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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 常勝不敗! 대한민국 해병대와 한국전쟁 - 주요 전승기록

바래미나 2012. 7. 31. 02:29
[6.25특집] 常勝不敗! 대한민국 해병대와 한국전쟁 - 주요 전승기록
 

해병대와 한국전쟁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원하는 구국의

선봉군으로 진동리 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어냈으며, 전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북진의 혈로를 타개하였고,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수훈을 세웠다. 동년 10월 7일 북진의 선봉이 되어 원산ㆍ함흥지역에서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잠시 철군하였고, 1951년 1ㆍ4후퇴 시 재반격 작전을 개시하던 중, 동부 전선의 도솔산 지구 전투와 펀치볼(김일성 고지)지구 전투에서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인이 경탄할 공훈’ 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동ㆍ서해안 전략 도서 확보 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아래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3월 중ㆍ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및 연천지구 전투를 1년 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완전히 저지하고 휴전을 맞이하였다.

 

장항.군산.이리 지구 전투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는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제 13연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제주기지를 떠나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의 금강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진동리 지구전투

 

‘50. 8. 3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의 예봉을 꺾어 침공을 저지하였으며, 창군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워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동년 8월 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특수임무부대가 진주고개로
지향된 대규모 반격 작전(1950.8.7~8.12)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진동리 마산간의 보급로를 타개하고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완전히 격퇴
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통영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북괴군 제7사단 예하 대대병력 약 650명은 낙동강 전선 돌파를 위한 최후 공격발판으로 1950년 8월 16일 통영을 침입하여 8월 17일 01:00시에 통영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 하였으며,거제도를 침공하여 적 포사정 거리에 위치한 마산.진해만을 해상으로 봉쇄하고 낙동강 서측방을 위협하는 전략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한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군에게 있어서 통영이 적의 수중에 넘어 간다면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 상당한 위협을 받게되어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 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 적의 의도를 분쇄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통영상륙작전이 계획 되었다.

손원일 총참모장은 진동리 지구 전투에서 최초로 대승을 거둔 해병대 김성은 부대에게 거제도에 상륙
하여 적을 저지 하라고 지시 하였다.

김성은 부대장외 500여명은 512호 소해정과 FS 평택함에 분승하여 진해를 출항 통영반도 동북방 1KM
지점에 도착 하였습니다.도착 즉시 정찰대를
이용 적정을 분석한 김성은 부대장은 적이 통영읍을 침입한 상태임을 확인하고 거제도에 상륙하여 적을 저지 하는것 보다 차라리 통영반도에 직접상륙하여

적을 격파 하는 것이 더욱 유리 하다고 판단하여 해군 총참모장에게 작전 변경을 건의 하여 상부의
승인과 지.해.공 통합 지휘권을 부여받아 상륙기동 부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8월17일 18:00시를 기해 김성은 부대는 아군 함정 7척의 함포 지원아래 통영부근에 산재한 목선을 이용하여 통영 장평리 해안에 역사적인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 하였다. 적은 해군 함포 지원 사격에 대응
하는데만
집중함으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평리 해안에 상륙한 김성은 부대는 2중대가 원문 고개로,3중대 및 7중대가 매일봉 고지로 기동 하였다.

통영시를 완전히 해병대에게 탈취당한 적은 통영에 대한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 고개에 대하여 1000명의 병력과 우세한 화력을 이용 인해전술로 9차례 걸친 대규모 반격을 실시 하였으나 해병대는 아군 함정과 공군의 지원 아래 육박전 위주의 근접 전투로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이 작전에서  당시 마가렛히킨즈 라는 외신 기자는 통영 상륙작전을 보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격찬 함으로써 전세계에 해병대의 용맹성을 전파
하게 되었다.

