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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파에대하여......|(從)榮州順興沙川(영주순흥사천)

바래미나 2015. 4. 6. 19:24

순흥파에대하여......|(從)榮州順興沙川(영주순흥사천)

 

항간에 1세이신 원(遠) 공(公)의 윗대로 진(晋)자를 쓰시는 분을 꼽으나 21세 정순(庭純)공은 정한 근거없이 후손들 마음대로 열거하는 것은 선조를 욕되게하며 족보를 훼손하는 것이라하셨기에 이대로 보존한다.
혹 새로운 사적이나 사료가 나와 확실한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면 서씨 일족의 연계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항간에 서씨(徐氏) 는 신라(新羅) 말엽(末葉) 아간대부(阿干大夫) 휘(諱) 신일(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일설(一說)에는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하고 또 백제의 왕족(王族)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考證)은 없다. 한편으로 설화(說話)에 사냥군에게 쫒기는 화살 맞은 암사슴을 구해준 만주(萬周)가 바로 신일공이라는 설은 서씨들이 노루고기를 먹지 않는 데서도 심증(心證)이 간다. 그 만주(萬周)가 가난하게 살았으나 지극한 효자로 신라 46대 문성왕의 사냥길 안내의 공으로 서씨에 사성(賜姓)된다. 이름 만주(萬周)를 신일(神逸)이라 한 것은 신의 계시를 받은 뛰어난 일(逸) 자(字)로 고쳐 받았으며 늦게 장가들어 80 고령(高齡)에 득남(得男)하니 이분이 고려 4대 광종(光宗)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을 지낸 정민공(貞敏公) 필(弼)이요, 그 아랫 대(代)가 고려 6대 성종(成宗)때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로 거란(契丹)의 소손영(簫遜寧)과 국경단판(國境斷判)으로 압록강(鴨綠江)까지 넓힌 서희(徐熙) 장군이다. 그 후손들이 이천을 맏집으로 하고 달성(達城),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으로 분파(分派)되어 관(貫)을 달리하고 있다.

달성 서씨 는 크게 경파(京派 ; 파조 군기소윤공 휘 간<派祖 軍器少尹公 諱  >)와 대구파(大邱派 ; 파조 판도판서공 휘 진<派祖 版圖判書公 諱 晋>)와 순흥파(順興派 ; 사천리 입향조 증 지평 휘 한정<沙川里 入鄕祖 贈 持平 諱 翰廷)로 나뉘어져 있는데 경북 북부 지역과 강원도 일부 지방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사천(沙川) 종친(宗親)은 돈암(遯菴) 한정(翰廷)공(公)의 후손들이며 5개지파(五個支派)로 나뉘어 있으니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 파조 휘 태<派祖 諱 兌>), 시정공파(寺正公派 ; 파조 휘 연<派祖 諱  >) 지추공파 (知樞公派 ; 파조 휘 량<派祖 諱 亮>) 참의공파(參議公派 ; 파조 휘 치<派祖 諱 治>) 감사공파(監司公派 파조 휘 천일<派祖 諱 千一>)로 족보(族譜)를 함께 하고 있다.

서한정(徐翰廷)

사천리 입향조(沙川里 入鄕祖)는 휘(諱) 한정(翰廷)이요, 자(字)는 우경(羽卿)이며 돈암(遯菴)은 자호(自號)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원(遠)이니 고려(高麗) 생원(生員)이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충(衷)이니 좌사간(左司諫)으로 재임(在任)중 직언(直言)을 하다가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대구(大邱) 화원(花園)으로 이거(移居)하여 마이산(馬耳山) 아래 효성지변(曉星池邊)에서 종로(終老)하시고 조(祖)는 지청도군사(知淸道郡事)를 지낸 휘(諱) 사민(士敏)이요, 부(父)는 생원(生員) 균(均)이니 대구에 정언(正言) 도하(都夏)의 장인(丈人)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묘역(墓域)을 비롯해서 그 윗대의 계대(系代)까지 실전(失傳)되었다.
휘(諱) 한정(翰廷)은 서기 1407년 5월 5일 출생하여 세종조(世宗祖)에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修學)하던 중 47세 되던 해에 소위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년)을 당하자 세상에의 뜻을 버리고 소백산 아래 있는 영주 한성동(漢城洞)에 은거(隱居)하다가 다시 순흥(順興) 등강촌(登岡村), 현(現) 단산면(丹山面) 동원리(東元里)에 복거(卜居)하시니 그 때 지으신 다음 시(詩)로 공(公)의 심정(心情)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

