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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의 마지막 자존심

바래미나 2014. 10. 19. 22:41

영국 해군의 마지막 자존심
       블랙번 버캐니어 (Blackburn Buccaneer)  

영국 해군의 마지막 자존심, 블랙번 버캐니어

미국 항공모함 전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재 미국을 제외한 모든 항공모함 운용국의 해상 항공 전력을 모두 합해도 미국을 능가하지 못한다. 제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구축한 항공모함 전력은 가히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수적으로 지구상에서 활동 중인 함재기의 대부분은 미국제라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근래의 전투기 개발 환경이 녹록지 않다 보니 미국제 함재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보다 더욱 커졌다.

전통적인 해군 강국인 영국도 현재 차세대 항공모함에 탑재될 함재기를 미국과 공동개발 중일 정도다. 하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미국에 앞서 오대양을 먼저 지배했던 나라답게 영국은 오랫동안 자국산 함재기로 무장했던 나라 중 하나다. 제트 시대가 도래한 후에도 그러한 기조를 계속 유지했으나, 1960년대 들어 경제가 쇠락하고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자 군비 감축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즈음 항공모함 탑재용 전투기인 씨빅슨(de Havilland Sea Vixen)이 노후해지자 영국은 전투기를 자체 개발하는 대신, 중형 항공모함에서 운용할 용도로 개량한 F-4K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했다. F-4 팬텀이 당대의 걸물이기는 했지만 영국이 후속 함상 전투기 개발을 포기하고 이를 도입한 것은 그만큼 국력이 쇠퇴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간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영국 해군도 늙은 사자의 위엄을 보여줄 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최고의 공격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블랙번 버캐니어(Blackburn Buccaneer 이하 버캐니어)가 그 주인공이다.



소련 해군을 저지하라

버캐니어는 한마디로 냉전의 유산이다. 제2차대전 후 소련이 슈퍼파워로 급성장하면서 군비를 확장했는데, 그 속도와 내용이 가공할 수준이었다.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지상군은 물론 핵무기, 장거리 로켓 같은 새로운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그리고 제정러시아 당시부터 국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해군력도 엄청난 확장에 나섰다.


사실 소련은 거대한 국토에 비해 영해가 작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국력에 비해 해군력이 강하지 못했고 실제로 러일전쟁, 1, 2차 대전 당시에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도 못했다. 전후 초강대국으로 비상하던 소련은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러한 도그마를 깨기 위해 5대양에서 미국과 맞설 수 있는 해군력을 구축하는 데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다.


당연히 소련의 팽창은 서방을 자극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이 요구되었다. 특히 미국과 함께 대서양을 양분 관할하면서 북해 방향의 소련 진출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영국의 책임은 커져갔지만 급속도로 팽창하는 소련 해군을 일일이 대응하기 어려웠다.

(좌) 영국 공군 소속의 버캐니어 S.2B (우) 버캐니어 SB2  
(좌) 영국 공군 소속의 버캐니어 S.2B (우) 버캐니어 SB2

결국 영국은 유사시 하늘을 통해 소련 해군을 저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아직까지 소련은 원양에서 항공 작전을 펼칠 능력이 없었던 반면 영국은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하여 새로운 공격기의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적함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중무장 상태로 장거리 작전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침 공군에서도 비슷한 목적의 공격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양군(兩軍)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 필요했다.



가해진 제약

사실 군부가 요구한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우선 당시에 영국이 운용 중인 중형 항공모함에 적합해야 했는데, 이는 처음부터 기체의 크기에 제약이 많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안전하게 이착함 할 수 있도록 저속에서 안정도가 높아야 했는데, 그러려면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어야 했다. 이는 당시 슈퍼캐리어를 운용하기 시작한 미국에 비하면 엄청난 제약 요소였다.


공군형만 개발한다면 이런 제한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지만 함재기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분한 무장을 갖추고 장거리를 은밀히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이 개발의 핵심이었다. 군부는 최대 5톤 정도의 폭장을 하고 적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게끔 저고도로 고속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주문했고 항속거리 3천km, 작전반경 7백km를 비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새로운 공격기는 이러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사실 이는 핵폭탄을 탑재하고 적진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기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52년 전통의 함재기 명가였던 블랙번(Blackburn)사가 사업대상자로 선정되어 개발에 나섰다. 블랙번은 착함시의 안정성도 좋고 저공에서의 고속 침투 능력도 좋아야 한다는 상반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심했다.

