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평론가가 쓴 연아 올림픽 관전기 [36]
원문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figureskating&no=1072858&page=32&recommend=1&recommend=1&bbs=
옛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스크랩해둔 이 글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어.
영화 평론가 데뷔를 앞두고 무용에 필이 꽂혀 무용 평론가가 되신 분인데 굉장히 감식안이 뛰어나고 박식한 분이야.
(통신시절부터 난 이 분의 팬이였어. -_-)
어쨌거나... 올림픽 프리 직후, 일필휘지로 블로그에 포스팅하셨던 이 글을 횽들과 나누고 싶어 함 올려봐.
연아와 우리 모두 올 한 해 즐겁고 정당한 꼴만 보는 한 해이기를 빌며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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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별명은 '강심장' '대인배'라고 한다.
심장의 크기에 따라 메달 색깔이 결정났다는 말도 들린다.
혹은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 다음에 했던 것이 실력 발휘를 못한 원인이었다는 말도 있다.
모두 정확한 얘기는 아니다.
김연아는 모든 것을 수월하게 해내는 듯이 보였다.
외신에서 "그녀는 완벽했다" 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제 경기를 다시 보면서 귀를 기울여 보라.
어디선가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얼음판 위를 지치는 소리. 우아하고 지적인 매력, 꽃들의 곡선을 가미한 것 같은 환상적인 율동이 거의 발레 같았지만, 그 베이스에는 얼음을 지친다는 물리적 조건이 있었다.
끝없는 연습을 통해서 몸이 숙달될 때까지 그녀는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고 한다.
판타지에 가까운 퍼포먼스가 벌어질 때에도 그녀는 매 순간 얼음을 지쳐야만 하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도약하기 위해서는 '몸의 얻음'이 있어야 한다.
'몸의 얻음'이 있을 때까지 리듬은 구해지지 않는다.
있다.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다."
여기서 '몸짓'은 다른 무엇이 아닌,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바로 '이것인' 춤을 이른다.
그런 리듬을, 그런 리듬 위에, 혹은 그 위로 튀어오르고 풀어놓는 것이 바로 '몸의 얻음'이다.
김연아 자신이 인터뷰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탔다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의 리드미컬한 세계를 충분히 맛본 이다운 말이다.
여기서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더불어 데이비드 윌슨 코치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연아는 초등학교 때 이미 발레에 입문했다고 하는데, 그런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매 순간을 얼음판 위의 춤추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끌어올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녀는 4분여 동안을 끊임없이 리드미컬하게 '춤'추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과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김연아는 '사각사각' 하는 얼음지치는 소리마저도 현실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환청처럼 다가오게 할 만큼 리듬의 창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리듬을 창조하는 자, 독특하고 유일한 리듬을 타는 자는 심장의 크기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
이미 고유한 리듬 위에 있다는 것은 흘러나오는 음악 위에 자신을 흐름으로 풀어둔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그것은 자신의 리듬을 보태거나 음악을 추월하여 자신의 리듬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밀란 쿤데라가 이렇게 말한 적이
아사다 마오가 점프를 위해 그 사잇시간들을 뻣뻣하게 질주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그러므로 아사다 마오가 김연아 다음에 했다는 것이 그녀의 불운이라는 평가는 틀렸다.
그런 평가는 마치 그녀가 100% 최선을 다한다면 김연아를 능가할 수 있었으리라는 근거없는 전제가 있는 셈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아사다 마오는 그저 피겨 스케이팅을 고난이도의 점프, 즉 트리플 악셀에 의지하여 높은 점수를 얻고자 하는 경기자일 따름이다.
반면, 김연아는 스포츠에서 스포츠의 자기초월을 이끌어낸, 스포츠의 요구를 창조적인 리듬의 세계로 끌어올린 무용가 수준이다.
AP 통신에서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했다.
"김연아도 인간이다. 그녀도 넘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이긴다."
흘러넘치는 몸의 리듬,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심판조차 매료시킨다.
스포츠이면서도 그 이상을 요구하는 종목인 것이다.
또한 NBC의 해설자 스캇 해밀턴 - 1984년 남자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 같은 경우,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서스럼없이 김연아의 절대적인 팬임을 밝히며 편파해설을 한다.
리듬의 바다와 하나가 되는 체험, 그것은 모두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제 김연아가 그 소망을 이뤄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긴다, 진다 라는 관념은 불필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김연아 스스로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 것이 최상이다.
거꾸로 물어보자.
피겨 스케이팅이 어쩌다가 이렇게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게 되었을까.
카타리나 비트가 유죄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후반 전성기의 그녀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매번 뒤지다가도 항상 프리 스케이팅에서 대역전승을 일궈냈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왜 피겨 스케이팅은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기지 못하는가, 라고.
그로부터 피겨 스케이팅의 룰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해갔고, 어느새 메마르고 건조한 종목이 되었다.
사실 피겨 스케이팅은 똑같은 패턴, 똑같은 점프에서 누가 누가 실수 안 하나 라는 식으로 흘러가버렸고, 꾸준히 지켜보고 있으면 매우 보링한 게임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바로 그런 한계 상황에서 김연아가 치명적이고 도발적인 매력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개정된 룰 때문에 더욱 더 제한된 정형률 안에서 되레 밀도 있고 정확하며 아름다운 리
듬을 창조한다는 것, 그것이 피겨 스케이팅의 어필 포인트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얼음은 일종의 초원과도 같다.
초원 위를 말타고 달리는 것처럼 얼음판 위에서는 가속되는 만큼 점프의 높이와 스핀의 각도가 결정된다.
말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등자'라는 것이 있어서 말탄 이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스케이트'를 착용한 이 역시 그렇다.
얼음판 위를 지치면서 얻는 속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속도는 두렵다.
점프 앞에서 수많은 스케이터들이 잠시 멈칫거리는 것은 속도와 리듬이 마치 서로 등지고 있는 듯한 감각 때문이 아닐까.
리듬을 얻기 위해서는 속도을 한 템포 죽여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그러나 김연아는 점프 직전에 스피드를 죽이지 않는다.
그대로 내달아 단숨에 뛰어오른다.
미셸 콴이나 카타리나 비트 같은 피겨 여제들이 눈여겨 보는 대목은 바로 김연아의 가벼움, 속도였다.
속도의 문제, 속도 위에서 독특한 리듬을 창조한다는 것,
단 한 순간도 스피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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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평론가로 활동하다 미술관 큐레이터 일도 하고 계시는 김남수씨의 글이야.
전공은 묘하게도 서울대학에서 경영학을 하셨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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