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영화 이야기

영화 '소피숄의 마지막날들(Sophie Sholl, Die Letzten Tage, 독일, 2005)'

바래미나 2011. 8. 25. 03:59

영화 '소피숄의 마지막날들(Sophie Sholl, Die Letzten Tage, 독일, 2005)' 

ⓒ 스폰지
줄거리

 

1942년 독일의 뮌헨역에 기차가 도착한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남자가 있다. 이들은 후에 독일의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처형당하게 되는 숄집안의 남매사이인 한스숄과 소피숄이다. 역의 출입구에는 게쉬타포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가방을 수색하고 있다. 이를 본 한스는 자신의 옷속에 있던 메모지를 조용히 쓰레기통에 버리고 동생과 함께 그 사람들 앞으로 나온다. 게쉬타포요원들은 소피에게 뮌헨에 온 목적에 대해 묻고 가방을 수색하고는 그들을 보낸다. 남매는 오빠인 한스가 묵고 있는 하숙집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 있는 한스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한스와 같이 음악서클의 회원으로 같이 노래도 부르고 여행도하는 모임이라고 소피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소피는 뮌헨대학에서 대학강의를 듣게 된다. 소피가 듣는 강의 중에 철학과 교수이 허버트 후버교수의 철학강의도 듣게 된다. 뮌헨대학에서 후버교수의 철학강의는 재미도 있지만 나치정권이 독일의 대학교수에서 요구하던 교육정책에 위반되는 내용도 유머섞인 말솜씨로 강의를 한다. 유대인 철학자나 프로이트와 같은 심리학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면서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말하는 등으로 학생들에게 진정한 철학강의를 한다. 소피가 이런 대학생활에 만족하고 있을때 대학교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강의시간도중 자신의 자리에 나치정권을 비판하는 글이 적힌 유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계단이나 광장, 강의실에서 발견이 되고, 심지어는 뮌헨시내의 공중전화박스나 우체국, 극장게시판등에서 이러한 유인물이 발견된다. 소피숄은 이 유인물을 가지고 집에 오게 된다. 집에 들어온 소피는 자신의 오빠인 한스의 방에 들어가게 되고 한스가 보다만 책을 정리하게 되는데...

그 책의 펼쳐진 부분을 우연찮게 보다가 자신이 학교에서 본 유인물에서 본 내용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외출하고 돌아온 자신의 오빠와 유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한스는 자신은 거기에 전혀 관련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피는 오빠의 말을 믿지 않고 하숙집의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고 거기에는 한스의 친구들이 타자기와 인쇄기 앞에서 유인물을 찍고 있었다. 결국 소피는 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그룹인 '백장미'에 가입하게 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 나중에 후버교수도 백장미에 가입하게 되고 유인물 제작에 적극 참여한다. 이들은 러시아전선과 유럽전선에서 나치가 행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나 나치독일의 거짓선전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저항운동은 뮌헨대학에서 대학생들에게 나치정권의 교육감독관이 행하는 강의시간에 폭동으로 나타난다. 교육감독관의 교육내용중에 독일여성으로서의 조국에 대한 역할에 대해 강의를 하는데 한마다로 여자들은 위대한 게르만족을 위해서 가사에 충실하고 남자에게 최대한 봉사를 해야하며 자식을 많이 생산해야 된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대학생들의 야유를 받게 된다. 나중에는 강의실 문밖으로 나가기위해 경찰과 충돌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사건은 젊은 대학생들의 철없는 행동으로 보일수 있었지만 독일의 게쉬타포와 경찰은 뮌헨대학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조심스럽게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들의 저항운동은 1943년 2월 18일 끝이 나게 된다. 이날 한스와 소피는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뮌헨대학에서 사람들이 없는 강의시간에 학교 계단과 광장그리고 층에 유인물을 놓고 있지만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있던 건물의 관리인은 게쉬타포에게 연락을 하게되고 몇분되 안되서 경찰과 게쉬타포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된다. 뒤이어 한스의 절치한 친구인 크리스토프도 체포된다. 이들은 국민재판소에서 국가반역죄로 기소되고 세명모두 처형이라는 판결을 받게된다. 판결을 받은 다음날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과 재판과정에서의 당당함에 감동한 간수들은 이들이 처형이 있기전에 세사람에게 마지막 작별을 할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소피가 먼저 처형장으로 향하고 두손과 두발이 묶이고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2. 원작 아무도 미워하자 않는 자의 죽음

 

