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6·25 자료들(1950·06·25)

남아공 참전조종사 손녀, 장학금 지원한 한국공군 장교들에게 '감사편지'

바래미나 2013. 9. 19. 00:04

 

남아공 참전조종사 손녀, 장학금 지원한 한국공군 장교들에게 감사편지

noname01 (1).jpg
젊은 남아공 전투조종사 시절 175소티 달성 기념사진

noname01.jpg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 조 주베르(Joe Jubert, 87세)

noname03.JPG
175회 출격 기념 초상화를 들고 있는 조 주베르(좌)와 레베카 주베르(우)

남아공 참전조종사 손녀, 장학금 지원한 한국공군 장교들에게 감사편지
- 공사 32기 동기생회, 남아공 참전조종사 손녀에게 고교 3년간 장학금 지원
- 할아버지 조 주베르는 6․25 전쟁에서 175회 출격한 베테랑조종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여대생이 그동안 장학금을 지원해 준 한국 공군사관학교 32기 동기생회에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 주베르(Rebekah Joubert, 19세).

그녀는 2012년 프레토리아 시(市)의 프레토리아 여고(Pretoria High School for Girls)를 졸업하고, 지금은 프레토리아 대학(University of Pretoria)에 진학해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다.

레베카와 공군사관학교 32기 동기생회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공사 32기 동기생회는 공군사관학교 입학 3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마침 그 때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어서 6․25 참전국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방안을 찾게 되었고, 6․25 전쟁 당시 공군부대를 파병했던 남아공 참전용사의 후손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동기생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동기생회에서는 남아공 한국전참전용사회의 추천을 받아 6․25 전쟁 참전조종사의 손녀인 레베카 주베르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 주베르(Joe Jubert, 87세)는 6․25 전쟁에서 175회의 출격을 기록한 베테랑 조종사다. 

2010년 9월 17일, 공사 32기를 대표해 이창희 준장(당시 대령)과 안상훈 대령은 주한 남아공대사관에서 남아공 참전용사 후손에 대한 장학금 기증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남아공 프레토리아 여자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레베카가 2012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매년 1600달러씩 총 4800달러를 장학금으로 지원했다.

올해 레베카는 남아공 프레토리아 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교에서 영어와 역사 교육을 전공해 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레베카의 할아버지 조 주베르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 한국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는데, 한국 공군 장교들이 나와 내 손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고마웠다. 6․25 전쟁에서 한국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함께 싸운 이들 중에 남아공 조종사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멋진 나라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한국의 젊은이들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레베카 주베르의 편지 전문

noname012.jpg

  안녕하세요, 저는 조 주베르의 손녀딸인 레베카 에일린 주베르라고 합니다. 2010년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장학금을 처음 받게 되었고 이 도움은 제가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2012년 프레토리아 여고를 입학하여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는 도자기 클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2년 동안 클럽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클럽에서 활동을 하면서 헌신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학교에서 인정해주어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과목들 중에는 영어, 아프리칸스어, 수학(고급반), 생활, 미술, 역사, 그리고 생물 등이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러 제가 지금까지 프레토리아 여고와 같은 훌륭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깊은 배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년 저는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면서 교육학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프레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어와 역사 교육을 전공하여 영어나 역사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또 다시 훌륭한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 생각하고 여러분의 배려가 이를 가능케 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87세의 연세에도 불과하고 매우 건강하셔서 큰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도 매우 건강하시고 가족들에게도 여전히 크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계십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제 인생의 첫 걸음을 이렇게 잘 내디딜 수 있도록 지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013년 3월 2일, 레베카 주베르 올림


6․25 전쟁에서 175회 출격한 남아공 조종사, 조 주베르
- 6․25 전쟁에 두 번 참전, 수훈비행십자훈장 두 번이나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 조 주베르(Joe Jubert, 87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175회를 출격한 베테랑이다. 1943년, 18세의 나이로 남아공 공군에 입대해 F-51 조종사로 활약했다. 

6․25 전쟁에 자원한 조 주베르 중위(당시 계급)는 1950년 9월 26일 한국에 도착해 UN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출격하기 시작했다.

