

1869년(고종6)~1938년.

자 경박(景博). 호 아산(我山). 남강(南岡) 상건(相建)의 아들. 공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음. 공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부모님을 섬길 때 효성을 다하였다고 함.


서병홍(徐丙洪)

1872년(고종9)~1946년.

자 우석(禹錫). 호 학은(鶴隱). 남초(南樵) 상용(相鏞)의 아들. 공은 성품이 염정(恬靜)하고 삼가고 겸손하여, 사람들이 공을 저절로 아꼈다고 함.


서상추(徐相錘)

1873년(고종10)~1936년.

자 형중(衡重). 호 구암(求菴). 재언(在彦)의 아들. 공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졸박(拙樸)함을 지키고 한정(閒靜)한 마음을 길러서, 세상의 명리에 부림을 당하지 않았음.


서병철(徐丙轍)

1873년(고종10)~1932년.

자 유응(由應). 호 죽천(竹川). 영호(瀛湖) 상도(相鍍)의 아들. 공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에서 공부하였음. 공의 학문은 육경(六經)에 근본을 두어서 기본을 세우고, 제가(諸家)를 참고하여 그 의취(意趣)를 넓히었음.


서상탁(徐相鐸)

1877년(고종14)~1950년.

자 우목(友木). 호 침천(枕泉). 봉남(鳳南) 재규(在奎)의 아들. 공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문인으로서 그들에게 배운 바가 많았으며, 자신의 직분을 지키면서 부지런히 후생들을 지도하였음. 또 이만도(李晩燾)와 이중철(李中轍)에게 각각 「학리도설발(學理圖說跋)」과 「돈암기(遯菴記)」를 받아냄.

유고가 있음.


서병회(徐丙會)

1877년(고종14)~1937년.

자 맹원(孟元). 와운(臥雲) 상우(相祐)의 아들. 수륜원주사(水輪院主事)를 역임함.


서재승(徐在承)

1876년(고종 13)~1915년.

자 성서(聖瑞). 호 죽림(竹林). 사시(私諡)는 충의(忠義).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목렬(穆烈)의 아들. 통사랑(通仕郞)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서임됨.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개하고 지기(志氣)가 비범하였다고 함. 등강서숙(登岡書塾)에서 수학할 때에 어른들이 번거로이 독려하지 않아도 문리(文理)를 쉽게 깨우쳤음. 남들과 교제할 때 구차스럽거나 영합하지 않았으며,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았음.

탁지부주사에 서임되었다가, 곧 일본군의 핍박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고서, 공은 관직을 사임하고 군량 모집 등 의병활동에 투신하였음.

1915년에 친일파가 집안에 은신하고 있던 공을 밀고하니, 공은 마침내 일본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가게 되었는데, 공은 어차피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서 그들을 꾸짖기를 마지않았음. 이에 일본군이 풍기 창락(昌樂)에 도착하였을 때에, 공을 살해하였음.

영주 백산서원(白山書院)에 모셔짐.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됨. 문집이 간행됨. 김진수(金晉秀)가 「忠義公竹林徐先生墓碣銘」을 찬하고, 배동환(裵東煥)이 「忠義公徐先生墓誌銘」을 찬함.


서정익(徐庭翼)

1881년(고종18)~1949년.

자 경익(景翊). 병로(丙魯)의 아들. 송사헌(松沙軒) 동렬(東烈)의 5세손.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에 임용됨.


서상달(徐相達)

1882년(고종19)~1946년.

자 덕범(德範). 호 모촌(慕村). 통정대부(通政大夫) 재길(在吉)의 아들. 공은 남들이 모두 감복할 정도로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음. 자세한 내용은 하산(何汕) 황필락(黃必樂)이 지은 「徐孝子慕村亭銘」을 참고할 수 있음. 채산(蔡山) 권상규(權相圭)가 묘갈명(墓碣銘)을 찬하였음.


서병극(徐丙極)

1924년~

자 자중(子中). 호 대암(大巖). 죽림(竹林) 재승(在承)의 손자. 송평(松坪) 상봉(相鳳)의 아들.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정산급문록(貞山及門錄)������) 현대운수(주), 삼양운수(주) 및 봉화레미콘의 대표를 역임함.

공은 1938년에 봉화소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과 1945년에 걸쳐서 도강서당(道岡書堂)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고 함.

공은 일향(一鄕)과 일도(一道) 단위에서 사회・정치・체육・산업활동 및 유림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 먼저, 공은 1972년에 영주읍 방위협의회 위원 및 영주시군사회단체협의회장이 되었고, 1973년에 영주군 번영회, 1977년에 영주번영회에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1973년부터는 소액심판조종위원을 맡았음. 1983년에는 안동교도소 교화위원과 영주시정 자문위원이 되고, 1984년에는 갱생보호회 위원이 되었음. 이후 꾸준히 시정자문위원과 보호회위원, 심판조종위원을 역임하고, 1981년과 1982년에는 각각 정책자문위원과 방위협의회 고문을 맡았음.

체육활동과 관련해서는 1973년에 영주체육회의 이사에 위촉되고, 1976년에는 올림픽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음. 또한 1984년에는 체육회 자문위원과 전국소년체전 지도위원을 맡았음. 정당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1971년에 공화당 제7대 선거대책위원이 되고, 1978년에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음. 산업 활동과 관련해서는 현대운수(주)와 삼양운수(주) 및 봉화레미콘의 대표 외에, 경북화물조합 이사(1973년), 산재보험체납보험료 정리위원(1979년) 등으로 활동하였음.

공은 정산(貞山) 김동진(金東鎭)의 문인록에 등재되었음. 1978년에는 유도회(儒道會) 경상북도 위원장이 되었고, 1982년에는 각각 ������한국씨족이천년사(韓國氏族二千年史)������와 ������전국유림명감(全國儒林名鑑)������의 감수위원으로 활동하였음. 1990년에는 유교진흥회 상임위원, 1993년에는 대한민국 윤리도덕회 중앙회 총재, 1996년에는 성균관 부관장을 맡았음. 지역에서는 소수서원과 순흥향교 등의 원임(院任)・교임(校任)을 맡아 유풍(儒風) 진작에 기여하고자 하였음.

공은 유도회중앙본부 부회장 및 경상북도 본부장으로서, 동향(同鄕)의 학자였던 동주(東洲) 김진수(金晉秀)의 ������동주문집(東洲文集)������의 서문을 작성하였음. 또한 영주의 대표적 누정인 가학루(駕鶴樓)를 중수한 전말을 담은 「가학루중수기(駕鶴樓重修記)」를 짓고, 순흥 금성단(錦城壇)의 역사와 유래 및 수리 전말을 기록한 「금성단수리기(錦城壇修理記)」 등을 짓기도 하였음.

아울러 위선사업의 일환으로,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 선친의 문집인 ������월영당문집(月瀛堂文集)������, ������죽림선생문집(竹林先生文集)������, ������송평문집(松坪文集)������을 정리하고 간행하였음. 특히 조부인 죽림 서재승의 항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새내에 백산서원(白山書院)을 건립하였음.

공은 경상북도지사, 대한적십자총재,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국무총리의 표창을 수차례에 수여 받았음. 유문집이 있음.

[출처] 영주의 인물(달성서씨 達城徐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