한스와 소피의 가족들은 그후 나치에 의해 구금되었고, 나치의 제3제국은 소피의 예언대로 1945년 5월 8일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스와 소피의 누이인 잉게 숄은 동생들이 조직한 나치 저항 단체인 `백장미'에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냈는데 그중에서 1952년 출간된『백장미(국내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번역)』가 가장 유명하다. 잉게 숄은 1950년 숄 재단을 설립해 동생들과 `백장미'의 저항운동을 기리는 활동과 독일 내 미국 퍼싱(Pershing) Ⅱ 핵미사일 설치 반대 운동 등 다양한 평화운동을 벌이다가 지난 1998년 11월 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는 학생들의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당시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념식을 매년 열고 있다.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었고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오늘날 독일은 히틀러의 독일이 아닌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의 삶을 다룬『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우리나라에선 지난 1978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유신정권 치하의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발령된 법안들은 어쩐지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발효한 법령 '긴급명령'과 흡사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제3공화국은 '유신 헌법'을 제정한 뒤 1975년 긴급조치 제9호(① 유언비어사실왜곡금지,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등에 의한 헌법의 부정반대왜곡이나 개정폐지 주장 등을 금지한다. ② 학생의 집단적 정치활동을 금지한다. ③ 위반자의 대표자 등에 대해서는 행정명령을 취한다. ④본 조치를 비방하는 자에 대해서는 1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를 통해 그 어떤 비판도 봉쇄했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대학생과 양심적인 시민들이 투옥되었고, 고문당했으며 그 와중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나치에 반대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볼프강 보르헤르트 같은 이들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부전선의 전장으로 끌려나갔다. 우리는 오늘날 군대의 녹화사업과 의문사 진상 규명 작업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과거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 당한 자식에게 군에 가서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는 말을 했던 부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는 자식의 유골을 받아들고 통곡했다. 술자리에서 불만 몇 마디 늘어논 이유로 간첩이 되거나 아내를 살해하고는 살인죄를 모면하기 위해 간첩으로 몰아 아내의 가족들마저 크나큰 고통 속에 살게 한 일도 있었다.

 

 

 


3. 백장미 그룹 탄생의 배경

 

1938년 11월 9일 '수정(水晶)의 밤(chrystal nacht)'이라는 다소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를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밤 독일 전역에서 유태인이 운영하는 7,000여 개의 업소와 유태인 거주지가 습격당했고, 1,000여 개의 유태인 회당 시나고그(synagogue)가 불탔다. 거리마다 깨진 유리창이 달빛을 받아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수정의 밤으로 불리우게 된다. 독일 시민들은 유태인들의 괴로운 처지를 묵살했다. 그러나 불길한 조짐은 단지 유태인들에게만 나타나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는 1942년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독일인 중에서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장애인과 다운증후군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동들을 격리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1940년 가을 무렵 독일의 지방 신문 독자들은 독일의 외딴 지역의 성(城)과 의료 보호소에 연이어 천편일률적인 사망 기사가 실리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요양이나 치료차 보호소에 보낸 가족들은 게슈타포로부터 고인의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종이 상자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정부에 문의하지 말라는 게슈타포의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처음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신교 목사였던 보델슈빙 박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지체아 보호소인 베텔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 그는 수용소 아이들 몇 명을 당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받은 보델슈빙 박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안락사 계획의 일환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힘쓸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베를린의 고위층에 있는 친구에게 직접 찾아가 항의했지만, 베스트팔렌으로 돌아오자 그 지역 나치당 베스트팔렌 관구 지도자는 아이들을 인도해줄 것을 재차 명령했다. 보델슈빙 박사는 이를 거부했고, 나치당 관구 지도자는 게슈타포에게 이 목사를 체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0년 9월 18일, 그 보호소는 폭파되었고, 12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죽었다. 하지만 안락사 계획은 계속 되었고, 1941년 5월 독일 뮌스터의 가톨릭 주교인 클레멘스 폰 갈렌 신부는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여름 갈렌 주교는 교회에서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강론했다. 그의 이런 강론은 뮌스터 전역의 주민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가 다시 강론을 할 때는 엄청난 청중이 몰려들어 성당문을 닫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갈렌 주교는 이 자리에서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있으며 그 희생자 수가 8-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증언하고, 나치당과 히틀러의 안락사계획을 고발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존경받고 있던 성직자로부터 나오는 열화와 같은 강론은 전독일 국민을 감동시켰고, 갈렌 신부의 강론들은 곧 인쇄되어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우편함에 투입되었다. 1941년 내내 로베르트 숄의 집 우편함에도 갈렌 신부의 강론이 인쇄된 유인물이 꽂혀 있었다. 이런 갈렌 신부의 저항에 베를린 히틀러는 물론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을 비롯한 나치당 고위관료들이 당황하고,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괴벨스는 갈렌 주교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는 문건을 작성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티칸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지지를 상실하고,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갈렌 주교를 굳이 순교자로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에 나치당과 히틀러에 반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줄 피의 본보기가 필요했다.

한편 갈렌 신부의 저항 소식을 접한 한스는 크게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자신도 히틀러와 나치당에 저항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누이인 소피 모르게 뮌헨에서 등사기를 구입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1942년 5월경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첫 호에서 독일 국민들을 "히틀러의 추종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널리 퍼졌고, 우연히 한스의 동생 소피의 손에도 들어갔다. 유인물을 읽은 소피는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유인물의 글귀들이 매우 낯익다는 인상을 받았다. 잉게 숄은 아직 그의 부모와 함께 울름에서 살고 있었다. 소피는 흥분하여 이 유인물을 들고 오빠의 방으로 달려갔고, 마침 자리를 비운 오빠의 방 책장에서 자신이 조금 전 읽은 것과 같은 글귀에 밑줄이 그려진 책을 발견했다. 소피는 결국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장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1942년 여름 동안 3편의 를 인쇄했고, 거기엔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한 인간 이하의 거들먹거리는 자를 위해 피흘리기 전에, 이 같은 하느님을 모르는 전쟁 무기의 운용을 중단하라!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점점더 활발하고 노골적인 활동에 들어가 어느날 밤에는 유인물을 돌리면서 뮌헨시 거리에 히틀러를 비난하는 낙서를 70여 군데나 새겨 놓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고, 1943년 1월 독일 뮌헨 지구 나치당 관구지도자 파울 기슬러가 연설할 때는 많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곧이어 "조국이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흔들리고 있다. 30만 독일 청년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총통! 우리는 당신에게 감사한다"며 학생 시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동시에 게슈타포로 하여금 '백장미 그룹'에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1943년 2월 18일 결국 체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게슈타포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한 학생 14명 중 한스와 소피, 크리스토프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나머지 11명은 감옥에 수감시켰다. 나치당은 갈렌 신부와 같이 막대한 배경을 지닌 종교지도자를 손보는 대신에 몇 명의 학생을 손보는 것으로 다시는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많은 젊은이들과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감옥에서, 거리에서 죽어갔다. 백장미 그룹의 저항은 비록 나치 제3제국과 히틀러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치가 지배하는 한 국가와 사회에 돋아난 가장 순수한 가시였음에는 틀림없었다.

