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기 용도로 사용된 FB-111 |
한국 공군의 ‘FX(차세대 전투기 도입사업)’는 상당히 굴곡이 많은 무기 도입사업이었다. 노후기 대체를 위해 1993년에 120기의 최신예 전투기 도입 계획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는데, 1997년 이른바 IMF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2009년까지 1차로 40기의 F-15K가 도입되었고 2012년까지 2차로 21기가 추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는 최초 예정하였던 물량의 절반에 불과하여 곧바로 3차 사업이 개시되었다.
이처럼 여러 변수로 말미암아 대략 2009년까지 120기 도입을 완료하려던 계획과 달리 시기적으로도 사업 전체가 상당히 지연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 사이에 새로운 후보 기종들이 등장하면서 3차 사업에 와서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스텔스 성능을 앞세운 F-35였다. F-35는 노후화된 미 공군, 해군, 해병대의 기존 전술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대체할 목적인 ‘JSF(3군 통합 다목적 전투기 도입사업)’에 따라 탄생하였다.
사실 F-35도 예정 개발 기간을 초과하였을 만큼 제작에 애를 먹었는데 그렇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JSF 그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개발 및 도입가를 대폭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하나의 플랫폼을 이용하여 성격이 다른 여러 전술기를 제작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과 달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런 시도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1960년대 초 ‘TFX(차세대 전술 전투기 도입사업)’으로 불린 프로젝트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시작은 F-35의 경우와 조금 달랐지만 각 군의 전투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하려던 목적은 같았다.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성과도 있었다. 비록 서류상으로 전투기로 구분하지만 저고도로 장거리를 침투하여 정밀 공격이 가능한 유명한 폭격기가 탄생한 것인데, F-111 아드바크(Aardvark)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잃어버린 ‘고도’의 잇점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면서부터 고도는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다. 하늘에서 교전이 벌어질 때 일단 상대보다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 이길 확률이 높았다. 레이더가 등장하며 쉽게 탐지가 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의 B-29 폭격기처럼 고도가 높으면 뻔히 보면서도 요격이 어려웠다. 하지만 제트 시대가 도래하면서 요격기가 신속히 치고 올라올 수 있게 되고 SAM(지대공 미사일) 같은 새로운 요격 수단이 생기자 상황은 달라졌다. 마하 3으로 달리는 SR-71 같은 정찰기가 아닌 이상, 폭격 임무를 띤 전투·폭격기가 높은 고도를 나는 것은 무리한 일이 되었다.
작전 지역이 크지 않다면 SEAD(방공망제압)로 상대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킨 후 임무를 수행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만하지만 장거리를 침투하는 경우라면 문제가 컸다. 우선 스트라이크 패키지(Strike Package)를 구성하게 되는 각 기종 별로 작전 반경이 상이하여 함께 작전을 펼치기가 물리적으로 곤란하였다. 이처럼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고공 침투는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은 스텔스(Stealth)가 대세가 되었지만, 결국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고도로 침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공기 밀도가 높은 저고도에서의 비행은 속도 저하와 더불어 연료 소모를 증가시켜 작전 영역을 감소시켰고 경우에 따라 지형지물에 방해를 받았다. 1950년대 미국은 기존 전투기, 폭격기를 대상으로 저공 침투 능력을 실험하였지만 실망스런 결과를 얻었고 결국 이런 목적에 걸맞는 새로운 기종의 개발에 나섰다.
핵심은 단독으로 저고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되 임무 수행 후 빨리 현장을 이탈할 수 있도록 고속을 낼 수 있어야 했다. 전술 핵폭탄의 운반도 가능하지만 한 번 출격으로 최대한 많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대용량 폭장과 정밀 타격 능력이 있어야 했다. 이런 조건에 맞추려면 덩치가 커야 했지만 그렇다고 대형 폭격기처럼 기동력이 떨어지면 곤란하였다. 즉 중무장한 채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날렵한 전폭기가 요구되었다.
사연 많은 과정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기에 해군도 원거리에서부터 함대를 방어할 강력한 새로운 함재기의 도입을 고려하던 중이었다. 각 군의 신예 전투기 도입 사업을 보고받은 국방성은 이 두 기종이 고속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장거리 비행 및 대량의 무장 능력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TFX를 실시하도록 조치하였다. 하지만 저고도 침투 전폭기를 원한 공군과 고성능 방공 전투기를 원한 해군의 상세 요구는 너무 상이하였다.
이처럼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많은 공군과 해군은 반발하였지만 경제인 출신 국방장관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이를 무시하였다.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집행하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는 이미 각 군별로 따로 부여하던 군용기 제식부호도 하나로 통일시켰을 만큼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더해 원래 그런 목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사용 중인 해군은 물론 공군도 도입을 고려하던 F-4 팬텀의 존재는 TFX의 당위성을 뒷받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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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군은 격론 끝에 1961년 고도에 따라 최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쌍발의 대형 가변익기로 개발한다는 원론에 간신히 합의하였다. 이에 맞는 새로운 전술기의 입찰을 실시되어 경쟁 끝에 제너럴 다이나믹스(General Dynamics)가 주 제작사로 선정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64년 12월 공군형인 F-111A가, 이듬해 5월에는 그루먼(Grumman)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해군형 F-111B가 시험 비행에 각각 성공하였다.
