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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

바래미나 2010. 2. 7. 00:55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
2006.11.22 02:53
http://tong.nate.com/redsur2000/29212401
프리챌 커뮤니티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아서(이상진)에서 가져옴 

1)東洋學 第29輯(1999年 6月)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



徐   榮   洙


Ⅰ. 머리말

Ⅱ. 국가형성기의 대외관계

  1.檀君朝鮮의 대외관계와 중심위치

  2. 韓朝鮮의 영역과 대외관계

Ⅲ. 고조선의 발전과 대중관계의 전개

  1. 古朝鮮王國과 齊의 무역관계

  2. 古朝鮮王國의 발전과 對 周燕

     外交의 성격

 

Ⅳ. 고조선의 이동과 대중 관계의 변모

  1. 對燕戰爭과 古朝鮮의 中心地 移動

  2. 對秦關係와 遼東郡

  3. 古朝鮮의 遼東수복과 對漢關係

 Ⅴ. 맺는말


Ⅰ. 머 리 말



  古朝鮮은 民族史의 源流로서 인식되었던 까닭에 역사학자나 일반인 모두의 높은 관심속에 지속적으로 조명되어 왔다. 고조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얼마나 큰 나라였는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관심을 가져 보았을 문제이다. 그러나, 학자들마다 백가쟁명하여 궁금증만 불러 일으킬 뿐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에 관한 史料가 소략하고 고조선의 활동무대가 오늘의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학문적 이유 이외에도 民族의 榮光이라는 학문 외적인 문제가 가로 놓여 있는 고조선사 연구가 갖는 특수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三國遺事?에서 ‘檀君이 조선을 개국한 것은 중국의 堯임금 때와 같다.’고 한 이래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민족의 자존심과 관련되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오늘의 학계에서도 기원전 5-4세기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었으리라는 신중론으로 부터 기원전 3,000년기에 이미 건국되었다고 보는 극단적인 견해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으나1), 최근에는 요하유역의 청동기문화와 관련하여 기원전 1,000년기를 전후한 시기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2)

  고조선사 중에서도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어 왔다. 때로는 고조선의 중심을 大同江유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遼東으로 볼 것인가 하는 역사지리적 논쟁이 학문적 차원을 떠나서 애국심 논쟁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대체로 대동강중심설, 요동중심설, 이동설로 대별된다.3)

  大洞江중심설은 종래의 통설인데, 이러한 설에 동조하는 경우 마치 식민주의사관에 젖은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日本官學者들이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고정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韓國史의 무대가 半島로 축소․왜곡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기 시작하였던 것은 高麗 시대부터이며, 朝鮮 시대에 들어와 보다 체계화되어 오늘의 학계에 계승된 것이다. 최근 북한학계도 그간 끈질기게 주장하였던 요동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있으며 요동중심설을 주장하던 우리학계의 일부 학자들도 여기에 동조하여,4)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으로 보기 시작한 우리학계와는 입장이 전도되기에 이르러 고조선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게 되었다.

  요동중심설의 경우에도 192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 오늘날 고조선의 중심을 만주 지역으로 주장하는 경우, 마치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한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요동중심설도 이미 조선시대부터 논의되어 오던 것이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를 계승하고, 6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북한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학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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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녕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와 북한학계의 요동중심설에 자극을 받아 우리 학계의 경우도 琵琶型銅劍, 美松里型土器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문헌사료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하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에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른바 移動說이 제시되어 80년대이후 우리학계의 대표적인 견해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나 여기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5)

  고조선의 중심위치 못지 않게 고조선은 얼마나 큰 나라였을까하는 점이 일반인의 관심거리다. 고조선은 아테네와 같은 都市國家였는가, 아니면 로마와 같은 大帝國이었는가. 일반인의 궁금증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고조선은 출발부터 대제국이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역의 크기는 그 사회가 가지는 문화수준에 따른 사회구성 능력에 따라 달라지기 떄문이다.