 

 

 


4.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숨진 백장미 그룹 대학생들과 시민들


소피 숄 : 철학, 생물학과 학생 1921. 5. 9. 울름 출생 - 1943. 2. 22. 처형(당시 22세)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시한 것일 뿐이다. 다만 그들은 감히 발설하지 못할 뿐이다."


한스 숄 : 의과대학생. 1918. 9. 22. 울름 출생 - 1943. 2. 22. 처형(당시 25세)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도 살아 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강하게 살아 남으라. 한치의 타협도 없이-----"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 (당시 24세)
"나는 어머니께서 내게 생명을 주신 사실에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총을 입는다는 사실은 신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보다 먼저 갑니다. 먼저 가서 당신을 휼륭하게 모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

알렉산더 슈모렐 : 1943.7.13 처형
"국가사회주의란 독일 민족위에 덮친 극악하고 또한 정신병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일이 비록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결코 방관하거나 침묵을 지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빌리 그라프 : 1943.10.13 처형
"너는 독일의 모든 것이 너와 너의 모든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의무이다."

후버 교수 : 1943.7.13 처형
"독일의 한 시민으로서, 독일 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한 정치적 인간으로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고 그릇된 점을 공공연하게 폭로하면서,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은 권리일 뿐더러 도덕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

한스 콘라드 라이펠트 : 1945년 1월 29일 뮌헨-슈타텔하임 감옥에서 처형당함.

프레데릭 고이쎈하이너 : 1945년 4월 마우트 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사망

그레타 로테 : 1945년 4월 25일 아이프찌히-멘스도르프 감옥에서 사망

아인홀트 아이어(대학생,철학도> : 1944년 11월 22일 함부르크-풀스뷔텔 감옥에서 사망

카에테 라이펠트 : 1944년 1월 9일 처형

엘리자베드 랑에 : 1944년 1월 28일 함부르크-풀스뷔텔 감옥에서 처형

쿠르트 레디엔 : 1945년 4월 23일 노이엔감메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짐.

마아가레테 므로세크 : 1945년 4월 12일 노이엔감매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짐.

 

 

 


참고 : 1. 영화 백장미
2.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3. 제 3제국의 흥망 /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 유승근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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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마크 로드문트

* 출연 : 줄리아 옌치, 제럴드 알렉산더 헬드, 릴리 정, 막시밀리안 브뤼크너 

* 개봉정보 : 전쟁, 드라마 / 독일 / 117분 / 15세이상관람가 / 2006. 6.22

 

 

  2005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 수상
200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일이 많이 진척되어 한스와 소피는 학교에 가기 전에 가방 하나를 선언문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들이 가방을 가지고 학교로 출발할 때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은 미소가 하나 가득 피어 올랐다. 비록 소피는 어젯밤 꿈속에서 게슈타포가 나타나, 그들을 체포해 갔던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말이다. 두 남매가 집을 나서자 마자 친구 하나가 그 집 벨을 눌렀다. 그는 사정이 급박한 것을 경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둘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 기다렸다. 아마 이 전갈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둘은 학교에 도착했다. 몇 분 후 강당문이 열릴 즈음해서, 둘은 재빨리 그리고 자신있게 전단을 복도에 뿌렸다. 그리고 가방 속에 남은 것은 윗층에서 학교 입구에다 내려 뿌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은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두 개의 눈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눈은 그 사람의 심장에서 떨어져 나와 차츰차츰 염탐하는 독재자의 렌즈로 변하여 갔다. 그것은 건물 관리인의 눈이었다. 대학의 모든 문이 일시에 닫혀졌고 그것으로 해서 두 남매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급한 정보를 받은 게슈타포가 두 남매를 감옥, 그 악명높은 비텔바허의 궁전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곧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은 낮과 밤을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이 세상과 절연되었다...간수들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들은 거짓말같이 꿋꿋하게 처신했다.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험을 감행하여, 그들이 처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모이게 해 주었다.  그것은 단지 몇 분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큰 의의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죽음이 그렇게 쉬운지는 미처 몰랐어”  크리스토프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몇 분 후에 우리는 영원의 나라에서 다시 보겠지”  그리고 나서 그들은 끌려 나갔다. 맨 먼저 처녀가 끌려 나갔다.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걸어 나갔다.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리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스는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기 전에 전 감옥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자유만세>를 외쳤다.