『세상(世上)일이 지금과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구나. 몸을 보전(保全)할 곳 어디메뇨. 뒤늦게야 그윽한 터를 택(擇)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효자촌(孝子村)이라 이르더라.』

             時事如今不欲言 安身何處別區存 擇仁晩卜幽棲地 擧世咸稱孝子村
             시사여금불욕언 안신하처별구존 택인만복유서지 거세함칭효자촌

당시(當時) 태학(太學)이라면 인재양성기관(人材養成機關)이요, 장래(將來)가 보장(保障)되는 곳인데 그 부귀영화(富貴榮華)의 길을 버리고 은거(隱居)의 길을 택했으니 청절(淸節)을 중(重)히 여긴 공(公)의 처사(處事)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선생이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에 못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조(正祖)때에 대신(大臣) 번암(樊巖) 채제공(蔡濟公) 선생(1720~1799)은 돈암집(遯菴集) 서문(序文)에서 '공(公)의 시(詩)는 몇 자 안되지만 그 빛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난다.(歌凡四十言而已而其光如日月之麗乎<가범사십언이이이기광여일월지여호>)'라고 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6대손(六代孫)인 현감(縣監) 이수정(李守貞 1709~1791) 공(公)은 위의 책 서문(序文)에서 그 호(號) 돈암(遯菴)과 같이 원망(怨望)도 없고 명문(名聞)도 없는 군자(君子)로 그 처심행사(處心行事)가 추강(秋江)이나 매월(梅月)보다는 세상에 들어남이 어려웠으나 마침내 들어남이 있도다.(其名若遯菴者 豈非所謂無怨無閔之君子卽其處心行事尤有難於秋江梅月之倫矣 ~中略~ 今雖或掩 於一時終必有明顯之日矣 <기명약돈암자 기비소위무원무민지군자즉기처심행사우유난어추강매월지윤의 중략 금수혹엄예어일시종필유명현지일의>)라고 했다. 우윤(右尹) 김굉(金土宏)공(公)은 사림대표(士林代表)들의 글과 함께 예조(禮曹에) 보낸 글 중에도 '공의 충절(忠節)은 생사육신(生死六臣)과 병립(竝立)해서 7로 함이 가(可)하다고 탄원(歎願)했고 고죽청풍(孤竹淸風)의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개(節介)에 버금간다고 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찬(撰) 묘지명(墓地銘)에도 '공(公)의 행적은 추강(秋江) 매월(梅月)의 윤(倫)에 손색(遜色)이 없으면서도 그 자취가 인멸(湮滅)되어서'라고 했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게제(揭載)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까지 내리신 회봉(檜峯) 권득평(權得平) 공(公)이 돈암(遯菴) 공(公) 신거정시(新居呈詩)에 편히 사는 궤도(軌道)를 벗어난 동노후(東魯後)에 청표(淸標)함이 백이(伯夷)의 반열(班列)에 설 만 하다.(逸軌寧居東魯後 淸標不讓伯夷斑 <일궤영거동노후 청표불양백이반>) 이라하고 제문(祭文)에서도 마음은 숨어버림으로 살찌우고 영리(榮利)를 생각지 않으며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현묘(玄妙)하고 심오(深奧)한 데를 궁구(窮究)하고 단좌율기(端坐律己)에 맞게 언동(言動)과 청조아망(淸操雅望)은 남의 스승이 된다.(甘心肥遯不慕榮利沈潛經學劈付玄奧端坐律己言動以時淸操雅望可作人師<감심비둔불모영리침잠경학벽부현오단좌율기언동이시청조아망가작인사>)라고 했다. 참판(參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공(公)이 지은 영천지(榮川誌)에는 청조탁행(淸操卓行) 낙선지행(樂善砥行) 위세소중(爲世所重)이라 했으니 공의 깨끗한 지조(志操)와 뛰어난 행적(行蹟)을 엿볼 수 있다. 