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해,공군,종합

전세를 역전시키다.

바래미나 2015. 2. 17. 02:06

전세를 역전시키다.

초계선의 동진 <출처 : wikipedia>
초계선의 동진 <출처 : wikipedia>

해전의 배경


1942년 4월 18일 일본 해군은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일본을 공습하고 중국으로 탈출했었던 두리틀의 폭격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항속 거리가 긴 쌍발 육상 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적재하고 출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본 군부는 공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충격을 받은 일본 국민들의 군부 비난은 크게 일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거주하는 도쿄에 적의 폭격이 가해지는 것은 당시의 군민 모두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해군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대담한 결심을 하였다. 야마모토는 전쟁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미드웨이- 알류산 열도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개전후의 2단계 공세에서 중부 태평양을 주요한 목표로 보고 이를 상부에 우겨서 관철시키고 행동을 구상 중이었다. 즉 미드웨이섬을 점령하여 초계선을 멀리 하와이 근처까지 동진시켜 두리틀의 폭격대와 같은 기습의 가능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쯤 예정된 하와이 점령 작전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 <출처 : wikipedia>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 <출처 : wikipedia>

그의 목표는 또 있었다. 그는 미국이 하와이에 가까운 미드웨이같은 전략적 가치가 큰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으면 호주와 남태평양 사이에서 활동하는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급히 달려올 것이고 이를 격멸하여 전쟁의 종말을 지어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일본 육군은 야마모토의 작전안에 공감하여 미드웨이와 알류산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협조하기로 하였다.



미드웨이 작전 연기 주장들


 

나구모 주이치 중장 <출처 : wikipedia>
나구모 주이치 중장 <출처 : wikipedia>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었다. 반론은 해군 내부에서 나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작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 1기동함대(나구모 기동부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중장은 진주만 공격 후 계속해서 남태평양과 인도양의 여러 작전에 동원되었던 함정과 항공기, 군인들의 피로가 누적되어 일정기간 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작전의 연기를 강하게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휘하 항공전의 중요한 전문가들인 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대좌나 제 2 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소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고 수리중인 즈이카쿠의 수리가 끝나고 그의 자매함 쇼카쿠가 인원 충원과 훈련이 완료된 후에 합류하기를 기다려서 작전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그의 생각에 미드웨이 해전은 시간을 다투는 것이었다.



야마모토의 고집


두리틀 공습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4월 28일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에서 연합함대 제 1단계 작전 전훈연구회가 열렸고 이어서 미드웨이 공략 작전의 도상(圖上) 연습이 있었다. 도상 연습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일본군도 보급 등의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특히 야마모토가 야심차게 기대하고 있는 미 항모부대의 포착과 격퇴의 가능성은 보장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구모 기동부대 구사카참모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미드웨이 점령과 미 기동부대 격멸,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를 쫓는 것과 같다고 회고하였다.


만약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더라면 그 전세의 방향을 돌려놓았을지도 모르는 두 척의 항모들,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데다가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 정박시키고 정비하기로 한 상황으로 이 주력 항모 두 척의 작전 참가 배제는 불안스런 것이었다(미국 기록은 즈이카쿠가 일본 구레 군항에 입항해 있었다고 쓰여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의 총동원 가능한 항공기는 319기로 예상되었지만 미군은 하와이에서 출격하는 육상기까지 포함하면 348기로서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항모 즈이카쿠 – 쇼카쿠는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출처 : wikipedia>
항모 즈이카쿠 – 쇼카쿠는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출처 : wikipedia>

미국보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집중해서 작전에 돌입하지 못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간부들이 많았다. 후에 평가되었지만 미드웨이 전장에서 먼 북쪽 알류샨 열도에 경항모 류조와 호쇼를 분산 투입하여 전투력을 분산한 것은 전투력 집중의 원칙에서 볼 때 야마모토의 또 다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작전에 집착한 야마모토는 본 작전에 이견을 가진 함장들은 조속히 퇴함하라고 위협의 훈시를 함으로서 반대나 연기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사전 탐지한 미국의 정보력


1942년 5월5일 해군 나가노 군령부장은 야마모토에서 대해령(大海令) 제 18호를 발령하여 작전 개시를 알렸다. 이 무렵부터 일본군보다 항상 한 수 위였던 미군의 정보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42년 3월 4일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일본군의 대형 2식 비행정 두 기가 하와이 오하우 섬을 폭격하고 같은 달 11일에 비행정 1기가 미드웨이섬에 접근했다가 격추 된 일이 있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이는 일본이 이 해역에 공세를 취할 징후라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엄중한 경계를 지시했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직전 변경한 암호 체계를 전략 암호 “D"라고 불렀는데 이 암호는 미 해군에게 JIN-25암호라고 알려져 있었고 일부 암호 해독에 성공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1942년 4월말부터 암호의 부분 해독에 힘입어 일본군이 태평양 해역에서 대규모의 공세 작전을 전개할 농후한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 작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불명이었다. 일본군의 암호에 자주 등장하는 AF라는 암호는 공격 목표로 판단되었는데 이것이 어느 곳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워싱턴의 미 합참본부는 이 미지의 암호가 하와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미 육군 항공대는 이것이 알래스카나 미국 서해안이라고 추측했었다. 5월 중순까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각종 정보를 종합 분석해보고 이곳이 하와이 인근 미드웨이섬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죠셉 존 로체포트 <출처 : wikipedia>
죠셉 존 로체포트 <출처 : wikipedia>