 

 

 
  
 
 

 


한스 숄
1918년 9월 22일 울름 출생
의과대학생
1943년 2월 22일 처형 당함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도 살아 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강하게 살아 남아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소피 숄
1921년 5월 9일 울름 출생
철학, 생물학과 학생
1943년 2월 22일 처형 당함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한 것일 뿐이다.
다만 그들은 감히 발설하지 못할 뿐이다.”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1919년 11월 6일 뮌헨 출생
의과대학생
1943년 2월 22일 처형 당함
“나는 어머니께서 내게 생명을 주신 사실에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총을 입는다는 사실은 신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보다 먼저 갑니다. 먼저 가서 당신을 훌륭하게 모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뮌헨의 백장미>의 마지막 편지

학우들이여! 학우들이여!

독일국민은 스탈린그라드 시민의 패망을 앞두고 동요되고 있다. 저 유명한 세계대전의 명장들이 세운 천재적인 전략은 의미없고 무책임하게 삼십 삼만의 독일인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 넣었다. 총통, 감사합니다!  국민들은 들끓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미련한 자들에게 우리 군대의 운명을 위탁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남은 우리의 젊은이를 당파성이 짙으며 하찮은 권력본능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복수의 날이 찾아 왔다. 언제나 참지 않으면 안 되었던 독재정치에 대해 증오에 가득차 있는 독일 젊은이들이 담당할 복수의 날이 도래하였다.  우리는 히틀러 정부에 대해 전체 국민의 이름으로,  정부가 가련한 방법으로 사취해 두었던 가장 귀중한 재산인 개인적인 자유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 젊은이는 의사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언론탄압의 사회에서 성장했다.  꿈 많은 학교시절은 HJ(히틀러 유겐트: 국가 사회주의 청소년 지도조직), SA(돌격부대), SS(친위대) 등에 의하여 획일화되고 마취되어 정상적인 교육을 수련받지 못했다. ‘세계관적 교육’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사고와 가치기준을 공허한 번민 속으로만 몰아 넣는 가장 경멸적인 수단이었다.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 바로 우리 지식인들의 의무이다. 학생지도자들과 대관구장(GAU: 나찌 독일의 행정구역, 역사상으로는 독일민족에 속하는 각 종족의 정치적인 구역) 후보자들에 의한 개선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대관구장들이란 바로 여학생들을 음담패설로 놀려대면서 성장한 깡패들이다. 뮌헨에 있는 여학생들은 그녀들의 명예훼손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독일 남학생들은 그들의 여학생 동료들을 옹호하여 궐기해야 한다”고... 이제 우리들의 주체적 결정에 의한 투쟁은 시작되었다. 우리들은 용기있는 동료학생들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자, 진리의 횃불 아래 앞으로 전진하자!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슬로건만이 있다 : 나찌당에 반대하여 투쟁하라!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켜야 되는 당원들이여, 뛰쳐나오라! 진실한 학문과 순수한 정신의 자유만이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독재의 협박에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국가는 스스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 우리의 자유, 그리고 존엄을 위하여 투쟁한다! 아, 인간의 자유와 존엄!   십여 년 동안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신성한 단어들을 모욕적으로 억누르고 왜곡시켜 왔다. 그들은 국가가 수호해야 할 이 신성한 가치를 스스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십여 년 간에 걸친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자유 및 독일민족이 지닌 윤리적 토대에 대한 말살과정을 통하여,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뚜렷한 목표로서 그 가치를 더욱 확실히 제시해 주었다. 어리석은 몇몇 독일인에게는 공포의 유혈사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피의 사태는 독일민족의 자유와 존엄의 이름 아래 전 유럽을 통하여 야기되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새롭게 야기되어질 것이다. 독일의 청년들이 마침내 스스로 궐기하여 그들의 박해자들에게 보복함으로써 죄의 댓가를 치루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정신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독일인의 이름은 영원히 치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학우들이여! 학우들이여! 우리와 함께 독일국민들을 바라보자! 우리와 함께, 1813년 나폴레옹이 파멸한 것과 같이, 1943년 파쇼 테러정치가 파멸될 날을 기다려 보자! 동부전선의 베레지나와 스탈린그라드는 불타오르고 있다.스탈린그라드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가 그대들에겐 들리지 않는가! 
 
  「횃불은 타오르고 있다.  독일국민들이여! 힘차게 전진하라!」

우리 모두는 국가사회주의에 의하여 예속화된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의 대열에 있다.
자유와 존엄을 위한 경건한 투쟁을 향하여 매진하라!
 
-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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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

 

 

 

로자 룩셈부르크

아돌프 히틀러

파을 조셉 괴벨스

디트리히 본회퍼

볼프강 보르헤르트

스팔타커스(영화)

스탈린그라드(영화)

새벽의 7인(영화)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중반을 넘어선 어느 날 독일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의 한복판에 놓인 자식을 둔 어느 어머니가 한 말이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기(轉機), 혹은 전환점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기회니 인생의 전기니 하는 것을 맞이하려면 그나마도 오래 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그런 기회가 찾아오기도 전에 죽음으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바로 그랬다.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아침, 백장미 회원들이 대학의 모든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다. 한스 숄(Hans Scholl)과 소피 숄(Sophie Scholl)은 대담하게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들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거리와 대학에서 반나치 유인물과 히틀러를 모욕하는 낙서를 유포시키는 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 과감했던 탓이었을까? 대낮의 학교 건물 옥상에서 그들이 살포하는 유인물은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떨어졌고, 나치의 지방당원인 학교의 급사가 유인물을 발견하자 곧바로 그들이 올라가 있는 건물의 모든 출입구를 닫아걸고 게슈타포(비밀경찰)에게 신고했다. 몇 분이 흐른 뒤 게슈타포가 도착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대학에서 1.6km가량 떨어진 비텔스바흐 궁내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다시피 했던 게슈타포는 이들을 가혹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의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한스의 방을 수색했고, 인스부르크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가 보내온 편지를 발견하고 그마저 체포했다. 4일간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끝나자, 그들 세 명의 대학생은 2월 22일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치 정권에 저항하다 숨진
백장미 그룹 대학생들과 시민들(일부만 수록)

