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아직 세상에 없었던 어린 시절…친구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일본에 가면 남자랑 여자랑 발가벗고 같이 목욕을 한대”.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충격적인 말이었기에 기억은 오래 갔다. 동시에 일본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풍습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뇌리에 새겨졌다.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다. 페리 제독은 일본을 개항시키고 협약을 맺어 쇄국의 빗장을 풀게 만든 사람. 그는 1853년 3500t급 흑선과 대포를 장착한 검은 증기선 4척을 이끌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만 우라가(浦賀) 항에 입항했다. 당시 서구문물을 처음 접한 일본인들은 페리 제독 일행을 보고 충격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검고 굵은 연기를 무지하게 내뿜는 배들을 보고 ‘흑룡’이라고 짐작했던 것. 그런데 일본인을 보고 페리 제독 역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충격이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화적 충격을 일컫는다. 이른바 혼욕문화나 흑치(黑齒, 오하구로(お齒黑)) 풍습이 그것. 페리 제독이 일본에 도착하던 무렵은 에도 시대 말기. 성인 남녀가 한 목욕탕에서 벗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 그는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이 극복할 수 없는 문화 충격을 ‘일본원정기’라는 책을 통해 남겼다. 페리 제독의 책 ‘일본 원정기’에 실린 혼탕 삽화
유곽과 게이샤 문화가 극히 융성했던 에도시대는 목욕문화도 발달시켰다.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목욕을 즐긴 민족. 덥고 습한 섬나라 일본은 지정학적 기후학적으로 목욕을 즐길 수 밖에 없다. 대규모 온천탕은 에도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에도시대의 혼탕 그림
이 시기 대중탕에는 최근 한국의 세신사(속칭 때밀이) 형태의 서비스가 제공됐다. 유나(湯女)라고 불리던 여성들이 대중탕마다 성업했다. 유나의 존재는 매춘으로 이어졌다. 에도시대 대중탕은 목욕으로 몸도 풀고 사교의 장소이자 매춘도 가능한 멀티 클럽이었던 셈. 당시 대중탕 2층에는 오늘날 우리 찜질방 같은 여흥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에는 장기판 등이 놓여 있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교가 가능했으며 도박도 성행했다.
한편 대중 혼욕문화에 대한 자성조차 없었던 일본은 페리 제독 일행을 맞고 메이지 시대에 돌입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목욕 문화가 문명이 아니라 퇴폐였음을 깨닫는다. 혼욕 문화의 근절까지는 개항 이후 무려 100여 년이 걸렸다. 1791년에 천황가가 ‘남녀혼욕금지령’이 선포한 것. 그러나 이 마저도 혼욕을 금지한 게 아니라 대중탕에서 이루어지는 매매춘을 금지한 법령이었다. 오늘날 일본에는 혼탕문화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만 혼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는 데…대중적인 혼탕은 사라졌을 지 모르지만 수요는 있는 모양이다. 여러 형태의 온천탕을 구비하고 손님을 맞는지라 맞춤형 혼탕은 가능한 듯 하다. 그 증거가 이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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