출처: 한국네티즌본부 
1976년 미 해군의 A-7 공격기와 편대 비행 중인 영국 해군의 F-4K와 버캐니어.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중 버캐니어만이 유일하게 영국산 함재기였다.

이윽고 블랙번은 날개 표면 기류를 조절하여 양력을 증가시키는 경계층제어(BLC-Boundary Layer Control)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플랩과 슬랫을 최대 각도로 작동시키면 동종 크기의 기체보다 2배에 가까운 양력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군부의 요구 조건을 충족한 새로운 공격기는 1958년 초도 비행에 성공, 군 당국의 테스트를 받았고 1962년 버캐니어라는 이름을 부여 받고 제식화되었다.



실전 배치와 활약

영국 해군은 버캐니어를 장비한 6개 항공대(FAA)를 빅토리우스(Victorious)를 비롯한 3척의 항공모함에 배치했다. 영국 공군도 6개 항공대를 운용했는데, 1983년 레바논 내전 당시 평화유지군의 일환으로 파견되어 실전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활약은 1991년 발발한 걸프전에서였는데, 특이하게도 당시에 최신식이었던 토네이도 편대를 목표까지 유도하여 지상공격을 벌였다.

출처: 한국네티즌본부 
퇴역하여 박물관에 전시 중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버캐니어 S.50

버캐니어는 196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S.50형 16기가 수출되었는데, 최초의 실전이 여기에서 벌어졌다. 인종차별주의를 고수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지역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변 앙골라와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내전에 적극 개입했는데, 1971년 최초로 버캐니어가 실전에 투입되었고 이후에도 수시로 활약을 펼쳤다.


총 195기가 생산된 버캐니어는 이들 두 나라에서만 사용되었고 동 시대 여타 전술기와 비교했을 때 실전 경력이 많지는 않아서 성능에 비해 밀리터리 마니아들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무기의 외형이 그다지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버캐니어는 시선을 끌만큼 특징적인 모습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록될 운명

출처: 한국네티즌본부
버캐니어와 F-4K가 주기된 HMS 아크 로열 R09

오늘날 미 해군이 운용하는 공격기는 F/A-18이지만 정작 일선에서 퇴역을 아쉬워했을 만큼 선호했던 공격기는 A-6였다. 함재기로서 보기 드문 엄청난 폭장량과 장거리 저고도 침투 능력이 장점인 공격기로, 버캐니어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미국제 F-4K에 제공기를 양보한 영국 해군에게 버캐니어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더 이상 거대 함대의 운용이 버거웠던 영국은 1978년 아크 로열(Ark Royal R09)을 퇴역시키고 F-4K와 버캐니어를 공군에 인도함으로써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과도 결국 작별을 고했다. 비록 공군에서 1994년까지 운용했지만 원래 개발 목적이 항공모함용 공격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크 로열에서 내려오는 순간 버캐니어의 영광스러운 시절은 막을 내렸다고 봐야한다.

(좌) HMS 이글에 착함 중인 버캐니어 S.2 (우)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 참가한 영국 공군의 토네이도 ADV, GR.1 전투기와 버캐니어, 재규어 공격기. 흥미로운 점은 가장 오래된 버캐니어가 공격 편대를 선도했다는 것이다.
(좌) HMS 이글에 착함 중인 버캐니어 S.2 (우)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 참가한 영국 공군의 토네이도 ADV, GR.1 전투기와 버캐니어, 재규어 공격기. 흥미로운 점은 가장 오래된 버캐니어가 공격 편대를 선도했다는 것이다.
이후 수직이착륙기인 해리어가 영국 해군에서 맹활약했지만, 사실 공격기로서 버캐니어와 견주기는 곤란하다. 현재 영국의 독자적인 전술 작전기 개발 계획이 전무한 것을 고려한다면 버캐니어는 전통적인 이착함 방식을 사용한 영국의 마지막 함재기일 가능성이 크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홀연히 사라져간 공격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