한스 숄 /의과대학생. 1918. 9. 22. 울름 출생 - 1943. 2. 22. 처형(당시 25세)

소피 숄 / 철학, 생물학과 학생  1921. 5. 9. 울름 출생 - 1943. 2. 22. 처형(당시 22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당시 24세)

알렉산더 슈모렐 / 의과대학생. 1917. 9. 16. 뮌헨 출생 - 1943. 7. 13. 처형

한스 콘라드 라이펠트 / 자연과학 전공 대학생. 1920. 7. 18. 출생 - 1945. 1. 29. 처형

프레데릭 괴센하이너/ 의대 졸업생. 1912. 4. 13. 출생 - 1945. 4월 마우트하우렌 강제수용소에서 사망

그레타 로데/ 의대 졸업생. 1919. 6. 13. 출생 - 1945. 4. 25. 라이프치히 멘스도르프 감옥에서 사망

라인홀트 아이어/ 대학생(철학), 1920. 7. 18. 출생 - 1944. 11. 12. 함부르크 풀스뷔텔 감옥에서 사망

카에테 라이펠트 / 한스 콘라드 라이펠트의 어머니. 1893. 5. 28. 출생 - 1944. 1. 9. 함부르크 풀스뷔텔 감옥에서 처형

엘리자베스 랑에 / 박사(자연과학). 1900. 7. 7. 출생 - 1944. 1. 28. 함부르크 풀스뷔텔 감옥에서 처형

쿠르트 레디엔/ 박사(법학). 1893. 6. 5. 출생 - 1945. 4. 23. 노이엔감메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

마가레트 므로섹 / 1915. 12. 14. 출생 - 1945. 4. 12. 노이엔감메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

빌리 그라프 / 의과대학생. 1918. 1. 2. 자아르브뤼켄 출생  - 1943. 10. 13 처형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홉 살 짜리 소녀의 모습이다. 이 소녀는 이 사진을 찍은 얼마 뒤 히틀러의 '장애인·아동 안락사 계획'에 따라 살해 당했다.(1939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슈타우펜베르크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1907-1944)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은 그 이전부터 종종 있어왔던 일이었지만 게슈타포를 비롯한 여러 비밀조직들이 이를 색출하는 임무를 띠고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히틀러 자신도 병적으로 안전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를 암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개전 이후 줄곧 승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암살이 곧 나치 정권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1944년에 이르자 상황은 달라졌다. 독일은 소련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전 이후 계속되는 히틀러의 광기와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고, 히틀러는 미치광이처럼 최후의 한 순간까지 독일인의 마지막 목숨까지 바칠 것을 요구했다. 히틀러에 반대하는 독일의 군부 장성 중 일부는 히틀러를 '늑대굴'이라 불리는 최고 참모 본부에서 폭사시킬 계획을 수립해 이를 수행할 만한 사람으로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을 지목했다. 그는 최고사령부 참모장으로 현직 육군 대령이자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 왕실에 봉사한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생이었다. 그는 어려서 군국주의적 보수주의와 가톨릭 환경에서 자랐으나 동부전선에 참전하여 그곳에서 자행되는 만행을 목격하고 반나치, 반히틀러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토지귀족(융커) 출신이었으나 사회주의자 조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만큼 융통성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1944년 7월 20일 그가 설치한 폭탄이 예정대로 폭발하긴 했으나 히틀러는 간발의 차이로 살아났고, 히틀러와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은 암살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색출해 잔인하게 살해했다. 슈타우펜베르크도 피아노줄에 매달려 교수형 당하고 만다. 사막의 여우 롬멜도 이와 관련돼 음독자살한다. 일부 양심적인 세력, 반나치, 반 히틀러 세력이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에 대항한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으나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고, 대다수 독일 시민들은 나치와 독일에 저항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과 히틀러는 최후의 기회마저 놓치고 그대로 패망의 길을 걸었다.
 

 




   나치는 숄 남매와 프롭스트를 본보기로 내세워 더 이상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겠다고 나설 용기를 발휘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없기를 바랬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통해 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부쳤고, 이전의 여러 재판을 통해 그 성과(?)를 드높인 열렬한 나치 당원이자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로 하여금 하여금 재판을 주관하도록 했다. 그는 이전까지 나치를 위한 재판에서 피고에게 그 어떤 동정이나 자비도 보이지 않아 나치 정권의 '교수형 재판관'이란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진홍색 법의를 걸친 프라이슬러는 친위대와 비밀경찰, 그리고 대부분이 이들에게 적대적인 시민들이 들어찬 법정에서 세 명의 어린 대학생들을 가혹하게 몰아부쳤고, 이들에게 <조국에 대한 반역죄와 군대의 전복 및 군수산업의 파괴를 선동한 예비 대역죄>라는 죄명을 붙였다. 프라이슬러는 혼자서 열렬한 어조로 지껄인 후 조용히 그러나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피고인들에게 외쳤다.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어떻게 고소장에 쓰여진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다.' 이들 세 사람을 대표해 가장 나이어린 소피 숄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누구든 결국 시작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감히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들의 훌륭한 자세는 이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감동시켰고, 일순 재판정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재판은 단지 요식행위였을 뿐이었다. 숄 남매의 부모 로베르트와 마그달렌 숄이 울름으로부터 프라이슬러의 판결을 듣기 위해 재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판결이 내려졌고, 형이 집행되기 직전이었다. 이들 부부는 뮌헨의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사형집행 직전의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독일 국내에서 나치에 저항한 학생 저항 단체 <백장미> 그룹의 핵심단원이었던 한스 숄(왼쪽)과 그의 누이동생 소피 숄(중앙), 그리고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오른쪽)가 1942년 7월 뮌헨에서 숙의를 하고 있다. 7개월 후 세 사람 모두 단두 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한스가 최후에 남긴 말은 '자유여, 영원하라!'였다.



