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보석_ 음악과 발레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발레가
러시아에 들어와 작은 체구에 섬세한 움직임_ 그리고 열정적인 힘으로 탄생시킨
러시아 발레가 세계 발레사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러시아 발레는
언제나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무대가 집대성 된 가장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
1773년에 찍은 이 오래된 사진은
오늘의 러시안 발레를 탄생시킨 역사적인 사진이 되었다.
러시아 발레
러시아에서는 피터대제(大帝)가 무용을 민중의 오락으로 채용한 서구화(西歐化) 정책에서 비롯되어
예카테리나 여황제 때 발레 예술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발레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M.프티파
러시아 발레를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프랑스인 M.프티파였다. 그는 수석(首席) 무용가를 거쳐 안무가가 되었는데, 프티파는 러시아 발레에 뚜렷한 민족적 형식을 도입하였고 62년 안무가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의 약 40년간 러시아 발레계에 군림하였다. 특히 프티파는 차이코프스키의 협력으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을 만들어냈다. 한편 이전에 러시아를 방문했던 E.체케티는 그곳에 머물러 A.파블로바와 V.니진스키 같은 무용가들을 길러냈다.
러시안 발레의 아버지_ S.P.디아길레프_ 그는 마린스키 극장을 지어 러시아발레의 초석을 놓았다_
In 1909 Sergei Diaghilev, a wealthy Russian patron of arts arranged the first Paris tour of the Russian ballet.
이와 같이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다져진 러시아 발레는 이제 러시아인(人)의 힘으로 발전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먼저 20세기에 들어와 '러시아발레단'을 조직한 S.P.디아길레프는 마린스키극장의 젊은 무용가들을 이끌고 1909년 파리 공연의 막을 열어, 근대 발레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9년 그의 병사(病死)로 러시아발레단이 해산될 때까지 세계의 발레를 이끌어나갔는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발레의 대가는 어떤 형태로든 이 발레단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발레단의 혜성 같은 존재인 니진스키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남성 무용가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유럽 관중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최고의 무용가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그는 공중에서 정지해 있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국적인 개성과 T.카르사비나 및 포킨의 작품에 가장 충실한 표현을 해냈다. 또한 그는 안무에도 손을 대어 《목신의 오후》 《유희》 《봄의 축제》를 만들었다.
러시아 발레의 중심 볼쇼이극장 내부_ Main Hall of the Bolshoi Theatre
러시아발레단의 마지막 안무가는 뉴욕시티 발레단의 창립자인 G.밸런친(무용계에서는 벨런신_이라고도 발음한다)이다. 그는 《뮤즈의 주교(主敎) 아폴로》 《탕아》 등을 포함한 10개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발레단이 해체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현대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지난해 조지 밸런친과 디아길레프를 추모하는 갈라쇼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무용가 겸 안무가. 아메리칸 발레학교를 세우고 아메리칸발레단, 발레협회(후 뉴욕시티발레단)를 결성하였다.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미국 발레의 육성과 발전에 힘썼고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1890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왕립발레단_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사진_ 마린스키극장과 마린스키발레_ 오늘의 키예프 발레단의 창립 사진이 되었다_ Carlotta Brianza and Paul Gerdt of the Imperial Ballet as Princess Aurora and Prince Desire in the 1890 premiere of the Sleeping Beauty.
러시아발레의 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이트
http://www.russia-ic.com/culture_art/theatre/155/#b1
러시아의 음악
19세기 러시아 음악은 이탈리아 음악을 모델로 시작하였지만 국민음악으로 발전하고 문학처럼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19세기의 러시아 음악이 서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음악의 고전시대를 연 글린카에서부터였다.