이전투는 해군과 해병대가 혈맹의 전우로서 한국군 최초로 실시한 단독 기습 상륙작전이며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 하였고 유엔군의 철수 작전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
“귀신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전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와 국방부 장관의
부대
표창을 받게 되었다.통영 상륙작전이야 말로 통영시의 역사와 “귀신
잡는 해병대“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 되어져야 할 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

 

 우리 해병대는 6.25동란 발발 직후,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된 이래 ,진동리 지구
전투를 거쳐 한국군 최초의 통영상륙작전에서는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창조해냈으며,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때 미 해병대 1사단,미 육군 7사단 ,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1950년 8.9월 그 당시, 북괴군이  아군의 최후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 대하여 마지막 발악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유엔군의 맥아더 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고,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어, 조기에 전쟁를 종결한다는 구상을 갖고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크로마이트로”로 부른  이 작전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괴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며,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감행하여, 서부전선과 중동부 전선의 북괴군을 섬멸하는 계획 이었다. 연합 상륙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두 단계로 구분 하였는데 제1단계는 인천항의  주요 목부분인 월미도를 선점하고, 제2단계로 인천 지역에 상륙하여 시가지를 소탕하고 해안두보를
확보하는 개념의 작전 이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도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하고,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 1일 제주도항을 출항, 9월6일 부산에 도착하여,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으로 단기간 특수훈련을 실시한 뒤, 9월 12일 미 LST Q3호와 피카웨이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인천으로 항진 하였다.

 인천상륙을 위하여 9월4일부터 10일까지 선견부대 작전으로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이내
도로,교량,터널,철도 등 교통의 요충지를 차단하는 항공폭격을 감행하였고, 9월12일부터 서해안은
군산, 동해안은 삼척과 장사동 일대에 양동작전을 실시하였으며, 1950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 상륙이 전개되었다.
 

 유엔군 제7합동 상륙기동 부대는 항공모함을 포함한 미전함 “미조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총261척으로 구성 하였으며, 연합상륙군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 미 육군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총병력은 7만5천명으로,9월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동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여대의 항공기의 항공폭격과, 화력지원 함정의 함포 지원하에,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 하였다.
제1단계로 9월15일 06시30분 로켓포함이 월미도의 녹색해안을 강타하는 동안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여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M26전차의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여 상륙 후 1시간만에
월미도를 확보하였다. 제2단계로 당일 17시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인 만석동 지역으로 상륙하여 5m의 암벽을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상륙을 감행하였고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돌격장갑차로 청색해안인 송도해수욕장의 서부 지역으로 상륙하여 상륙돌격 장갑차에서 사다리를 타고 5m 암벽을 넘어 상륙을 감행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괴군 인천경비 여단과 제8사단 및 31사단을 격파한 뒤 해안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속제대로 9월 18일 미 육군 7사단과 9월 24일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한.미
해병대가 함께 수도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 8군은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9월 15일 17시 30분에 적색해안인 인천 만석동해안에
상륙하여 9월 16일부터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은 경인철도를 경계로 남쪽에는 해병대 제3대대가 응봉산일대의 도심지역을 소탕하였고, 북쪽에는 해병대 제 1대대가 담당하였다. 북괴군은 인천지역을 벗어나 대부분 도주한 것으로 보였으나 상당수가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하여 주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해병대 제 3대대는 응봉산과 하인천역을 경유하여 시청을 탈환하였다.

인천시청 탈환시는 국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천시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 용사들을
보고 적치하 3개월간 고통과 설움이 북받쳐서 소리내어 울거나 살아남은 기쁨에 흥분하여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인천시가지에는 태극기의 물결이 점점 불어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감격의 순간 이었다. 인천경찰서로 진출한 해병대 제3대대 용사들은 북괴군에 의해 많은 시민들이 구치소 안에서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못하였으며 인천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으로 시가지소탕작전을 마치고 도원공원에 집결하였다.

한편 해병대 제1대대는 만석동과 화수동일대를 경유 송림동을 거쳐 현 선인학원까지 진출하여 시가지 소탕작전을 마치고 야간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신속 과감한 소탕작전으로 인천시의 질서와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9월 17일에는 인천을 완전 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시가지는 적치하 3개월간 약탈과 방화, 학살 등 북괴군의 마지막
만행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미 해병대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인천시를 긴급복구하기 위하여 9월 18일 오후 초대 임시 시장취임식을 거행하여 상륙군사령관 명의로 표양문씨에게 시장 임명장을수여하고 인천수복의 기쁨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은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하여 북괴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9월 20일 수도탈환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작전이었으며, 서해안의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 등의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며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여세를 몰아 수도서울을 조기 탈환하여 9월 27일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간의 적치하에서 고통과 실의에 빠진 인천과 서울시민에게 자유를 되찾게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치적 심리적으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고, 북괴군의 병참선 차단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북괴군이 전투의지를 상실하여 총반격 작전의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이였다.