  죽음을 앞둔 한스는 동생 베르너에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을 당부했고, 이렇게 말했다. '강하게 살아남아라. 한치의 타협도 없이.' 어머니 마그달렌이 '이제 너의 방은 언제나 비어 있겠구나'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말을 하자 소피는 '엄마, 1-2년이면 끝날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크리스토프는 자기 가족 중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세 번째 아기이자 첫 딸을 낳은 직후였고, 그녀가 남편의 운명에 대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그는 영원의 나라로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간수들은 다음과 같이 이들의 최후에 대해 증언했다. '그들은 거짓말 같이 꿋꿋하게 처신했다.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험을 감행해 그들이 처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모이게 해 주었다. 그것은 단지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겐 큰 의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크리스토프는 '나는 죽음이 이렇게 쉬운 건지는 미처 몰랐어. 몇 분 후에 우리는 모두 영원의 나라에서 다시 보겠지.' 그리고 나서 그들은 끌려 나갔다. 맨 먼저 소피가 끌려나갔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 집행자는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스는 단두대에 목을 올려 놓기 전에 감옥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 지음/ 박종서 옮김/ 청사/ 1978년. 117쪽에서 >

경제 부흥과 민주주의, 시민권, 자유 수호 사이의 혼란



   

스 숄과 소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이 세 명의 젊은이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태어나 짧은 순간을 살다 갔다.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짧은 생애는 그들의 누나인 잉게 숄(Inge Scholl, 1917. 8. 11. - 1998. 11.4.)이 기록한 한 권의 수기『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의해 이역만리 떨어진 한반도, 분단된 반쪽의 독재 치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했다. '백장미(Die Weiβe Rose)그룹'의 짧은 생애를 다룬 이 책을 읽은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포슈(Foch) 원수는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20년간의 휴전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만큼 제1차 세계대전은 불완전한 상태로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았고, 패전국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서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겐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이후 유럽(특히 독일)은 비대해진 군부 세력을 견제할 만한 시민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엔 드레퓌스 사건 이후 성장한 시민 세력이 군부를 제어하는 데 성공하여 이후 문민 우위의 전통을 확실하게 했으나 독일과 같은 신흥 국가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유습이 남아 있었다. 패전을 인정할 수 없었던 독일 군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는데 단 한 명의 대표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명백히 했고, 패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패전한 독일군은 마치 승전한 군대처럼 의기양양하게 브란덴부르크 문을 개선했고, 독일의 극우 세력은 공공연하게 독일군은 전선에 용감하게 싸웠으나 후방의 정치인들과 독일의 영광을 시기한 불순한 세력(유태인)이 독일 내부에서 농간을 부림으로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해외의 모든 독일 식민지를 빼앗기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해야 했으며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갚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독일군은 징병제 금지, 군함 보유량의 제한, 공군·잠수함의 보유를 금지당했고, 이런 조치들은 독일 국민에겐 치욕이자 실질적인 생활고로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명령'이라 불렀다.