  고조선이 환상의 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최초의 국가라고 한다면, 고조선은 형성기부터 멸망시까지 동일한 성격을 지닌 국가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세계의 유수한 고대 문명국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阿斯達’로 불리어진 城邑國家로부터 출발하여 중국의 統一帝國과 정면으로 맞섰던 ‘大古朝鮮王國’ 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인 실체이다. 다만 현재 고조선의 지표문화로 거론되는 비파형동검이나 미송리형토기의 경우 그 분포 범위가 넓고 지역적 성격이 달라 그것이 문화권인지 정치적 세력권인지의 문제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 강역의 크기와 범위는 지금부터의 연구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같이 고조선사의 연구환경은 급변하고 있는데 비하여 학계의 연구는 미진한 편으로 일반인의 높은 관심을 해갈해 주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사 연구가 부진한 일차적인 이유는 사료적 한계에 기인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나, 이러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우리 학계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행히 최근에 이르러 만주, 북한 등지에서 우리민족과 관련된 고대의 유적지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종래에 단편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문헌사료를 고고학의 연구성과와 관련하여 보다 넓은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다면 古朝鮮史도 수수께끼의 베일을 벗고 그 윤곽이 밝혀 질 것으로 기대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고조선의 국가형성시기와 위치 및 강역의 문제가 고조선사의  주요 과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정된 사료와 주관적 경향에 매몰되어서는 그 해명이 요원할 뿐만 아니라 고조선사의 본질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고조선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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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고조선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구체적인 발전과정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선은 국가형성기로부터 대고조선시대를 거쳐  滅亡期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비롯한 주변 여러나라와 부단한 항쟁을 통하여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외교 및 문화교류 등 다양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물론 古朝鮮의 국가형성시기나 위치 및 성격이 모호한 상태에서 국가와 국가간의 정치적 교섭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의 연구는 출발부터 장애에 부딪친다. 따라서, 그간의 고조선사 연구에서도 고조선의 位置나 疆域의 범위 등 역사지리적 논쟁이 주류를 이루어 왔을 뿐,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는 단편적으로 언급되었을 뿐 체계적인 연구는 전무한 형편으로 고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의 對漢鬪爭史가 연구의 전부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는 물론 고조선사에 대해 남겨진 사료가 희소할 뿐만아니라 그것도 매우 단편적이라는 데 그 주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문헌사료가 대부분  고조선과 중국과의 대외관계에 관한 사료이므로, 최근의 考古學的 조사와 연구성과를 염두에 두고 현존하는 대외관계 사료를 망라 재구성해 본다면, 역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고조선의 중심위치나 강역 등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는 물론 나아가 고조선이 주변세계에 대응해 국가를 형성,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보다 역동적인 고조선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국가형성기의 대외관계



  일반적으로 古朝鮮은 단군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거나, 단군조선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제시되었던 檀君․箕子․韓氏․濊貊․衛滿 등은 사료적 의미를 지닐 뿐 古朝鮮史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는 되지 못한다. 더욱이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상고사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운 최초의 국가라고 한다면, 고조선은 형성기부터 멸망시까지 동일한 성격을 지닌 국가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고조선은 환상의 국가가 아니라 ‘아사달’로 불리어진 성읍국가 시기로부터 중국의 統一帝國과 정면으로 맞섰던 大古朝鮮 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인 실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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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시간적인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三國遺事?의 체제에 따라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시대를 고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생동하는 고조선 사회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며, 고조선의 대외관계나 강역의 변천과정도 체계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대구분의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의 시대구분은 대체로 그 시대의 사회발전 단계에 의해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고조선의 사회발전 단계에 관한 구체적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호칭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갖고 있다. 즉 고조선의 왕호가 시대에 따라 檀君王儉(하늘임금)→韓(한․칸)→王(중국식 왕호)으로 변천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君長號가 그 사회의 성격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고대사회의 경우 어느 정도는 그 사회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필자는 고조선사를 그 사회발전 단계에 따라 제정일치 시대의 君長이었던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城邑國家시대(檀君朝鮮)→韓으로 불리던 정치적 대군장이 지배하던 연맹왕국시대(韓朝鮮)→중국식 왕호를 쓰던 集權的 領域國家時代(大古朝鮮=고조선왕국)로 시대구분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6)

  여기에서도 이러한 시대구분에 따라 고조선의 대외관계를 단군조선, 한조선, 고조선왕국 전기, 고조선왕국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檀君朝鮮의 대외관계와 중심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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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檀君朝鮮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인정하는 터이나, 우리는 단군조선의 성립시기나 위치 및 국가의 성격에 대하여 명쾌한 설명을 할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揆園史話?나, ?桓檀古記?등의 史話에는 단군왕조의 47대에 걸친 朝代記를 비롯하여 夏殷周 등 중원제국과의 교섭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어 일반인의 호기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화는 대부분 중국의 고대 전설을 재구성 하여 조선왕조나 근대에 만들어진 僞書가 분명하므로7) 그 자체를 實史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실정에서 단군조선의 대외관계를 추적한다는 것은 무망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三國遺事?에 실려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재음미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箕子의 東來와 단군조선이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 것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에는


“檀君王儉이 唐高(堯)가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에 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후 白岳山 阿斯達로 도읍을 옮겨…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周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藏唐京으로 옮겼으나 나중에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山神이 되었다.”8)


고 하였으며, ?帝王韻紀?에도


“殷나라 武丁 8년에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9)


는 기록이 보인다.