또 참판(參判) 이헌경(李獻慶 1719~1791) 공(公)이 지은 등강기(登崗記)에도 순흥(順興) 남쪽 죽계수(竹溪水) 아래 미궐봉(薇蕨峰)이 있고 그 동쪽에 등강촌(登崗村)이 있으니 옛날 돈암(遯菴) 서한정(徐翰廷) 선생께서 달성(達城)으로부터 처자(妻子)를 솔권(率眷)하고 와서 은거(隱居)하던 곳인데 백이(伯夷)의 등피서산(登彼西山)의 의(義라)고 하고 또 마을은 아래 위로 수십리(數十里)나 텅 비어 낮에도 산짐승이 울어대는데 다만 충혼(忠魂)과 의백(義魄)만이 그 사이를 오고가며 슬피 우니 지나는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황폐(荒廢)한 곳이 되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圖謨)하다가 탄로나서 대살육(大殺戮)의 참상(慘狀)이 일어난 곳이다. 공(公)의 단종(端宗)에 대한 충념(忠念)이 담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의(執義) 이급(李級 영조조<英祖朝> 문과<文科> 진성인<眞城人>) 공(公)이 찬(撰)한 등강지(登崗誌)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事實)이 잘 나타나 있다. 신편장릉지(新編莊陵誌) 정의제신조(靖義諸信條)에는 서한정(徐翰廷) 달성인(達城人) 균(均)의 자(子)로 낙선지행(樂善砥行) 위세소중(爲世所重) 조중진사(早中進士) 유태학(游太學) 단종손위(端宗遜位) 즉일남환(卽日南還)하여 가족(家族)을 솔권(率眷)하고 소백산(小白山) 미궐봉(薇蕨峰) 하(下)에 은거(隱居) 자호(自號) 돈암(遯菴) 두문단좌(杜門端坐) 유기세사(遺棄世事) 일이경학자오(日以經學自娛) 수종노언(遂終老焉)하였다.
금상무신(今上戊申) 증사헌부지평(贈司憲府持平)으로 등재(登載)되어있고 이문구(李文求) 저(著)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992. 7. 서울 문이당 간<刊> 247면) 이라는 책에도 진사(進士) 서한 정(徐翰廷)은 소백산 고사리봉(미궐봉<薇蕨峰>) 기슭에 살면서 앉을 때는 반드시 영월(寧越) 단종(端宗)을 모신 장릉(莊陵)이 있는 쪽을 향하여 복상을 하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상(以上)의 문헌(文獻)을 상고(詳考)해볼 때 그 내용(內容)이 돈암(遯菴) 공(公)께서 실제로 겪은 고통(苦痛)과 그 후손(後孫)들이 당시의 정치환경에서 피세돈거(避世遯居)의 어려움을 다 나타냈다고는 보기 어렵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했다가 서인(庶人)으로 만든 그 때부터 숙종(肅宗)때에 백호(白湖) 윤전(尹鐫 1617~1680) 공(公)의 간청(懇請)에 의해 복위(復位)될 때까지 230여년(餘年) 동안은 선조(先祖)의 충절(忠節)을 주청(奏請)조차 할 수 없는 정국(政局)이었고 그 뒤 후손(後孫)들의 계사(啓辭)와 사림(士林)의 주청(奏請)에 의해 1788년 정조(正祖) 12년 8월 10일 절의(節義)가 뛰어났다고 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될 때까지 330여년동안 겪은 후손들의 애타는 추모(追慕)의 정(情)은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후손들의 환로(宦路)에도 많은 영향(影響)을 미쳐 후손 중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한 분도 조선조(朝鮮朝) 후기(後期) 1807년 순조(純祖) 7년 장령(掌令)을 지낸 죽숙(竹淑) 승렬(承烈) 공(公)과 1841년 헌종(憲宗) 7년 진사(進士)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배수(拜受)받으신 호(號) 월영당(月瀛堂) 휘(諱) 목렬(穆烈)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소(疏)를 하시다가 환향(還鄕)하셨고 유유집(有遺集)하다 순조(純祖) 7년 사헌(司憲)을 지낸 동사(東沙) 재무(在懋) 공(公) 밖에 없으니 말이다. 공(公)의 깨끗한 정절(貞節)은 후손(後孫)들의 피에 이어져 역사적(歷史的)인 뚜렷한 인물(人物)은 배출(輩出)되지 않았으나 향당(鄕黨)에서 유림(儒林)으로서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살아감은 향내(鄕內)에서도 높이 평가(評價)받고 있다. 