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조선[朝鮮]과 대한[大韓]제국

조선왕조 기네스북

바래미나 2011. 12. 14. 02:41

 

조선왕조  기네스북   

 

* 인간승리의 주인공들

 

72년을 벼슬살이 한 청백리 정승  정원용

 

조선왕조 500년동안 가장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었던 인물은 정원용 이였다.

 무려 72년간이나 다섯임금을 보필하며 관직생활을 했던 것이다.

 20세에 문과 급제하여 관찰사,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66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정조 임금부터 고종 즉위때까지 5조 임금을 섬겼으며  헌종이 승하하자  농사꾼이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왕으로 옹립하기도 했다.   정원용은 관직 생활 72년동안 하루같이 근면하여

 조정이나 민생문제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그의 일상생활도 지극히 검소하여 청렴결백한

 생활을 한 명재상이었다.

 조선초기에 황히정승이 있다면  후기에는 정원용이 있었다.  두사람은 명재상에다 청백리의 표상과

 모범을 보인  닮은꼴이었다.

 또한 두사람 모두 오랜 관직 생활을 했고  나이도 황히 90세, 정원용 91세로서  세인들은

 조선시대에 두사람이야말로 가장 복많은 정승으로 불렸던 것이다.

 

 

83세에 과거급제한 인간승리  박문규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급제자  박문규.

83세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최고령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박문규는 최고령 급제라는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떠난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나이에 자기도전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실로 놀라운일이 아닐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80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는가?

그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는 문신중심의 사회이고  문관에게 가문의 영광과 명예가 주어지며  부의 축적은 물론 부인의 축첩 등 수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시험은 양반들의 유일한 출세길이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83세의 박문규는 과거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약 50여년을 시험에 매달렸으니 아마도 수십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지상과제의 한을 풀어서인지  그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6세에 처음 장가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본인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 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있다.

 

 

81세에 득남하고 8도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심수경

 

조선중기  우의정을 역임한 심수경  그는 75세와 81세에  득남을 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81세에 득남한 경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심수경은 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도승지를거처  8도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유일한 사람이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의 관찰사를 차례로 모두 역임한 것이다.

그의 조부가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심정인데  당시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 선비들을 일망타진한 역사적 과오에 대하여  한평생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다간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심수경은  이율곡의 후임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우의정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히는 영예도 안았다.

그의 성품은 효성이 지극하고  무예에 능하며  대의로 일생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실제로 7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개성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송도지방 최초로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교훈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으며  조부의 허물을 지우려고 최선을 다했고,  후세 사람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사꾼에서 왕[철종]이된 강화도령  이원범

 

 

조선 25대왕 철종,  33세로 단명한 그는 강화도령 이원범 이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가 이원범이었는데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사람 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영의정 정원용의 건의와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이원범을 데려와 조선 25대왕 철종으로 앉혔다.

이원범은  형 화평군의 옥사로 가족과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살다보니  자연히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당시 19세였으며  이런환경의 원범이 갑자기  환경이 변하여 왕이되고보니  정치는 안동김씨인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1851년에는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며 이때부터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으며  문란한 정치로 탐관오리가 횡행하며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철종은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는 모두 8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자식들도 유난히 단명하여  아들과 딸 모두가 일찍 죽고 말았다.

이렇듯 철종은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갔다.

 

 

가장 잔악하게 죽음을 당한 내시   김처선

김처선은 조선조 초기 내시로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그는 내시이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잘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으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으며  결국 연산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한번은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전하, 늙은놈이  여섯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통해 상감처럼 하신분은

  없었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쏘아 갈비대를 맞추자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겠습니까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을 하실수없는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이 화살하나를 더 쏘아 맞히고  다리를 잘라 버렸으며, 또 그의 혀를 잘라 버리고  배를갈라

 창자를 꺼내어 시체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정과 백성에게 명하여

 [처선] 두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내시  김처선은  그무시무시한 연산군의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였으며  비록 가장 처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남아있다.

 

조선 제일의 명재상  황희정승

 

조선왕조에서  단 한명의 대표적인 관료를 꼽으라면 단연 황희정승이 꼽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조정과 동료들의 계속적인 입조 요청으로  과감히 과거의 집착을 버리고 현실을 수용해 이성계정권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20여년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조선초기의 역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또한 황희정승은  오늘날까지도 청념의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맹사성과 함께 청백리의 대표주자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햇?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법, 그의 벼슬길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60여년의 관직 생활중 두 번이나 좌천되고,  세 번의 파직, 서인으로 강등되기를 한번, 귀양살이 4년, 등 우여곡절의 벼슬생활이 연속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종도 다같은 임금의 백성이라며  모든백성에게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허락했던 진정한 인간주의자 황희정승이었다.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일찍 급제하였다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전무후무한 형제6조판서  정태화 정치화

 

 

가문에  판서하나 나면 온동네가 시끌벅적할 만큼  판서되기가 쉽지 않은 조선조 문벌사회.

한사람이 6조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형제가 모두 6조판서를 지낸다는 것이 오직 가문과 개인의 영광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바로 동래정씨가 배출한 두정승 정태화, 정치화 형제로서  이들 형제는 6조판서를 모두 지냈고 형은 영의정, 동생은 좌의정 까지 지냈다.

관운은 타고난 것일까?.  이러한 관직운과  가문의 배경, 개인의 피나는 노력등이 두루 구비되어 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두루 구비하고 관운을 타고난 인물이 있으니 그가바로 영의정을 6번이나 지낸 정태화 와 그의 동생 치화였다.

이들의 가문에는 5대조 정광필[영의정], 증조부 정유길[좌의정], 조부 정창연[좌의정], 종조부 정지연[우의정], 정태화[영의정], 동생 정치화[좌의정], 아들 정재승[우의정]등 온통 집안에 정승들 뿐이다.

특히 정태화는 6조참의, 참판, 판서를 모두 역임함으로서 조선왕조 500년동안 이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단1명 정태화 뿐이다.

동생 치화도 도승지,  6조판서,  대사헌을 모두 거치고 우의정과 좌의정 까지 올랐으며 이들은 또 온화한 성품으로서 처세술도 좋아 대과없이 벼슬을 마침으로서  그들은 조선 500년 역사상 천부적인 관운을 타고난 관료로 기록되고 있다.

 

 

섹스심벌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조선조 최대의 섹스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어우동은 성종때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도 책마다 다른데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 이라고 되어있다.

어우동의 시댁은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어우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하였고,  특히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하였다.

한국의 3공화국때  정인숙 LIST처럼  그는 어우동 LIST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나중에는 도승지 김계창의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끝에  삶의 여정을 끝내고야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