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해,공군,종합

다카시마 노부요시 류큐대 명예교수 “日, 태평양전쟁 본질 알아야 진정한 반성”|

바래미나 2013. 12. 10. 16:28

다카시마 노부요시 류큐대 명예교수 “日, 태평양전쟁 본질 알아야 진정한 반성”| 

“일, 태평양전쟁 본질 알아야 진정한 반성”

 

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참의원회관 지하 1층에서 열린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모임’의 기자회견에 참여한 다카시마 노부요시 류큐대 명예교수가 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군의 말레이반도 진격 경로를 설명하고 있다.


다카시마 류큐대학 명예교수

전쟁의 시작이 진주만 공습?

55분전 영국령 코타바루 침공

아시아 침략전쟁 성격 분명해

일, 서구 침략 막은 성전 신화깨야


“일본인들은 여전히 태평양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이를 사회에 더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 12월8일 발발한 태평양전쟁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진주만 공격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다카시마 노부요시(71·사진) 류큐대 명예교수는 6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전쟁이 처음 시작된 곳은 당시 영국령이었던 말레이시아의 코타바루라고 힘줘 말했다. 동남아시아 자원 확보를 위해 말레이반도를 점령해야 했던 일본군이 먼저 이곳의 영국군 공군기지를 파괴해 본대의 상륙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 시각으로 진주만 공격이 시작된 것은 새벽 3시20분이지만 코타바루 공격은 그보다 55분 이른 새벽 2시25분이었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카시마 교수는 “진주만이 아니라 코타바루에 주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고 말했다. 일본 우익이나 야스쿠니신사의 전쟁박물관인 유슈칸은 태평양전쟁을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해 서구의 침략에 맞선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진주만 공격의 신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다카시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일본이 코타바루를 공격한 것은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석유 등 자원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자원이 부족해졌는가.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시아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중일전쟁이 장기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떠올려본다면 태평양전쟁의 본질은 아시아 민중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41년 12월8일 반나절 동안 벌어졌던 ‘일-타이 전쟁’이다. 그보다 1년 전인 40년 6월 일본은 타이와 5년 동안 중립과 불가침 조항을 담은 ‘일-타이 우호화친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일본이 이를 무시하고 타이 영토를 침범해 반나절이지만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이후 일본 정부는 타이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 타이 영내의 무사통과를 허용하도록 했다. 다카시마 교수는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할 때 선전포고만 늦게 한 게 아니라 타국과 맺은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전쟁범죄도 저질렀다”며 “당시 일본군의 사령관은 천황이었기 때문에 천황의 전쟁책임론이 불거질까 두려워한 일본 정부가 전후 이런 내용을 철저히 숨기게 된다”고 말했다.

다카시마 교수는 68년부터 30년 동안 고교 사회과 교사로 일한 뒤, 96년부터 류큐대로 옮겨 역사를 가르쳐왔다. 그는 “일본이 침략과 식민지배를 통해 아사아 주변 국가에 피해를 줬다는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선 일본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이런 상식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속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모임’은 새해 1월19일 메이지대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는 첫 연구 모임을 시작할 예정이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