글린카_그는 러시아 영웅적·비극적 오페라인 <이반 수사닌>을 만들었는데, 황실의 반대로 <왕을 위한 생명>이라는 명칭으로 초연되었다. 이것이 러시아인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였다. 그는 이어서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관현악곡 <까미린스카야>를 만들었다. 그는 진보적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족적 민요에 뿌리를 둔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러시아의 민족적 리얼리즘 예술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지만, 당시 상류층은 오페라의 민중성에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의 음악은 대작곡가들이 등장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유럽의 고전 음악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러시아의 역사와 전설 등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음악가들이 '강력한 동지'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대작곡가들도 활동하였다. 무소르크스키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림사키 코르사코프는 <호반시치나>와 같은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민중적 음악양식과 개혁사상에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차이코프스키_ Pyotr Ilyich Tchaikovsky
차이코프스키는 서유럽 음악을 더욱 모방한 교향곡·오페라·발레곡을 만들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서정적이고 극적인 러시아의 교향곡 장르를 확립함으로써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발레음악인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와 '교향곡 6번(비창)'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발레를 위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하였는데, 그의 발레곡은 감정에 충실하고 인물의 개성에 묘사에 탁월하여, 러시아의 발레를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놓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계승자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는데, 5개의 피아노협주곡을 남겼으며 특히 3번 협주곡은 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20세기에는 음악과 공연이 소련 당국이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작곡가와 음악가를 계속 배출하였다. 그들은 그런 정책에 맞서 다른 나라로 망명 또는 이주해 그들의 음악 활동을 계속하였다. 로스트로보비치가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또한 20세기 가장 훌륭한 작곡가라 하는 스트라빈스키는 세계적인 발레곡인 <불새>를 작곡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70, 80년대의 억압은 재즈, 록, 포크 음악을 음성적으로 자라나게 했다. 록음악은 러시아 젊은이들이 서구의 록그룹에 열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당국에서 엄격하게 관리했고, 1980년 후반이 되어서야 약간의 록그룹이 만들어져 1990년대 활성화되었다. 재즈는 현재 러시아연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르 중 하나이다.
러시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레이다. 러시아는 발레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발레는 다른 귀족적인 춤과 함께 러시아에 들어왔다. 1734년 발레학교가 세워졌고 이를 계기로 발전하여 서유럽 발레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러시아의 대표적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는 국민악파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그들의 사상에 많이 동조하였지만, 창작 방식에 있어서는 그들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음악 작품의 소재에 있어서 민중적, 민족적 요소를 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국민악파와는 다르게 아름답고 순수한 음악미를 지향했던 것이다. 예술을 사회의 심각한 요구에 대한 답으로 간주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사실주의적 성향의 예술가였지만, 낭만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오페라와 발레 음악 부문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음악 작품에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선율과 다양하고 완벽한 화음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국민악파의 음악가들은 서사시적 교향곡을 쓰는데 주력한 반면, 그는 러시아의 서정적·극적 교향곡 장르를 확립하였다. 교향시 <로미오와 줄리엣>, <아지랑이>,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몇 편의 조곡, 번호가 없는 7개의 교향곡, 기악협주곡, 피아노곡, 실내악은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 6번 <비창>에서는 비극적 성격이 잘 표현되고 있다.
특히 발레와 교향악을 결합시켜 만든 발레곡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은 그에게 무대 음악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과 개성을 충분히 표출해 내는 그의 발레곡은 현재에도 세계 각국에 널리 퍼져 인정받고 있다.
오페라 음악에서도 그의 천재적 재능은 살아 있다. 그의 오페라는 역사적, 민화적 테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은데 <지방장관>, <대장장이 바쿠라>,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 여왕> 등이 대표작이다.
러시아의 중요한 음악가들
러시아 음악계에서 19세기 중반 이후의 시기는 훌륭한 작곡가들과 대작곡들이 대거 등장한 화려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음악 비평과 음악 이론이 활발하게 대두되었고 수준 높은 음악 연주회가 자주 열려 일반 음악 애호가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타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음악가들이 출현한 점 또한 중요한 일이다. 민족주의 작곡가들은 러시아의 국가의 전기나 역사 또는 전설 등을 오페라나 교향시의 기초로 삼았고 작품 속에서 민족적 선율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의 음악을 창출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음악가들로는 5인 그룹 '국민악파(강력한 동지)'를 들 수 있다.
국민악파(강력한 동지)
work promoting nationalism in Russian music
50년대 후반에 결성되기 시작한 그룹 국민음악파(이들은 '강력한 동지', '5인조 그룹', '신러시아 음악파'라 불리우기도 했다)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60년대 전반의 일이다. 발라키예프, 무소르그스키, 큐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보로딘이 그 구성원이었다.
