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역사 속으로의 단편

진짜 고려 영토의 실체~, 식민사학자들이 왜곡한 고려영토 [24]

바래미나 2011. 4. 10. 00:45


(1) 고구려(高句麗) 천리장성도(千里長城圖)와 고려 강역

잘려나간 고구려사(高句麗史)와 고려사(高麗史)



이 지도는 보다시피 중국인들이 만든 지도이다. 위 지도는 압록강 하류와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서해안이 보이는 지도이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좌편을 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이 요하 건너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함을 볼 수 있다. (실재의 고구려 천리장성은 지도보다 더 왼쪽/고구려 천리장성은 '부여에서 해유리까지')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고구려 장성에 연결되어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성문 이름'까지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강역이 만주 일대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의 행정구역 수가 584개요 조선의 행정구역 수가 324개인 이유가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위의 '류조변시의도'에 나타난 고구려 및 고려의 천리장성을 현대의 대륙지도에 다시 옮겨 보겠다.




1.현대의 대륙 지도에도 고려의 영토가 만주까지임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려령(高麗嶺), 고려모(高麗貌) 라는 고려의 영토가 북만주(北滿州)에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철령위(鐵嶺衛)'가 한반도에 있는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녕성의 철령임을 보여준다.

 

식민사학자, 중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철령, 쌍성 총관부, 동녕부의 위치

 

 

2.고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한반도의 함경도 영흥이 아니라 길림성(吉林省) '쌍성(雙城)' 지방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3.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한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지역인 선춘령(先春嶺)이 북만주의

'흥개호' 근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귀주대첩-강감찬 장군은  만주에서 거란을 물리치다.

 

 

 


국내의 사서(史書)와 중국 고지도(古地圖) 등에 의하면 동북 9성(東北九城)은 두만강 북쪽에 있어야 한다.

 

 

상기 지도 노란선은 송령산맥 - 철령위 - 화주 - 고려모 - 선춘령을 연결하는 선이다. 고려의 강역은 과연 어디까지 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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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철령위의 위치는 만주

 

 

 

 



(2) 고려의 대륙 9성(大陸九城)이 반도 9성(半島9城)으로 조작되었다.

[참고서적: 김영호의 '국사광복의 햇불']

단제(丹薺)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두만강 건너 700리 선춘령(先春嶺) 밑에 윤관(尹瓘)이 세운 정계비(定界碑) 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 ?“ 하며 “조선 역사상 1,000년 이래 제일 대사건” 이라고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속에서 지적하고 있다. 물론 뒷날의 공양왕실록(恭讓王實錄)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서 공험진(公險鎭)은 두만강 이북 간도성에 있는 선춘령이며 그곳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양왕(恭讓王) 4년에 올랑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족에 속하는 (兀 : 우뚝할 올, 斡 : 관리할 알) 여진인(女眞人)들이 래조(來朝)했을 때 그들의 말중에 “시중(侍中) 윤관 공이 우리 영토를 평정하시고 비를 세워 고려의 경계를 하시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들 부족은 윤관의 북벌(北伐) 당시 동만주 송화강 하류(北伐當時東滿洲松花江下流)쪽으로 쫓겨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정계비는 두만강 이북에 있다는 뜻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거양성 선춘령에 윤관의 입비처(立碑處)가 있고 비문에는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넉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선춘령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가면(-> 수빈강(愁濱江) : 흥개호 인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 찾는중), 옛 성지(城址)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사적(日本史賊) 이케우치[池內宏]가 한국 역사를 축소, 왜곡하기 위해 9성이 두만강 이북에 있지 않고 함흥평야에 있다고 '날조'한 것을 국내의 이적사가(利敵史家)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추가해설} 국내 역사교과서에서 기술된 동북 9성(東北九城)의 위치.

일본의 역사 도적놈 이케우치[池內宏]에 의해 조작된 위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고려대학 박물관 소장]



1107년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이 총지휘하는 고려의 17만 대군이 수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치고 국경을 넓혀 그곳에 육성을 쌓았으며,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새겨진 비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선춘령(先春嶺)의 위치는 어디일까? 다음의 고지도를 보자.


선춘령(先春嶺)의 고려 비석 -> 고려 경계는 두만강 북쪽 600리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두만강의 북쪽에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로 보자. 지금 현재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어디에 있을까?



1900년초 일본이 작성한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기요' 극비보고서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중국 연길국자가 서쪽 1리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 하였는데 비문의 대부분은 알아 볼 수 없고 남은 20여자의 글자 중 다행히 무자년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무자년은 고려 예종(睿宗) 3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지금의 그 비석은 중국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고려지경(高麗之境)” 4글자가 씌여져 있었던 그 비석을 꼭 찾아 보고 싶다.

(3) 고려의 동북쪽 경계는 함경남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밖이었다.

지금까지는 고려의 동북 경계는 함경남도 정도로 배워 왔으나 고려사와 고지도는 두만강 북쪽 700리 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사 권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춘령에 대해서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 61-77(고지도) 및 규장각 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림을 보면 위쪽 원안에 선춘령(지금은 윤관비로 표기)이 있으며 아래 원이 두만강 표시이다. 서북쪽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42권에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강역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송나라가 섬긴 천자의 나라 고려황제국

 

 

고려는 건국부터 명실상부한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며 광종황제는 개경을 아예 황도(皇都)라고 불렀다.

 
고려의 궁궐은 황궁을 의미하는 5궁궐이었으며, 고려 황제가 집무하는 회경전에 새겨진 봉황 무늬는 바로 황제의 문양이었다.

특히 송나라의 고려 섬김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네(송나라)들이 꼼짝도 못하고 짓밟혀서 조공을 바치던 거란의 요를 상대로

고려는 당당히 맞서 대승을 했으니 그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해 보였겠는가?

그들로서는 고려에 매달려야 요를 그나마 견제, 요에 격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유일한 대안이었기에

즉,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으므로 고려를 섬김에 필사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송나라는 고려 사신 접대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재정이 흔들려서 이것을 비판하는 시인(소동파)도 등장했고,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예법을 적은 책만 300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도경에서 고려를 찬양하는 글을 많이 남겼는데

 "고려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민가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그치치 않았다."

"우리 송은 목욕을 자주 하지않아 일년에 고작 몇 번이지만 고려인들은 남달리 청결하여 냇가에서도 수시로 목욕을 했다."

라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