엔진 문제 등으로 고생하였지만 실험 결과 그럭저럭 조건을 충족한 공군형은 개발이 완료되어 1967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군형은 항공모함에서 운용하기 곤란한 너무 무거운 중량 등의 여러 문제로 말미암아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데 실패하며 결국 1968년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F-111의 후속 대타가 너무나 유명한 F-14인데 F-111B의 개발에 적용된 많은 기술이 F-14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논란과 개량
당시는 월남전 중이라 실전 테스트는 원하면 즉시 할 수 있었다. 미 공군은 6기의 F-111로 구성된 제428전투비행대대를 1968년 3월 월남에 파견하여 적 후방 거점 타격에 투입하였다. 모든 신예기가 마찬가지지만 F-111 또한 개발 당시에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었는데, 특히 최신예 AN/APG-110 지형추적레이더를 비롯한 다양한 장비가 저고도에서 고속 비행 능력을 향상시켜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예상대로 야간에 굴곡진 계곡을 따라 약 80미터의 고도를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돌파하여 목표물을 공격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컴뱃랜서(Combat Lancer)’로 명명된 총 55회의 작전 중 3기가 추락 당하였는데 문제는 피격이 아니라 결함에 의한 사고였다는 점이다. 이에 실망한 미군은 F-111을 본국으로 철수시켜 조사와 개량에 착수하였다. 이처럼 개발 당시부터 많은 삐걱거림이 있다 보니 의회에서도 F-111에 대해 문제를 삼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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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란을 잠재우려면 실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야 했다. 개량을 마친 2개 비행대대의 F-111가 1972년 재차 월남에 파견되었는데 1975년까지 4,000여 회의 작전에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B-52 폭격기의 절반 수준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폭장량은 목표물을 초토화시키는데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소소한 여러 문제점은 꾸준히 노출되었다.
특히 너무 앞선 성능을 구현하려는 욕심 때문에 당시로는 기술력이 부족하였던 전자 장비가 툭하면 문제를 일으켰다. 1970년부터 공군에 인도 된 F-111D형은 너무 문제가 많아서 결국 간략한 전자 장비를 장착한 F-111E형의 배치가 먼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최종 양산형인 F-111F도 엔진 부분에 일부 문제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마지막까지 F-111은 기계적으로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마지막 활약
장거리 폭격을 위해 탄생한 F-111이 그러한 목적대로 사용된 사례가 1986년 4월에 있었다. 영국에 주둔한 제48비행단 소속의 F-111들이 왕복 10,000킬로미터를 13시간 동안 비행하여 리비아를 공습한 ‘엘도라도 협곡작전(Operation El Dorado Canyon)’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 주변국이 영공 통과를 허락하지 않아 공해상으로 빙 돌아서 가다 보니 엄청난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된 것인데 이 과정에서 무려 12차례의 공중 급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너무 무리가 많았던 작전이었다. 최초 24기(EF-111 5기 별도)가 출격하였지만 문제가 발생하면서 EF-111 1기를 포함한 6기가 곧바로 기지로 귀환하였다. 고생 끝에 리비아까지 날아가서는 단지 4기만이 예정대로 폭탄을 투하하였고 작전 도중 1기가 격추당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 여건을 고려한다면 모든 작전을 부근에 전개한 해군이 하는 것이 옳았다. 이후 1991년 발발한 걸프전에서 성공적으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기갑부대 공격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비록 전투기를 의미하는 F로 분류되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탄생부터 마지막까지 F-111은 두말할 필요 없는 폭격기였다. 공대공 전투를 위한 일부 무장을 장착하였지만 이는 최후의 자위 수단이었을 뿐이고 폭탄을 던지고 오는 임무에 철저히 특화되었다. 미 전략공군사령부에서는 이 때문에 중거리 전략 폭격기인 FB-111으로 개조하여 운용하였을 정도였다. 이후 모든 F-111은 임무를 F-15E에 물려주고 1998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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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11의 삶을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애초 구상대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운용되었지만 중간에 TFX라는 굴레를 쓰면서 엉뚱한 생애를 살 수도 있었다.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3군이 공통으로 사용 가능한 전투기로 탄생하였다면 전투기를 빙자한 폭격기라는 말 대신 F-111은 어쩌면 다른 타이틀을 부여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동안 보여준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F-111은 폭탄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이 역시 제격이다.
제원(F-111F 기준)
전장 22.4m / 전폭 19.2m / 전고 5.22m / 최대이륙중량 45,300kg / 최대속도 마하 2.5 / 항속거리 6,760km / 작전고도 20,100m / 무장 M61 발간포 1문, 9개 하드포인트에 14,300kg 무장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자료제공 / 유용원의 군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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