1951년 5월 4일, 조 주베르는 무스탕(Mustang) 4기 편대를 이끌고 한강 이북 지역인 곡수리(曲水里)능선에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미군 지상군을 근접지원(Close support)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군이 적과 가까이에서 있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군의 피해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지상 300m 높이에 구름이 끼어 지상 상황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은 대성공이었다. 이 날 곡수리에서는 공군과 지상군의 합동 공격으로 400여 명 이상의 적군이 죽거나 다쳤다. 조 주베르는 성공적인 임무수행으로 수훈비행십자훈장(D.F.C)을 받았다. 1951년 5월 13일까지 100소티(sortie)의 임무를 수행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noname06.jpg
조 주베르가 받은 공군수훈십자(D.F.C.) 상장 사진

1952년 1월 5일, 조 주베르는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1952년 5월 8일에는 24대의 F-51을 지휘하며 적의 수안(遂安) 지역에서 대공포화망을 뚫고 보급수송 집결지를 공격, 와해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수훈비행십자훈장(D.F.C)을 한 번 더 받았다. 

그는 또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적 미그(MIG)기들과 싸운 일화를 기억했다. “우리 무스탕(Mustang) 6기 편대와 적 미그기 4대가 공중전(Dog fight)을 벌였다. 적 미그기 기관포의 공격을 받아 아군 항공기 한 대가 격추되었다. 나는 기수를 들어 편대 위쪽으로 적을 유도했다. 적 미그기 3대가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나와 우리 무스탕 편대는 좌측으로 선회 기동하며 적기를 성공적으로 격추시켰다.”

두 번째 참전 기간인 6월 22일까지 75소티를 출격해 총 175회 출격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주베르는 공군 최고 영예인 수훈비행십자훈장(D.F.C) D.F.C (Distinguished Flying Cross) : 수훈비행십자훈장. 미 대통령이 공군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훈장을 두 번, 공군수훈장(Air Medal)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
noname09.jpg


남아공으로 돌아온 조 주베르는 10년간의 조종사 생활을 마치고, 1952년 공군 대위로 전역해 남아공항공사(South African Airways)에서 일한 뒤 은퇴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조 주베르는 6․25 전쟁에 참전한 것을 최고의 명예이자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고, 한국의 자유를 지켜냈다. 그리고 한국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가슴 벅찬 일이다.”
 
noname10.jpg
조 주베르(계단 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동료 조종사들

● 한반도에서 위세 떨친 ‘창공의 치타들(Flying Cheetah)’
6․25 전쟁에는 전세계 16개 국가가 UN군의 일원으로서 전투병을 파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6․25 전쟁에 1개 공군 전투비행대대를 파병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약한 정예조종사들로 구성된 제2전투비행대대였다.


noname11.jpg
남아공 공군의 F-51D 항공기

6․25 전쟁에 참전한 남아공 공군은 1950년 9월 26일, 장교 50명과 157명의 장병들이 더반(Durban)을 출발했다. ‘창공의 치타들’로 불리는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한국에서 철수한 1953년 10월까지 총 826명이 인원이 참전해 싸웠다.

1950년 11월 16일, 13명의 장교와 21명의 장병들로 구성된 선발부대가 부산기지(K-9)에 도착했다. 19일 아침, F-51D 4기 편대가 출격해 청천강 북쪽 북한군 병력 집결지와 야전보급로를 공격한 것이 첫 작전이었다.

이들은 미 5공군 제18전폭비행단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미군이 제공한 F-51D 무스탕(Mustang)과 F-86 세이버(Sabre) 전투기를 운용하며 평양과 개성 등 최전선 상공을 누볐다. 교량과 철로 파괴 등을 통해 적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력시설과 탄약고를 폭파하는 한편, 아군의 지상공격을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1952년까지 경남 진해비행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53년 1월부터는 F-86 세이버로 경기 오산비행장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펀치볼(Punchbowl)’, ‘피의 능선(Bloody Ridge)’,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등 주요 전장에서 유엔지상군을 항공지원하는 작전을 수행하여 공산군을 압박하는 전과를 올렸다.

6․25 전쟁 60주년 사업단에서 발간한 「6․25 전쟁의 기억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2010)」에 따르면 남아공 공군은 6․25 전쟁 기간 동안 적 2,276명을 사살하고 46개의 교량과 472개의 철로, 615대의 차량과 18대의 전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당시 참전한 남아공 공군 중 34명이 목숨을 잃었고, 9명이 포로가 되었다. 20대의 F-86F 중 4대, 95대의 F-51D 중 74대가 격추 또는 파손됐다.
noname21.jpg
남아공 공군 조종사

111.jpg
교육을 받고 있는 남아공 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