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은빛 날개 MIG 15퍼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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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범 비행 중인 MiG-15 <출처 : wikipedia>
전황을 낙관한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해 무제한의 쾌속 진군을 계속하던 1950년 10월 25일,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초산 일대를 시작으로 처음 보는 새로운 적들이 곳곳에서 등장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임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고를 접한 유엔군 지휘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공군을 제대로 된 무기도 보유하지 못한 전형적인 후진국 군대라고 폄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비정규전과 심리전을 이용하여 아군의 허를 찌르는데 능수능란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던 유엔군은 당황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엔군은 전황의 변화를 일시적인 것이라 오판하였고 우세한 화력이 자신들을 든든히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의 남침 다음날부터 장악해버린 제공권은 감히 공산군이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라 자신하였다.
그런데 중공군이 등장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11월 1일, 압록강 부근에서 작전을 벌이던 미 공군 편대는 처음 보는 공산군 전투기들을 목도하였다. 미국은 대공포에 의한 피격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그들의 공격으로 1기의 F-51과 1기의 F-80이 격추되었다. 그 동안 편안하게 작전을 펼치던 미군 조종사들은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바로 공산권 제1세대 전투기를 대표한 MiG-15의 충격적인 데뷔모습이었다.
종전과 함께 다가 온 새로운 시대
제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소련은 다시 재현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싸움의 규모와 교전 당사자의 능력을 고려할 때 공군의 역할은 서부전선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중폭격기를 이용하여 독일의 심장부를 연일 맹타하는, 이른바 전략 폭격을 벌이는 미국과 달리 독일과 소련 모두는 전선 뒤편의 주요 거점을 타격할 장거리 폭격 능력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양측 공군은 전선에서 혈전을 벌이는 지상군을 가까이서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당대 최고 수준의 전투기를 보유하였던 독일에 비한다면 소련은 전술 작전기 부분마저도 상당히 뒤졌다. 전쟁 후반기에 YAK-9처럼 좋은 전투기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은 P-39를 대량 공여 받아 사용하였을 만큼 전반적인 능력이 뒤졌다. 한마디로 양으로 질적 열세를 만회하였다.
- ▲ 미국에서 호평 받지 못해 대량 공여된 소련군 소속의 P-39. 이처럼 소련의 전투기 제작 기술은 경쟁국에 비해 뒤졌다. <출처 : wikipedia>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는 곤란하였다. 특히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을 놓고 동구권의 맹주 노릇을 하려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전투기들과 능히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기종을 보유하여야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등장한 전투기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했는데 Me 262처럼 제2차 대전 말기에 본격 등장한 제트 전투기는 앞으로 새로운 전투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알려준 시금석이었다.
독일이 남겨 준 유산
전후 수많은 나라들이 제트 전투기 제작에 착수한 것은 당연하였고 이런 시대적 흐름에 소련도 함께 하였다. 1946년 4월 24일 소련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MiG-9가 비행에 성공하였을 만큼 소련의 행보는 빨랐다. 덕분에 프로펠러 전투기 시절에 그다지 명함을 내밀지 못하던 소련은 제트 시대의 선도자 중 하나가 되었다. 기술력이 부족하였던 소련이 이처럼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패전국 독일의 기술과 노하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 ▲ 독일의 Me 262를 그대로 베꼈다고 스탈린이 분노한 일화가 전하는 Su-9. 이처럼 제트 전투기에 대한 기술적 기반이 취약한 소련은 카피를 하면서 기술을 축적하였다. <출처 : wikipedia>
- ▲ 소련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MiG-9 <출처 : wikipedia>
단지 최초라는 의의가 컸을 뿐이지 사실 MiG-9의 성능이 군 당국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미그 설계국은 고속 비행에 적합한 새로운 기체 설계에 곧바로 착수하였다. 바로 후퇴익 구조였는데 핵심은 저속에서의 안정성도 함께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때 기반이 되었던 것은 역시 독일의 기술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완성 직전까지 개발이 진행되었던 Ta-183이 롤 모델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덕분에 MiG-15는 마치 약속한 것처럼 평생 라이벌이 되는 미국의 F-86과 동일한 35도의 후퇴각을 가진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 프로젝트 I-310으로 명명된 새로운 전투기 개발은 일사천리로 무난하게 이루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기술력이 부족한 소련은 노획한 독일의 유모 004 엔진이나 BMW 003 엔진을 그대로 카피하여 사용하였지만 품질이 떨어져서 예상했던 성능을 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영국이 베푼 우연한 도움
사실 독일의 엔진도 당대 최고를 자랑하던 영국의 제트 엔진에 비해 성능이 뒤졌다. 하물며 소련이 단지 역설계하여 카피한 RD-10, RD-20 엔진은 독일제 원형에 비해 더욱 성능이 뒤졌다. 그런데 이렇게 난관에 막혀 고민하던 소련에게 엉뚱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1946년 말, 영국이 독일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최신형 롤스로이스 넨 Mk I 엔진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소련이 보유한 엔진보다 추력이 2배나 강력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에서 정식으로 기술 도입을 요청하여 영국이 응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전략물자를 적성국에 함부로 제공한 행위였다. 당시 영국 군부는 정치인들의 행위가 너무 경솔하다며 크게 반발했고 소련도 도움을 요청한다고 설마 영국이 그런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기대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예상 밖의 결과였다.