 인천 상륙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미 해병대 제 1사단 2,450명, 한국 해병대 4백여명,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 350 여명이 전사상자를 내었다.  

 

서울탈환작전 

 수도탈환 작전은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 제1사단이 선봉부대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중심부를 향하여 돌파작전으로 공격하였으며 미 7사단 32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는 서울 남측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 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북괴군은 서울을 방어함으로써 남쪽으로 진격한 북괴군의 퇴로와 병참선을 방호할 수 있다는 생각하에 북괴군 9사단을 비롯한 18사단, 25여단 등 총 2만여명이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결전의지로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수도서울 탈환작전시,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 제1사단은 선봉부대로서, 9월 20일부터  한국 해병대 제1대대와 미 해병대 제5연대는 수색 방향으로 진격, 북괴군의 최후 방어선인 연희동 104고지 일대에 대한 두차례 고지 쟁탈전 끝에 적을 격멸하여, 104고지를 탈취 확보한 후 연희고지를 탈취함으로써
수도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가장 치열했던 연희고지 탈환작전에서 미 해병대는 병력, 장비가 열세한 한국 해병대 이봉출 대위가
지휘하는 제1대대 3중대가 연희고지를 먼저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미 해병대는 한국 해병대에 대하여 생사를 같이하면서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9월 25일부터는 서울 시내에서 본격적인 시가지 전투가 시작되었다.한국 해병대는 제2대대가 미 해병대 제1연대와 함께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격멸하면서 마포 방향으로 진격, 한강을 따라 용강동, 마포,
청파동, 원효로를 거쳐 용산경찰서를 확보하였으며,
9월 26일 저녁에는, 2대대 6중대 1소대는 최초로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을 시도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일단 본부까지 돌아와 그 동안의 상황을 중대장과 대대장에게 보고한 뒤,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9월 27일 오전에는 한미 해병대가 한강을 도하 시청과 중앙청을  포함한 서울 도심부를 장악하기 위해 공격 하던 중 당일 06시 10분에 한국 해병대(2대대 6중대 1소대)는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룩 하였다.  

 이 공적으로 미 트루먼 대통령은 “세인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는 요지의 표창장을

한국 해병대에 전달하였고, 이미 고인이 된 양병수 이둥병조가 미국 일등동성훈장을 받게 되었다.

한편  한국 해병대 제5대대는 미 해병대 제7연대와 함께 북악산 일대를 장악하고,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였으며,  해병대 제3대대가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려던 적 2개 대대를 격파한 뒤,김포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같은 전투 결과로 9월 28일에 아군은 수도서울을 완전히 탈환하였고, 9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맥아더 원수, 국회의원 및 정부 요인들이 서울로 입성하여, 모든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히 올리게 되었다. 

 

 

 

 수도서울 탈환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되찾은 역사적인 날로써 90일 동안 적 치하에서 고통과 실의에 빠진 서울시민에게 자유를 되찾게 하였으며, 대한민국 국민에게 정치적/심리적으로 희망과 용기를 갖게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과 수도서울 탈환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미 해병대 제 1사단 2,450명, 한국 해병대 4백여명,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 350여명이 전사상자를 내었다.

수도 탈환의 대위업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한국 해병대는 작전 지역을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미군에 인계하고,북한강지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원산상륙작전을 위해 장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북진ㆍ철수ㆍ재 반격작전 

 1950. 10. 1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ㆍ만 국경해산진까지 북진할 때, 해병대는 1950. 10. 7 인천을 출항, 묵호 및 원산에 상륙하여 고성ㆍ원산ㆍ함흥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1950. 10. 25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자 원산ㆍ함흥을 철수하여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1950. 12. 20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재편성하였다. 1951. 1. 4 수도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함락되자, 해병대는 재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영덕ㆍ안동ㆍ홍천ㆍ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도솔산 지구전투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도솔산(△1,148M)을
확보하기 위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되었던 북한군 제12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 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함으로써 ‘무적 해병’의 신화를 이룩한 전투입니다.