  檀君은 하늘을 의미하는 몽골어 ‘텡그리’와 통하는 것으로 祭司長을 의미하는 三韓의 天君(하늘임금)과 같은 말로 이해되며10), 王儉은 임금으로 해석된다. 즉, 檀君王儉은 자연인의 이름이 아니라 제정일치시대의 君長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모두 단군조선의 천도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大河유역에 위치 했던 고대국가의 이동 원인은 주로 하천의 범람과 전쟁 등 주변민족과의 정치적 대립에 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殷商의 잦은 천도는 황하의 범람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는 달리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도읍 이동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라기 보다는 箕子를 비롯한 殷周세력의 東進등 주변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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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記」의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물론 중국사료를 인용한 것이지만 중국측 기록과는 달리 기자의 동래에도 불구하고 단군이 죽지않고 藏唐京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기자의 동래설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기자의 朝鮮封國說은 부인된지 오래지만 최근에는 다시 甲骨文과 청동유물 등 신사료를 토대로 大凌河유역에 기자조선이 실재하였다는 주장과11) 春秋全國시대에서 秦漢帝國의 성립에 이르는 중국사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箕子國은 단군조선과는 별개로 灤河유역에 의연히 존재 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의 準王이 바로 기자국의 마지막 왕이라는12) 상반되는 견해가 제기되어 새로운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상 단군조선이 존재하였던 시기 遼河유역의 청동기 문화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고대문화와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는 內蒙古에서 河北을 거쳐 遼東에 이르는 광의의 요하유역문화권은 지역적 성격상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교차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초기청동기 문화는 紅山문화에서 小河沿문화를 거쳐 발전된 夏家店하층문화로 赤峰지대는 B.C.2400년, 요서의 豊下문화는 B.C.1700년,13) 요동지역은 B.C.1500년경에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14) 농경민의 정착문화이다. 현재 이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견해는 엇갈려 있어 정설이 없으나15), 고조선의 배경문화와 관련하여 보다 정밀한 검토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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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12-11세기에 들어오면서 遼寧지역에는 은주청동기문화가 燕山을 거쳐 大凌河유역으로 확산된다. 특히,대릉하 상류의 喀左縣 등지에서 箕侯方鼎을 비롯한 은대의 銅器가 위영자문화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16) 이를 기자의 동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17)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하가점문화와는 달리 그 문화층이 매우 엷고 문화의 범위도 요하를 넘지 못하는 한정된 지역의 문화로18) 곧 하가점 상층문화와 요녕지역의 琵琶型동검 문화에 압도됨을 알 수 있다. 기자국을 상징하는 기후동기도 이후에는 주로 중국내지인 山東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19), 이것도 대부분 춘추시대 말기에는 소멸된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문화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이주한 은주세력이 요하선을 경계로 토착세력에 저지되어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요하이동의 토착세력으로 비정되는 주민집단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하는 종족은 朝鮮 및 肅愼인데, 현존하는 문헌사료에 의하는 한 단군조선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문화층이 엷다는 것은 이 지역에 진출한 세력의 존속기간이 짧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후동기가 기자국의 상징이라면 이러한 기자국은 결국 토착세력에 밀려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늦어도 춘추말기에는 소멸 하였음을20) 의미한다.