'예술의 사명은 숭고하다'라는 모토를 가진 국민음악파는 음악은 내용을 가지고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예술의 민중성과 민족성 확립을 지향했다. 그들은 음악의 양식과 스타일에 있어서 민중 음악을 토대로 했다. 또한 농촌의 민요를 폭넓게 활용하여 러시아 특유의 민족적 성향을 음악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국민음악파가 관심을 가졌던 오페라에서는 주로 역사적 주제가 많이 다루어지는데, 그곳에서는 민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발라키레프 (1837-1910)
18세때 피아니스트로 페테르부르그에서 데뷔한 그는 1855년 글린카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 국민악파의 리더인 발라키레프는 급진 사상과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 구성원들의 사상을 인쇄물로 출판시키며 사회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는 작곡가로서의 일보다는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에 주력했다.
발라키레프는 특히 1862년 페테르부르그에 자유 음악 학교를 만들어서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고 1967년부터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그의 주요작품으로는 <이슬라메이>, <러시아>, <타마라> 등이 있으며, 그의 교향곡과 관현악곡은 국민악파의 다른 구성원들의 창작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무소르그스키 (1839-1881)
무소르그스키는 보로딘, 다르고므이쉬키, 큐아, 스타소프와 같은 음악가들은 만나면서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특히 발라키레프스키로부터 배운 작곡이론이 그의 창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두 개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와 <호반시치나>를 러시아에 남겼는데, 후자는 생전에 완성하지 못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그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민중적 양식과 민주적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는 권력과 민중간의 관계에 있어서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였다.
무소르그스키는 서구음악을 모방하지 않고 철저하게 독창적인 작품만을 창작했다. 가곡 <성요한의 밤>, <부랑자>, <세속 이야기>과 피아노곡 <전람회의 그림> 등이 그의 주요작품이다. 무소르그스키 음악적 요소들은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림스키-코르사코프 (1844-1908)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61년 발라키레프를 만나 국민악파의 5인 그룹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색채를 띠었다. 많은 작품을 창작한 림스키-코프사코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공상적, 전설적 테마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의 음악 속에는 민중, 인생, 자연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음 자체에 대한 정교함이 잘 가미된 그의 작품은 활기차고 밝다.
그는 고골, 푸슈킨, 오스트로프스키의 작품을 오페라로 개작하여 자신의 사상을 그 안에서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프스코프의 딸>, <사드코>, <황제의 신부>, <황금닭>과 관현악곡 <스페인 기상곡>, <세레나데> 등이 있다.
César Antonovich Cui _ 작곡가로 보다는 평론가로 더욱 유명한 큐이_
러시아 음악이 보다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작곡가만큼_ 좋은 평론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4) 큐이(1835-1918)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축성학 분야에서 권위자로 활동하던 큐이는 발라키레프의 지도를 받았고 국민악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작곡가로서 큰 업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음악 평론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윌리암 라트클리프>, <코카사스의 포로들>와 <중국인의 아들>이 있다.
(5) 보로딘(1833-1887)
보로딘은 러시아 국민악파의 한 사람으로서 유럽에서도 널리 알려져 인정받았다. 다양한 활동 영역으로 인해 많은 음악 작품을 창작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악적 수준은 뛰어났다. 보로딘는 러시아 고대 문학 <이고리 원정기>에 의거하여 민족서사 오페라인 <이고리공>을 작곡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후에 이 오페라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에 의해 완성되어 1890년 초연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잠자는 미녀>, <바다>, <어두운 숲의 노래>, <바다의 여왕> 등의 가곡과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등이 있다.
이와 같이 70-80년대 러시아에서는 국민악파인 '강력한 동지'가 자신들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서구 음악 세계에 알려져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러시아 음악가는 그 누구보다도 차이코프스키라 할 수 있다.
20세기 음악가들
19세기 말부터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이 등장하여
러시아 음악의 또다른 페이지를 장식한다.