공(公)의 손(孫) 휘(諱) 호(浩) 전연사직장(典涓司直長) 공(公)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先生) 찬(撰) 죽계지(竹溪誌)에 서호(徐浩) 등은 인(仁)을 좋아하며 불의(不義)를 부끄러이 여겨 향속(鄕俗)이 후(厚)한 데로 돌아가다.(낙위인이치불의향속귀후언<樂爲仁而 不義鄕俗歸厚焉>)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손(曾孫) 휘(諱) 천일(千一 ; 관찰사<觀察使>)는 퇴계선생(退溪先生) 문하(門下)에서 칭송(稱頌)되었고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과 의병(義兵)을 도왔으며 공(公)의 7대손 눌헌(訥軒) 성구(聖耉) 공(公)은 어릴 때부터 재질(才質)이 뛰어나 중망(重望)되었는데 숙종(肅宗) 17년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2등2인(二等二人)으로 합격했다. 독학(獨學)으로 일관(一貫)하고 부친(父親)이 기암(寄菴) 공(公) 휘(諱) 숙(璹)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득(自得)한 분으로 학리도설(學理圖說)과 의례논변(疑禮論辨) 두 권의 저서와 유문집(有文集)하다. 학리도설(學理圖說)은 상하(上下) 2권으로 46개의 도설(圖說)은 하도낙서(河圖洛書) 등(等) 역학사괘(易學四掛)에 대한 것과 퇴계 이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中) 인설(仁說) 서명(西銘) 경재잠(敬齋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제가(諸家)의 설(說)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하였고 의례논변(疑禮論辨)은 4권인데 예경(禮經) 및 우리나라 제현(諸賢)의 문집(文集)에 실려있는 다양(多樣)한 논변(論辨)을 간략(簡略)히 절취(截取)하여 별도(別途)로 제(題)를 붙였는데 필사본(筆寫本) 그대로 간행되지 못하고 있다. 또 유집(遺集) 눌헌집(訥軒集)에 훌륭한 시(詩) 200여 수(首)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서예(書藝)에 뛰어나 서울 학원사(學園社) 발행(1969. 1. 1.)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7권 29면(面)에 조선시대 학자(學者) 중(中)에 등재(登載)되고 숙종때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특히 서체(書體)에 뛰어났다. 원근(遠近)의 친우(親友)들이 비단을 가지고 와 그의 글씨를 얻어가려고 하는 자(者)가 구름같이 모였지만 이로 입신(立身)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직 학문(學問)에 힘쓸 따름이었다고 소개(紹介)되어 있다. 공(公)의 9대손 오산(梧山) 창재(昌載) 공(公)과 사천(沙川) 창경(昌鏡) 공(公)과 그의 아들 홍윤(弘胤) 공(公)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문하(門下)에 나아가 수학(修學)하면서 돈암(遯菴) 선생이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을 받는데 크게 활약(活躍)을 했고 13대손 동호(東湖) 재정(在正) 공(公) 등(等) 십여 인(人)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공(公) 문하(門下)에서 14대손(孫) 구암(求菴) 상추(相錘) 공(公) 외 10여 인(人)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공(公)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는 등 퇴계선생의 학통(學統)을 이어 받아온 사실(事實)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