  패전 이후 독일 사회는 극심한 좌·우혼란이 빚어져 스팔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났고, 독일 군부와 자본가 계급은 이 일을 빌미로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 독일의 급진적인 좌파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제거해버린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헌법으로 알려진 바이마르 헌법의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독일의 우파 세력들(자본가, 종교인, 중소 지주들)은 좌파의 발호를 막아줄 대안 세력으로 나치를 지지했다. 한편 독일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부흥을 이끌어 줄 지도자로 히틀러를 받아 들였고, 일부 저항 세력은 나치와 합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1933년 2월 27일. 히틀러가 수상이 된지 불과 1개월여 만의 일이었다)을 확대조작하여 그 범인으로 네덜란드 출신으로 정신병력을 가진 마리누스 반 데어 뤼베라는 청년을 현장에서 체포한 뒤 이를 공산당의 파괴 공작으로 몰았다. 나치는 그날 밤 안으로 4,000여 명에 달하는 공산당과 그들의 정적을 공범으로 몰아 체포했다. 놀라울만큼 신속한 조치였다. 수상이 된 히틀러는 국가안보가 위태롭다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겁박(劫迫)하여 '인신보호법'을 무력화시키는 '긴급명령' 법안에 서명토록 했다. 이 날 이후 독일에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괴테와 베토벤을 사랑한 독일 시민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히틀러의 지배 이후 주어진 직장과 힘을 통해 성취되는 독일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처음엔 별다른 이유없이 유태인이 그들 사회에서 제거되는 것을, 다음엔 공산당이, 그리고 그 다음엔 사회당이 제거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치의 명령을 따르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에서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스와 소피, 잉게 숄의 아버지였던 로베르트는 독일 뮌스터에서 동남쪽으로 480km 가량 떨어진 울름에서 세무사로 일하고 있었다. 로베르트와 마그달렌 부부는 뮌헨 대학에 아들과 딸 하나씩을 보내고 있었다. 로베르트 가족은 나치에 대해 그다지 반항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한스는 어렸을 때 히틀러 유겐트의 대원으로 활동해서 17살 때인 1936년 노동절에는 뉘른베르크 경축행사에 기수로 선발될 만큼 열의도 가지고 있었으며, 동생 소피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소녀 연맹의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나중에 이들의 수기를 집필한 잉게는 울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우리는 조국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느끼고 있는 것처럼 히틀러는 조국에 위대함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독일인들이 자유롭고 행복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가져다 준 놀라운 경제 부흥에 취해 그들에게 드리워진 억압의 사슬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때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1938년 11월 9일 '수정(水晶)의 밤(chrystal nacht)'이라는 다소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를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밤 독일 전역에서 유태인이 운영하는 7,000여 개의 업소와 유태인 거주지가 습격당했고, 1,000여 개의 유태인 회당 시나고그(synagogue)가 불탔다. 거리마다 깨진 유리창이 달빛을 받아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수정의 밤으로 불리우게 된다. 독일 시민들은 유태인들의 괴로운 처지를 묵살했다. 그러나 불길한 조짐은 단지 유태인들에게만 나타나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는 1942년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독일인 중에서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장애인과 다운증후군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아동들을 격리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1940년 가을 무렵 독일의 지방 신문 독자들은 독일의 외딴 지역의 성(城)과 의료 보호소에 연이어 천편일률적인 사망 기사가 실리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요양이나 치료차 보호소에 보낸 가족들은 게슈타포로부터 고인의 유골이 들어있는 작은 종이 상자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정부에 문의하지 말라는 게슈타포의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처음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베스트팔렌 지방의 신교 목사였던 보델슈빙 박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지체아 보호소인 베텔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 그는 수용소 아이들 몇 명을 당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받은 보델슈빙 박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안락사 계획의 일환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힘쓸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를 막아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베를린의 고위층에 있는 친구에게 직접 찾아가 항의했지만, 베스트팔렌으로 돌아오자 그 지역 나치당 베스트팔렌 관구 지도자는 아이들을 인도해줄 것을 재차 명령했다. 보델슈빙 박사는 이를 거부했고, 나치당 관구 지도자는 게슈타포에게 이 목사를 체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0년 9월 18일, 그 보호소는 폭파되었고, 12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죽었다. 하지만 안락사 계획은 계속 되었고, 1941년 5월 독일 뮌스터의 가톨릭 주교인 클레멘스 폰 갈렌 신부는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이 해 여름 갈렌 주교는 교회에서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강론했다. 그의 이런 강론은 뮌스터 전역의 주민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가 다시 강론을 할 때는 엄청난 청중이 몰려들어 성당문을 닫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갈렌 주교는 이 자리에서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있으며 그 희생자 수가 8-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증언하고, 나치당과 히틀러의 안락사계획을 고발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존경받고 있던 성직자로부터 나오는 열화와 같은 강론은 전독일 국민을 감동시켰고, 갈렌 신부의 강론들은 곧 인쇄되어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우편함에 투입되었다. 1941년 내내 로베르트 숄의 집 우편함에도 갈렌 신부의 강론이 인쇄된 유인물이 꽂혀 있었다. 이런 갈렌 신부의 저항에 베를린 히틀러는 물론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을 비롯한 나치당 고위관료들이 당황하고, 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괴벨스는 갈렌 주교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는 문건을 작성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티칸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지지를 상실하고,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갈렌 주교를 굳이 순교자로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에 나치당과 히틀러에 반대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줄 피의 본보기가 필요했다.



  한편 갈렌 신부의 저항 소식을 접한 한스는 크게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한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자신도 히틀러와 나치당에 저항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누이인 소피 모르게 뮌헨에서 등사기를 구입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1942년 5월경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장미> 첫 호에서 독일 국민들을 '히틀러의 추종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백장미>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널리 퍼졌고, 우연히 한스의 동생 소피의 손에도 들어갔다. 유인물을 읽은 소피는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유인물의 글귀들이 매우 낯익다는 인상을 받았다. 잉게 숄은 아직 그의 부모와 함께 울름에서 살고 있었다. 소피는 흥분하여 이 유인물을 들고 오빠의 방으로 달려갔고, 마침 자리를 비운 오빠의 방 책장에서 자신이 조금 전 읽은 것과 같은 글귀에 밑줄이 그려진 책을 발견했다. 소피는 결국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장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1942년 여름 동안 3편의 <백장미>를 인쇄했고, 거기엔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한 인간 이하의 거들먹거리는 자를 위해 피흘리기 전에, 이 같은 하느님을 모르는 전쟁 무기의 운용을 중단하라!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한스와 소피 숄의 누나. 잉게 숄은 동생들의 죽음을 기록한 『백장미(The White Rose)』를 집필해 그들의 죽음을 전세계에 증거했고,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평화운동과 반핵운동을 해나갔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잉게 숄 지음/ 박종서 옮김/ 청사/ 1978 - 이 글의 주요한 텍스트가 된 책이지만 현재 청사에서 나온 책은 절판되었고,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간된 책이 있다.