  지금까지 검토한 사실을 종합하면 은주교체기에 기자를 비롯한 은족의 일부가 연산에서 대릉하유역 일대로 진출하여 일시간 존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않아 단군조선을 비롯한 토착세력의 강력한 저지를 받아 결국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중국의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늦어도 춘추에서 전국으로의 이행기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대릉하 유역에 기자국이 실재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古記」의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바로 기자국의 소멸 이후에도 단군조선이 존속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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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찬가지로 기자국이 중국사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근 1,000년간 난하유역에 존재하였으며 준왕이 기자국의 마지막 왕이라는 견해는 고고학적 자료나 문헌사료의 해석이 자의적이고 논리의 비약이 심하여 성립할 수 없다.21) 이러한 견해의 주된 논지는 리지린의 난하=요수설을 토대로 秦 長成의 동단이 喝石山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아래, 북경교외에서 발견된 서주시대의 箕侯銘이 있는 청동기를22) 증거로 은주교체기로부터 전국시대 말기까지 난하서부에 있던 기자국이 진의 통일세력에 밀려 난하동부연안으로 이동하였으나, 위만에게 멸망될 때까지는 계속 존속하였으며, 대릉하유역에서 발견된 기후동기가 바로 B.C.2세기초 기자국이 멸망되면서 남겨놓은 유물이라고 본 점이다.

  그러나, 리지린의 난하=요수설은 고조선의 후기 도읍지인 왕검성을 요동에 두기 위하여 선진 문헌의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다.23) 한편,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燕秦長成은 요서 내륙을 가로질러 요하이동에까지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24) 뿐만아니라 기후동기가 집중 발견된 객좌, 건평 등 대릉하 상류는 기자국이 존재하였다는 갈석산이 있는 灤河 동부연안 보다는 훨씬 동북쪽이며, 이곳에서 발견되는 기후동기는 북경이나 산동지역의 기후동기보다 이른시기인 殷末에 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은주청동기문화가 하가점상층문화와 병행하여 층위를 두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나 사실은 이와 정반대인 것이다. 특히, 魏營子문화 가운데 발견되는 동기는 북경인근의 西周시대 早期의 墓에서 나오는 출토동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25)

  이러한 사실은 기자국이 진에게 쫒겨 난하 동부연안으로 밀려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오히려 은주교체기에 대릉하유역으로 이동해왔던 기자국이 단군조선을 비롯한 토착세력에 밀려 서주시대에는 난하서부로 후퇴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B.C.3세기에 중국의 통일제국 秦․漢과 맞겨루던 고조선의 준왕이 이미 수백년전에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늦어도 춘추에서 전국으로의 이행기에는 소멸된 기자국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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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기자의 동래를 殷人 기자의 이동차원을 떠나 민족이동사의 입장에서 우리민족과 친연성이 있다고 믿어왔던 山東일원의 고대 東夷族26)중의 한가지로서의 箕子族團이 이동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27),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경우 흔히 고조선계 지명인 險瀆의 이동을 중요한 논거로 삼는데, 만일 험독이 기자족이 중국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남긴 지명이라면 중국에 가까운 험독이 보다 이른시기의 문헌에 나와야 할 것이나 사실은 이와 정반대인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의 팽창에 따라  요동군이 서쪽으로 이치되는 과정에서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현도 서쪽으로 이동한 결과일 뿐28) 기자족의 동래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진한시대 이후의 중국측 자료에 나오는 ‘조선이 기자의 후예’라는 潤色된 표현을 그대로 신빙한 때문에 나온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기자일족이 연산에서 대릉하 일대로 이주한 은주교체기와 보다 가까운 先秦시대의 문헌에서는 기자와 조선이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었다가 보다 후대인 秦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기자가 조선지역에 옮겨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秦漢帝國의 성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형성된 中國的 華夷觀에 의하여 주변민족의 역사를 상대적으로 비하하고자 하였던 중국인의 왜곡된 역사서술의 결과라고 생각된다.29)

  최근 이종욱은 단군신화를 재해석하여 고조선은 ‘범’, ‘환웅’, ‘기자’ 등으로 상징되는 殷 유민의 자극에 의해 은말 주초인 기원전 12-11세기에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영역은 方百里 정도라는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였다.30) 단군신화를 재해석하여 고조선의 건국이 은 유민의 자극에 의해 기원전 12-11세기 경에 이루어 졌다는 견해는 참신하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된다.