- ▲ 인상적인 전방 인테이크. 이런 형식은 MiG-19까지 이어진다. <출처 : wikipedia>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얻은 미그 설계국은 이를 I-310에 부착하여 그들이 원하던 고성능 제트 전투기를 완성하였다. 소련은 즉시 엔진 복제에 들어가 성능이 거의 비슷한 클리모프 RD-45 엔진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신예기는 MiG-15로 명명되어 1947년 12월 30일 스탈린이 직접 보는 앞에서 공개 비행을 실시하고 곧바로 양산에 돌입하여 일선에 속속 공급되었다.
그들이 등장한 곳
이 글 처음에 MiG-15의 등장을 급작스러운 것으로 묘사하였지만 사실 미국도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다만 소련의 기술력이 지난 제2차 대전 당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폄하하고 있어 그다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MiG-15는 그때까지 미국이 한반도에 투입한 F-80, F-84보다 시속 160km 이상 더 빠르고 날렵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당연히 미국은 당황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에서 MiG-15는 유엔군 조종사들에게 은빛 날개의 공포로 자리 잡았다. F-86이 등판하며 겨우 맞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투기의 하드웨어적인 성능으로는 MiG-15가 좀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자타가 평가할 정도였다. 이런 열세를 미국은 경험 많은 조종사들의 능력으로 간신히 극복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산군은 이렇게 뛰어난 전투기를 너무 제한적으로만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비행 반경이나 피격 시 기체 노획 등을 우려하여 흔히 미그 앨리(MiG Alley)라 불린 압록강 하구의 평안북도 일대에서만 작전을 벌인 것이다. 여기에는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교전 중 상황이 불리하면 즉시 전장을 이탈하는 전술도 자주 구사하였는데 이 때문에 한때 격추비가 10배 정도 F-86이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였다.
- ▲ 한국전쟁 당시 MiG-15가 주로 출몰한 미그 앨리. 이처럼 제한적인 곳에서 작전을 벌이게 된데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출처 : wikipedia>
몰라서 무서웠던 시절
이처럼 공산군 점령 지역에서만 교전이 일어나다 보니 소련은 피격된 F-86을 수거하여 분석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은 그렇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은 당시로써는 엄청난 고액인 10만 달러의 보상금을 걸고 적성국 조종사들의 귀순을 유도하였다. 그 결과 1953년 3월 5일 폴란드 공군의 프란시체크 자레키가 덴마크로 귀순하였고 뒤이어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9월 21일 북한 공군의 노금석 소위가 김포공항으로 탈출하였다.
- ▲ 귀순을 종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삐라. 사진 속의 인물은 최초로 MiG-15를 몰고 서방으로 탈출한 폴란드 공군 소속의 프란시체크 자레키다. <출처 : Wikipedia>
- ▲ 북한 공군의 노금석 소위가 몰고 귀순한 MiG-15 <출처 : wikipedia>
이렇게 확보된 MiG-15는 곧바로 미국 본토로 옮겨져 대대적으로 분석에 들어갔는데 한마디로 모르기 때문에 무서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개발과 동시에 대량 보급되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중국 등에서 면허 생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MiG-15는 소련만이 소중하게 보유하였던 필살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우려와 달리 소련은 F-86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여 후속기 개발에 매진하던 중이었다.
향후 20년 이상을 주력기로 사용할 것을 예정하고 전투기를 개발하는 최근의 추세에 비해 제1세대 전투기들은 개발과 전성기가 상당히 짧았는데 MiG-15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제트시대를 개막하였다는데 것을 제외한다면 드러난 문제점을 수시로 개선하여야 했을 정도로 부족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미국이 신예기를 속속 등장시켰을 때 소련이 MiG-17, MiG-19 같은 대항마로 곧바로 대응하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MiG-15 때문이었다.
- ▲ 체코슬로바키아에서 S-103이라는 제식명으로 면허 생산한 MiG-15bis. <출처 : wikipedia>
MiG-15의 개발과 운용에서 터득한 노하우는 후속기 개발에 훌륭한 기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제2차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전투기를 제작하였던 소련(러시아)은 MiG-15의 성공에 힘입어 어느덧 미국에 맞서 유일하게 하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슈퍼파워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소련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점이 MiG-15의 진정한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원(MiG-15bis 기준)
전장 10.08m / 전폭 10.08m / 전고 3.7m / 최대이륙중량 6,105kg / 최대속도 1,059km/h / 항속거리 1,240km / 작전고도 15,500m / 무장 23mm NR-23 기관포 2문, 37mm N-37 37 기관포 1문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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