『독일의 전시생활』/찰스 파이팅 지음/ 타임-라이프 북스 편집부 옮김/ 한국일보/ 1990 - 한스와 소피, 백장미 그룹이 활동하던 당시의 독일 국내 생활을 잘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한스와 소피의 누나인 잉게가 동생으로 표기되어 있는 등 몇 가지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귀중한 자료들과 읽을 거리들이 풍부하다.

The White Rose - 백장미 그룹의 홈페이지이다. 다양한 사진 자료와 더불어 읽을 거리들. 각종 링크 자료가 풍부한 곳이다. 비교적 이해하기 쉽도록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약간의 영어 해독 능력만 있으면 한스와 소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 수 있을 것이다.(영어)

백장미/ 미카엘 베르호멘 슈미트/ 분도시청각 - 백장미 그룹의 활동을 담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국내에서 개봉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톨릭 인터넷 서점인 바오로 딸에서 판매하고 있으므로 시청각 교재로서 필요한 분은 사서 보거나 대여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그들은 점점더 활발하고 노골적인 활동에 들어가 어느날 밤에는 <백장미> 유인물을 돌리면서 뮌헨시 거리에 히틀러를 비난하는 낙서를 70여 군데나 새겨 놓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고, 1943년 1월 독일 뮌헨 지구 나치당 관구지도자 파울 기슬러가 연설할 때는 많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곧이어
'조국이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로 흔들리고 있다. 30만 독일 청년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총통! 우리는 당신에게 감사한다'며 학생 시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동시에 게슈타포로 하여금 '백장미 그룹'에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1943년 2월 18일 결국 체포로 막을 내리게 된다. 게슈타포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한 학생 14명 중 한스와 소피, 크리스토프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나머지 11명은 감옥에 수감시켰다. 나치당은 갈렌 신부와 같이 막대한 배경을 지닌 종교지도자를 손보는 대신에 몇 명의 학생을 손보는 것으로 다시는 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많은 젊은이들과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이 감옥에서, 거리에서 죽어갔다. 백장미 그룹의 저항은 비록 나치 제3제국과 히틀러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치가 지배하는 한 국가와 사회에 돋아난 가장 순수한 가시였음에는 틀림없었다.



백장미 수기가 우리 사회에 던진 의미



  스와 소피의 가족들은 그후 나치에 의해 구금되었고, 나치의 제3제국은 소피의 예언대로 1945년 5월 8일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스와 소피의 누이인 잉게 숄은 동생들이 조직한 나치 저항 단체인 `백장미'에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냈는데 그중에서 1952년 출간된『백장미(국내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번역)』가 가장 유명하다. 잉게 숄은 1950년 숄 재단을 설립해 동생들과 `백장미'의 저항운동을 기리는 활동과 독일 내 미국 퍼싱(Pershing) Ⅱ 핵미사일 설치 반대 운동 등 다양한 평화운동을 벌이다가 지난 1998년 11월 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과 전쟁 중 독일의 상황을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비견하는 일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재자의 정치적 얼굴은 일견 매우 흡사해보인다. 이들의 삶을 다룬『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우리나라에선 지난 1978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유신정권 치하의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발령된 법안들은 어쩐지 독일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발효한 법령 '긴급명령'과 흡사해 보인다. 우리나라의 제3공화국은 '유신 헌법'을 제정한 뒤 1975년 긴급조치 제9호(① 유언비어·사실왜곡금지,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등에 의한 헌법의 부정·반대·왜곡이나 개정·폐지 주장 등을 금지한다. ② 학생의 집단적 정치활동을 금지한다. ③ 위반자의 대표자 등에 대해서는 행정명령을 취한다. ④본 조치를 비방하는 자에 대해서는 1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를 통해 그 어떤 비판도 봉쇄했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대학생과 양심적인 시민들이 투옥되었고, 고문당했으며 그 와중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나치에 반대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볼프강 보르헤르트 같은 이들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부전선의 전장으로 끌려나갔다. 우리는 오늘날 군대의 녹화사업과 의문사 진상 규명 작업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과거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 당한 자식에게 군에 가서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는 말을 했던 부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는 자식의 유골을 받아들고 통곡했다. 술자리에서 불만 몇 마디 늘어논 이유로 간첩이 되거나 아내를 살해하고는 살인죄를 모면하기 위해 간첩으로 몰아 아내의 가족들마저 크나큰 고통 속에 살게 한 일도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듯 누리는 이 정도의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 흘린 결과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잉게 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현존하는 바벨탑에 약간의 흠을 내는 최소한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 덕에 우리는 오늘날 이만한 자유라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한스는 고향에서 근무하던 병원생활에서 일어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은 매우 화창하고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 한 명이 곧 퇴원준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는 온몸을 거의 이어 붙이다시피한 대단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가 퇴원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원인 불명으로 상처가 터지고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출혈부분은 목 부분의 대동맥 근처였기 때문에 의사들은 혈관을 찾아 누르고 있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 남자는 의사들의 손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한스는 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서 병원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기서 그는 남편을 데리러 오던 환자의 부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슴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채 병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우며 기대에 부풀어 가슴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채 희망에 가득찬 그녀의 모습은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가서야 이 나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들이 갈구하는 조그만 행복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언제 가서야 이 나라는 매일매일의 평범한 삶을 짓밟아 버리는 맹목적인 국가이념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언제 가서야 저들은 국민 전체를 위해서나 개개인을 위해서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까? 한스의 생각은 다시 감옥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이 땅의 평범한 시민 한 사람으로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