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공산주의 세력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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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년 1953~2013 <상>잊혀진 전쟁에서 자랑스러운 전쟁으로
해외 참전용사들이 말하는 한국전
미 뉴저지주 새들브룩 주택가에 세워진 6·25 전쟁 참전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참전 용사 패터슨 조지 브루스기즈(왼쪽 사진). 미국 뉴욕주 호파의 자택 지하에 마련된 미니 6·25 전쟁박물관에서 낡은 태극기를 펼쳐 보이는 참전 용사 살바토레 스칼라토. [특별취재팀]
“지금도 헐떡거리던 숨소리가 귓전에 생생하다.”
미국 뉴욕주 호파의 아담한 자택 지하에 꾸며놓은 미니 전쟁박물관에서 살바토레 스칼라토(80)는 녹슨 단검을 보여줬다. 1952년 9월 지금의 임진각 북쪽 '제임스타운' 전선에서 그는 열여섯 살쯤 돼 보이는 중공군 소년병과 맞닥뜨렸다. 단검을 휘두르며 덤벼드는 그를 향해 스칼라토는 엉겁결에 철모를 집어던졌다. 소년병이 철모를 피하는 사이 스칼라토는 그의 단검을 빼앗아 가슴 깊이 박아 넣었다. 그러곤 무의식적으로 품에 넣었던 그 단검이 운명처럼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52년 열아홉 살 청년이던 스칼라토는 “꽹과리를 치고 나팔과 호루라기를 불며 공격해 오는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영화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전쟁터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에 다리와 팔, 그리고 목에 부상을 입은 채 귀국했다. 하지만 따뜻한 환대는 없었다.
미 의회, 1950년 전쟁 아닌 분쟁으로 규정
미국인에게 한국은 너무나 멀고 낯설었다. 스칼라토는 “당시 한국전은 미군이 아니라 유엔군의 전쟁으로 인식됐다”고 말했다. 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보고받은 트루먼은 미 의회 대신 먼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달려갔다. 당시 비토권을 쥐고 있었던 소련은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대만 대신 중국을 상임이사국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틈을 타 트루먼은 6·25 당일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안보리 결의안 82호, 이틀 뒤엔 남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군사 지원을 촉구하는 결의안 83호를 전격 통과시켰다. 이를 명분으로 트루먼은 미 의회 재가 없이 일본에 주둔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미 해군과 공군을 한반도에 즉각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7월 7일 유엔군 파병을 결정한 결의안 84호가 통과되자 미 의회도 재정 지원을 승인했지만 트루먼의 '우회 전략'은 두고두고 한국전 참전용사의 발목을 잡았다.
미 의회가 참전을 결의한 베트남전과 달리 한국전은 미국에서 '전쟁(war)'이 아니라 '분쟁(conflict)'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60~70년대 미국을 휩쓴 반전 여론까지 겹치며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치부됐다. 스칼라토는 “육박전을 벌였던 소년병의 얼굴이 떠올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지만 내놓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무의식 속에서 아내를 해칠까봐 겁나 잠자리도 따로 해야 할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90년대 한국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함께 꽃피우면서 한국전의 위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한국전 참전용사의 끈질긴 청원으로 마침내 2000년 미 의회가 한국전 참전을 뒤늦게 공식 선포했다. 스칼라토는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전(Korean War)'이라고 표기된 종군기장을 받고 그동안 가슴 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풀리며 눈물이 났다”며 자신의 박물관에 전시해 둔 기장을 자랑스레 보여줬다.
유엔의 집단안보 이념 처음 실현된 곳
뉴저지주 새들브룩 주택가에도 2000년 아담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대전 참전용사회와 뉴저지주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뜻을 모은 결과였다. 미군 73탱크대대 포병 출신으로 참전비 건립을 주도한 참전용사 조지 브루스기즈(80)는 “한국전이야말로 유엔의 집단안보 이념이 처음 실현된 전쟁”이라며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6·25는 잊혀진 전쟁에서 '자랑스러운 전쟁'이 됐다. 한국전 당시 소령으로서 미 3사단 보병2대대 부사령관이었던 존 싱글러브(92) 예비역 소장은 “한국은 미군의 자랑”이라고 단언한다.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이며 보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6·25를 잊혀진 전쟁이라 보는 건 잘못된 시각이다. 중국에 물어보라. 중국으로선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일 것이다. 6·25는 공산주의와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이다.”
프랑스군 사령관, 대장 계급 버리고 참전
이는 비단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미국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6·25 참전군인협회 로제 캥타르(61) 사무총장은 “유럽에서도 점점 더 6·25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파병된 프랑스군 사령관은 대령급이었다. 그런데 랄프 몽클라르 대장이 그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한국에 가기 위해 대장 계급을 버리고 스스로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의미 없는 전쟁을 위해 대장 계급을 버리는 사람이 있겠나.”
프랑스는 2004년 파리 개선문 광장에 6·25 참전 기념 동판을 설치했다. 프랑스군이 참전한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 아래 설치한 8개의 동판 중 가장 최근의 것이다. 6·25가 프랑스에서도 더 이상 잊혀진 전쟁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 뉴욕·오타와=정경민 특파원, 워싱턴· 내슈빌=박승희 특파원, 런던·버튼온트렌트=이상언 특파원, 파리=이훈범 기자, 아디스아바바·메켈레·앙카라=정재홍 기자, 마닐라·방콕·촌부리=강혜란 기자, 보고타·카르타헤나·키브도=전영선 기자, 캔버라·골드코스트=유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