  범으로 상징되는 집단을 이주세력으로 보았으나 그 이유를 단순히 殷의 의기나 무기에 범의 도안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은에 범과 관련된 기치가 있다 하더라도 범의 상징이 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은의 중심지인 河南省보다는 동북지역에 범과 관련된 전설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은문화는 북경을 경계로 紅山文化를 계승한 夏家店下層文化와 교차하고 있으며 양 문화는 연원이 다른 문화이지만 상호영향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은의 기치에 범의 상징이 들어가 있는 것은 오히려 동북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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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별다른 논증없이 桓雄집단도 은의 유민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단군신화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해석으로 받아 들이기 어렵다.31) 왜냐하면 단군신화에 반영된 역사적 사실을 어느정도 믿는다면 단군신화에 나타난 고조선 건국은 箕子를 비롯한 殷 유민의 大凌河유역 진출 이전에 일어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범으로 상징되는 은 유민이 먼저 이동해 오고, 은말주초에 환웅으로 상징되는 은 유민이 이동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에 자극을 주었으나, 국가형성의 중심세력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모순을 보이는 등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하여 은 유민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데, 이는 은말 주초의 동북아 정세에 대해 잘못 판단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고고학적으로도 이러한 가설은 성립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殷 멸망이전 은문화의 동북지역 경계선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북경일원으로 은의 멸망이전 殷民의 동북지역으로의 대규모 이동은 상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은 유민의 출현이 고조선의 국가적 발전에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라 하라도 고조선의 국가형성에 참여한 것은 아니며, 桓雄族이 선주 종족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한 것은 기자 등 은유민이 이동해 오기 이전의 사실이며, 이후 은말주초에 대릉하유역에 箕子國이 실재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단군조선에 관한 거의 유일한 문헌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재음미해 보면, 檀君王儉이 다스리던 아사달 사회는 신석기문화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 청동기사회이며, 부족연맹 형태를 띤 일종의 神政國家로 이해된다. 이와같은 초기국가의 성립연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 과거에는 단군조선의 중심을 대동강유역에 둔 결과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상한선이 B.C.10세기를 넘지 못하였던 까닭에 단군신화에 반영된 고조선의 建國紀年을 입증하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하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면서 어느정도 단군조선의 성립년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가점하층문화 자체를 고조선문화로 보아 단군조선의 건국년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어32)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 그 성격이나 담당주민의 族源이 분명치 않아 그 문화권의 범위 모두를 고조선의 정치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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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이러한 문화가 단군조선의 국가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요서지역의 경우 홍산문화 말기에 이미 神殿건축이 나타나며, 이를 계승한 하가점하층문화 초기에는 ‘古文化古城古國’ 단계로 진입한다.33)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요동지역에도 하가점문화와 병행하여 청동기문화가 개화되는 B.C.1500년기에는 도시국가형태의 초기국가가 출현하였으리라 생각되며,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도 보다 정밀하게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관계사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재해석해 보면, 고조선 중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홍산문화에서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요하중류역의 특정한 지역, 즉 후대에 조선이라 불리워진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 데, B.C.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이 대릉하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의 소멸이후에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로 돌아와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하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34), 당시의 고조선 사회가 중원의 선진문명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고조선의 성장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막연하기만 하였던 고조선의 건국기년에 관한 실마리도 어느정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韓朝鮮의 영역과 대외관계


  고조선의 대중관계가 비교적 객관적인 문헌사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遼寧지역의 문화적 변동과 단군조선을 계승한 한조선의 등장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10-9세기에 이르면 요녕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은주청동기문화를 압도하는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녕비파형동검문화로 바뀌게 된다.35)이러한 현상이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한 자생적 문화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문화적 교체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보다 발전된 청동기 문화의 등장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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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琵琶型銅劍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동검과 多杻細文鏡을 지표문화로 하는 요녕지역의 동검문화는 매우 세련된 농경민의 청동기문화로36) 북한 학계는 요동반도 남단의 崗上, 樓上문화를 근거로 B.C.10세기경에는 노예제국가로서의 고조선이 성립되었다고 보고있으며37), 우리학계에서도 南山根, 十二臺營子 등의 유적이 발견된 朝陽文化에 주목하여 요서의 조양지역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세력이 요동지역에 정착하여 고조선왕국을 건설하였으리라는 견해가 제시된 바38) 있다.최근에는 美松里型土器의 분포지역인 요하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을 고조선의 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39)