라프마니노프_ Sergei Vasilievich Rachmaninoff
라흐마니노프(1873-1943)
국민악파와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음악의 민주적, 민중적 전통을 훌륭하게 이어받은 음악가이다. 피아니스트로 시작한 그는 피아노곡, 교향곡, 실내악, 가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곡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데카당적인 음악 사조와는 거리를 두고 음악에 있어서 선율과 하모니를 중시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 중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피아노 협주곡이다. 1891년 <피아노 협주곡 1번>,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명성을 쌓게 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피아노 협주곡 3번>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협주곡 2번의 2악장은 러시아의 서정을 특출나게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초연한 협주곡 3번은 상당히 빠른 템포로서 연주하기가 까다로운 곡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세 개의 교향곡, 칸타타 <봄>과 관현악단과 합창을 위한 <종>을 작곡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진가를 발휘하였는데, 그의 완벽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주는 청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그는 오페라와 교향악의 뛰어난 지휘자이기도 하였다. 10월 혁명 이후 그는 조국을 떠나 음악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스트라빈스키
20세기의 작곡가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로 창작 초기에는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아 민중적, 민족적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파의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품 중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받는 것은 발레 음악이다. 그는 발레곡 <불새>를 써서 극찬을 받았고 이어 <페트르슈카>와 <봄의 제전>을 발표하였다. 파리에서도 공연된 이 발레곡들은 스트라빈스키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1920년 이후 라흐마니노프와 마찬가지로 외국으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는 외국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미국에서 창작한 <아곤>, <무브먼트> 등의 작품에는 모더니즘 경향이 나타난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지방의 중심지에도 음악원들이 연이어 생겨나 음악을 보편화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음악 교육의 확산과 활발한 연주회 활동으로 민중들은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또한 민중성, 풍부한 사상과 감정, 명쾌한 형식 등을 지닌 러시아 음악이 국제 무대에서도 널리 인정받아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러시아 음악계는 잠시 침체기를 걸어야했다. 그러나 곧이은 소비에트 정부의 예술 진흥 정책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된다. 혁명 직후 러시아의 음악계는 창작에 있어서 혁명적 방식을 추구한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모솔로프 등이 대표인 모더니즘 계열의 러시아 '현대 음악 협회'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다른 양상을 띠고 발전하였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그 누구보다도 소련 시대의 음악계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페라, 협주곡, 실내곡, 발레곡, 영화음악, 관현악곡, 가곡 등의 음악 장르를 총망라하여 창작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32년에는 새로운 '소비에트 작가 동맹'이 나타나 러시아 음악계를 이끌어나갔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모든 문화 활동의 근본 원리로 대두되면서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계도 이 방침에 따랐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작곡된 작품으로는 제르진스키의 오페라 <고요한 돈강>,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예술에 대한 정책이 강경하여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노선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지 않는 작곡가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애국적, 민족적 성향이 강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프로코피예프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음악과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과
<교향곡 8번> 등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물론 이 네셔날리즘의 작곡가 대부분은 박정희_ 전두화_노태우 정권때까지도 국내 연주의 금지곡들이었다.
최근 주목받는 작곡가로는 쉐드린, 슬로님스키, 티시첸코, 우츠폴스카야, 파크무토바 등이 있다.
러시아 일반 대중들 속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린 민중음악을 이끌어나간 가수로는 50년대를 대표하는 아쿠자바와 60년대를 대표하는 비쇼츠키가 있다. 이들의 노랫말에는 시대적, 국가적 특성상 군인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다. 반체제 가수로 낙인이 찍혔던 비쇼츠키는 억압된 이들의 대변인으로서 노래하고 대중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졌다. 그의 노래 중에는 영화 <백야>에 삽입된 <뒷걸음치는 말>과 <친구의 노래, 땅의 노래> 등이 있다.
러시아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 후 우리 나라에도 러시아 가수들의 노래가 많이 소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가수들로는 <백학>의 이오시프 카브존, <백만송이의 장미>의 알라 푸가쵸바, <고백>의 '상트 페테르부르그' 그룹과 그 무엇보다도
한국인 3세로 그룹 '키노'를 이끈 빅토르 최가 있다.
짧은 생을 마감한 빅토르 최는 19세인 1981년부터 음악을 시작해 1984년에는 자신의 그룹 '키노'를 결성했고
2년뒤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그는 1988년 히트곡 <전설>을 발표해 러시아 최고의 가수이자
음유시인으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시적인 가사를 애수에 젖어 감칠맛나게 표현하는 러시아 가수들의 노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잘 맞아 점차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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