 이 작전은 1951년 6월 4일 도솔산 탈환에 실패한 미해병대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했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작전 중반부터 주간공격을 야간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작전으로 난공불락의 진지를 17일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 끝에 6월 20일 24개 목표를 점령하는 빛나는 개가를 올림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졌던 우군전선에 활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故 이승만 대통령께서‘무적 해병’휘호를 하사하였고,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도솔산전투(1951. 6. 4 ~ 6. 20)와 대우산 전투(1951. 7. 8 ~ 7. 10)에서 적사살 2,810명,포로 65명의 전과를 획득한 반면 아군 전사 210명,부상 852명의 손실을 내었으니‘무적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이 전투야말로 유례없는 피의 대공방전으로 오늘날의 해병대 정신을 구축한 빛나는전투였다.

 

 

  김일성고지(펀치볼) 지구전투

 

 도솔산지구전투 이후 해병대 제1연대는 홍천 북방 철정리에 주둔하여 1개월간 부대정비와 함께 자체
훈련을 정진하던 중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1951년 8월 28일 펀치볼지구전투에 투입된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중동부 전선의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양구 북방 해안분지(PUNCH BOWL)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을 감행 하였다.

 제1단계 작전(‘51. 8. 21~9. 1)시 현 을지전망대와 가전리 일대(▲924-▲1,026-▲702-▲660)에 배치된 북괴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51. 9. 1~9. 20)시 간무봉 일대의 적 은거지를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육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김일성 고지(▲924) 및 모택동(▲1026)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4일 동안 924고지와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들을 탈환함으로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으며,이승만 대통령은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격찬하였다. 

  

 

김포지구 전투

 

 1950. 9. 21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제3대대는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는 적 2개 대대를 격파하고 김포ㆍ강화도를 장악하였다. 1951. 1. 24 영덕ㆍ안동지구에 출동하여 북괴군의 남침 진로를 차단하던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1951. 2. 26 수도 서울 재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인천에 상륙,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시를 방어(1951. 2. 26~3. 6)하면서 서울 영등포 일대에 정찰대를 파견, 서울 재 수복 작전에 기여하였다. 1951. 3. 7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전개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김포반도를 완전 장악한 뒤,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하면서 한강 너머 개풍군 및 개성 부근 일대에 정찰대를 전개하여, 월암리 전투 등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하고 한강을 사수하여 수도권 방어에 기여하였다.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피아간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자, 수도서울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으로,1952.3.17.부터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 지구로

 투입된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 시 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 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제194,제195사단)과 대결한 방어 전투이다.

 해병대 제1전투단은 이 전투에서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과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여 군사 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고,적 사살/포로 5030명(추정사살 포함)의 전과와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서측방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과 신익희 민의원 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전략도서 확보작전

 

 한국전쟁 동안 해병대는 부대의 특성을 활용하여 38도선 이북 동.서해안의 전략 도서 확보 작전으로 적 해안을 봉쇄하고 적 후방을 위협하며, 첩보 수집 및 유엔군의 해군 활동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였다.

해병대는 동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2. 2. 독립 제42중대를 편성하여 1951. 2. 14 원산 앞 여도에 상륙하여 영흥만 일대의 신도 등 7개 도서를 점령하고 원산항을 봉쇄하였다.

 1951. 8. 28. 독립 제43중대는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에 상륙하여 차기작전 대비 중, 적 상륙기습부대 1개 대대공격을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한편 서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4. 2 독립 제41중대를 편성하여, 서해안의 교동도(4월 2일), 백령도(4월 23일), 진남포에 인접한 석도(5월 7일)에 각각 상륙하여 해안선을 봉쇄하였다. 1952. 1. 15 해안선 봉쇄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제7대대를 서해도서인 석도 및 초도에 주둔케 하고, 제9대대를 백령도 및 연평도에 증강 배치하였고 제8대대를 동해도서인 여도 및 양도에 주둔케 하여 휴전 시 까지 약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전략도서 확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휴전 뒤 백령도를 비롯한 서북 6개 도서를 아군 통제 아래 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국가 안보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