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조선[朝鮮]과 대한[大韓]제국

화성행궁

바래미나 2014. 6. 15. 02:54

화성행궁

    조선 정조 20년(1796)에 수원성을 쌓은 뒤 팔달산 동쪽기슭에 세운
    행궁으로 수원성의 원래 이름이 화성이었으므로 화성행궁이라고 부릅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합니다. 화성행궁 (華城行宮)은 정조가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1] 구조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다.
    [2]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신풍루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
    200명이 살면서 지키는 건물이다.
    남군영은 신풍루를 마주보는 쪽에서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 1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북군영 북군영 역시 남군영과 마찬가지로 친군위의 기마병이 숙위하는 건물이다. 북군영 역시 1789년에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서리청 서리청(西吏廳)은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서리란,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해 있다. 비장청 비장청(裨將廳)은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세워졌는데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집사청 집사청(執事廳)은 국왕이 쓰는 문방사우를 보관하고,
    비품을 관리하는 것과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1789년에 세워졌다. 좌익문 좌익문(左翊門)은 신풍루를 통과하여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중양문 앞에 위치해 있다. 1790년에 완공되었고, 남쪽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외정리소 외정리소(外整理所)는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당시에
    행사를 준비하던 임시 기관이었다. 정조의 행차가 끝난 후 외정리소라 명명하고 임금이 행차하실 때의
    행사를 준비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의 정리소는 장용영 내영에 있었는데 1796년에 행궁이 완성되면서 현재의 위치가 되었다. 중앙문 중양문(中央門)은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앞에 있는 문이다.
    1790년에 완성되었고,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을 두었다. 봉수당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유여택 유여택(維與宅)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년)에 건립되어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명칭을 가졌다. 경룡관 경룡관(景龍館)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했던 부속건물이다.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졌는데, 2층 구조로 만들고 2층은 누마루로 만들고 1층을 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 이름붙였다. 장락당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에,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794년에 봉수당의 남쪽에 동향으로 세워졌다. 복내당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던 곳으로 장락당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낙남헌 낙남헌(洛南軒)은 1794년에 완공된 건물로 1795년의 행차시에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득중정 득중정(得中亭)은 정조가 활을 쏘던 정자로 1790년에 정조가
    세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쏴 다 맞춘 기념으로 득중정으로 지었다.

신풍루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광장에 있는 고목

봉수당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정조는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왕의 좌석

정조 어머니 회각연

정조왕이 어머니 회갑연에 절하고

정조왕

낙남헌 낙남헌(洛南軒)은 1794년에 완공된 건물로 1795년의 행차시에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장락당 장락당(長樂堂)은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에,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1794년에 봉수당의 남쪽에 동향으로 세워졌다.

궁중무예 11 :30--12 :00 까지 행한다

화홍문

수원천

방화수류정

 

 

방아수류정에서 본 경치

화성 성곽길

화성 성곽

 

화성성곽들레

병사 훈련장

화성 박물관 앞 현판

정조왕 행군

정조왕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