하와이 소재 해군 첩보부도 그 AF가 미드웨이라는 가정으로 정보 수집에 집중하였다. 블랙챔버라 불리우는 이 암호 부대는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급파된 죠셉 존 로체포트(Joseph John Rochefort)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미 해군 암호 첩보분야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남긴 사람으로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암호 분석으로 사전 예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5월 11일 첩보대의 장교 야스퍼 홈스의 제안으로 기가막힌 작전이 만들어졌다. 미드웨이와 오하우 섬의 중간에 깔린 해저 케이블로 미드웨이섬 기지 사령관과 사전에 모의한 후 무선으로는 거꾸로 하와이에 미드웨이섬의 해수 정화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다 떨어져 간다는 긴급 위장 보고를 평문으로 하게 하였다. 미드웨이섬의 사령관은 그대로 하였다. 이 평문 전문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웨이크 섬의 일본군 통신 부대에게 감청되어 암호문으로 본국에 보고되었다. “미드웨이에 식수가 떨어져가고 있다.”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미드웨이를 지칭하는 암호인 AF라는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드웨이섬 – 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미드웨이섬 – 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wikipedia>

이 무선은 다시 미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되었다. 감청된 전문은 미 해군 통신 감청 본부에게 보고되어 비로소 AF가 미드웨이임이 밝혀졌고 이어서 이곳에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 판단이 확정되었다. 추가로 암호가 더 해독되어 미드웨이 공격부대의 병력과 지휘관 예정 항로등과 공격 시기가 더 밝혀졌다.



미 함대의 출동


미드웨이 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미군의 작전계획은 5월 28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제 29-42로 발령되었다. 그 주요 내용들은 첫째, 원거리에서 적을 발견, 포착하여 기습을 방지할 것. 둘째, 적의 항모들을 격파하여 공습을 저지할 것. 셋째, 잠수함을 초계와 공격용으로 적극 활용할 것. 넷째, 미드웨이섬 수비대는 전력을 다해 섬을 사수할 것 등이었다. 미군은 작은 미드웨이섬에 해병 수비대 3,000명을 급파하고 항공기만 150기를 파견하였다. 조밀한 대공 포대망이 급속하게 구성됐다.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출처 : wikipedia>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 <출처 : wikipedia>

니미츠 대장은 이미 남태평양에서 산호해 해전을 겪은 플레처 제독의 17 기동부대(항모 요크타운과 호위함들)를 하와이로 이동하게 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가용 항모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다. 5월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에서 항모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요크타운은 큰 수리를 요하는 손상을 입어 진주만의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다. 항모 사라토가도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수리 중에 있었다.


미 항모 호넷-두리틀 폭격대가 발진한 항모 <출처 : wikipedia>
미 항모 호넷-두리틀 폭격대가 발진한 항모 <출처 : wikipedia>

니미츠 사령관은 자칫하면 플렛처 제독의 16 기동부대의 단 두 척의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힘겨운 작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요크타운 -미드웨이 출동 전 수리 독크에 있는 모습 <출처 : wikipedia>
요크타운 -미드웨이 출동 전 수리 독크에 있는 모습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아카키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아카키 <출처 : wikipedia>

한 가지 가능성은 5월 27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수리 도크에 들어가 있는 요크타운의 수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요크타운을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였다. 요크타운의 최대 파괴 부분은 연료 탱크로서 이를 제대로 수리하려면 하와이 수리 조선소에서는 불가능하고 미 서해안의 큰 수리 조선소에 가서 장기적으로 수리해야 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하와이 수리 도크의 인원들은 72시간의 불면불휴의 돌관 작업으로 요크타운을 일단 출항을 할 수 있게 하는 응급조치를 완료하였다. 요크타운은 5월 30일, 수리 도크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달리는 동안 공작함(수리선)이 옆에 붙어 계속 긴급 수리를 하였다.

일 항모 카가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카가 <출처 : wikipedia>

일본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의 피해가 너무 커서 출동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다. 만약 미 기동부대의 반격이 있다면 미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할제 제독의 16기동부대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2척 외에 경항모 와스프가 출동하리라고 판단했었다.


1942년 5월 28일.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편성 된 제 16 기동부대(TF-17)가 주력으로 출동하였다. 이 부대는 지난 4월에 두리틀의 폭격대를 발진시킨 부대다. 이어서 5월 30일. 17 기동부대의 요크타운이 뒤를 이어 출동하였다. 17 기동 부대는 플레처 제독이 계속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16기동부대의 사령관인 맹장 할제 제독은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이라서 스플루언스 제독이 부임하였다.


항모 작전에 별다른 경험이 없던 그는 참모장 엘리엇 브라우닝 대령의 조언을 대폭 받아들여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 콤비의 협동 작전은 커다란 성과를 만들게 된다. 연합한 두 기동함대의 통합 지휘는 플레처 소장이 맡았다.



야마모토 사령관과 전함 야마토(大和)의 출동


한편 일본은 5월 27일 나구모 주이치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제 1 항공전대가 엄중한 무선 봉쇄를 실시하며 출격하였다. 주력 항모들은 제 1 항공전대의 아카키, 카가, 제 2 항공전대의 히류, 소류의 네 척이었다.

일 항모 히류의 자매함인 소류 <출처 : wikipedia>
일 항모 히류의 자매함인 소류 <출처 : wikipedia>

6개월 전 하와이를 공격했던 기동부대에서 제 5 항공전대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빠진 것이었다. 참가했더라면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바꿔 놓았을지도 몰랐던 항모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에서 입은 손상 수리에 무려 3개월이나 걸리는데다 산호해 해전에서 조종사 손실이 절반에 달했던 자매함 즈이카쿠는 트럭 섬에서 조종사 충원과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전함 기리시마와 하루나 두 척의 전함이 호위함대의 주축으로 동반하였다. 그 뒤를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포함해서 5척의 전함을 중심으로 대함대가 거리를 두고 출동하였다. 사상 최대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