  현재의 단계로서는 요서와 요동을 비롯하여 길림,한반도 서북부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중심지가 다양하고 동일한 시기의 일원적 문화로 규정할 만한 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40) 광역의 일원적인 정치적 통일체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힘들지만, 요녕지역에 보다 진전된 정치권력체가 출현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헌사료에도 韓侯라는 명칭을 지닌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B.C. 8~9세기경인 周 宣王대의 저작으로 알려진 ?詩經? 「韓奕」편에 의하면 ’燕나라 근처에 예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韓侯가 있었다.’41)고 한다. 여기서의 韓이란 정치적 대군장을 의미하는 알타이어 한(汗)․칸(干)과 통하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를 姓으로 오인하여 韓侯 또는 韓氏로 기록하였던 것이며, 후대에는 민족명칭으로 발전하였다.42) 한후를 중국의 제후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43), 시경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의 수장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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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이 제정일치시대의 군장 호칭임에 비해 한후는 보다 강력한 군주권을 표현한 명칭으로, 당시의 고조선은 檀君朝鮮이 檀君이란 君長 호칭에 의해 규정되는 바와 같이 韓朝鮮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44) 한조선의 등장이 요하선을 경계로 은주문화와 대립하던 단군조선의 요서 지역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이 시대의 지표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의 분포와 발전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면, 이들은 남쪽으로는 은주문화와 서쪽으로는 유목민족인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45) 大凌河유역으로의 이동기에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늦어도 B.C.7세기경에는 조선지역에 정착하여 명실상부한 조선왕국으로 성장하여 이후 중국문헌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6)

  군장호칭의 변화와 예맥을 함께 통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한조선은 도시국가 단계를 벗어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시경?의 내용에 당시의 한조선이 주및 연과 무역을 비롯한 외교적교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후대의 사료이긴 하지만 ?逸周書? 「王會」편에도 이보다 앞서 周 成王대에 고조선의  구성 부족이었던 穢人의 來朝기사가 보인다.47) 이러한 일련의 사료에 보이는 중원제국과의 외교적 교섭사실은 바로 비파형동검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조선의 국가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Ⅲ. 고조선의 발전과 對中關係의 전개



  1. 古朝鮮王國과 齊의 무역관계


  고조선은 민족이동기부터 중국의 은, 주는 물론 북방 유목민족과 대립, 교섭하면서 국가를 형성, 발전하였으리라 추정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현존하는 단편적인 문헌사료로는 그 전모를 살피기는 어렵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선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管子?를 비롯한 ?戰國策?․?山海經? 등 先秦時代의 문헌에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종래와는 달리 국가로서의 조선의 명칭과 위치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고조선의 발전에 따른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해진 결과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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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기원전 7세기경의 사실을 전하는 관자에는 ‘朝鮮’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올 뿐만아니라48), 조선의 문피를 7대 교역품으로 들고있으며, 朝鮮의 특산물인 무늬있는 짐승가죽(文皮)과 털옷을 후한 값으로 사준다면 팔천리 떨어진 조선이라도 來朝할 것이라고 하여,49) 고조선이 제와 호피 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후대이긴 하지만 ?사기? 「貨食列傳」에도 연이 진번, 조선 등과 교역함으로써 무역의 이익을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조선 지역에 명도전, 일화전, 포전 등 다량의 중국화폐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50) 당시의 고조선이 연, 제 등과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하여 활발한 교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51)

  고고학적으로도 요녕의 비파형동검문화에서 중원의 농경문화나 산동지역의 동이계의 문화와 빈번한 접촉을 한 현상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문화교류가 흔히 생각하듯이 중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문화유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동북부에서 나오는 지석묘나 하북일대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 등은 요녕지역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이는 고조선의 중원과의 무역 등 교섭의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52)

  한편, 앞에서 소개한 先秦문헌에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어 종래부터 이를 둘러싼 논쟁이 있어왔다. 특히 북한학계에서는 고대의 遼水를 난하로 비정하고 조선의 초기영역이 서쪽으로 난하에까지 이르렀다는 설을 주장하여 우리 학계에도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53) 그러나, 이미 소개한 ?관자?에는 조선이 8천리 바깥에 있는 나라라고 하였다. 물론 8천리라는 기록은 과장된 표현으로 구체적인 거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관자의 저자로 가탁된 管仲이 山戎을 정벌하기 위해 난하동부의 孤竹國까지 원정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고조선이 난하를 경계로 연과 국경을 접했다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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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전국책? 「연책」의 ‘燕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는 蘇秦의 유세를 토대로 난하=요수설을 전개한 리지린의 연구는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리지린의 경우 특별한 목적을 갖고 사료를 발췌 해석하고 있으나, 같은 사료에 ‘연의 남쪽에는 碣石, 안문의 옥토가 있다.’는 표현을 유의 한다면54) 갈석에 인접한 당시의 난하가 국경인 요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호한 선진시대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 조선의 정확한 위치를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당시의 조선은 연, 제 등 중국의 동북부 지역으로부터는 어느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으며, 遼東과 인접한 列水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고조선의 영역이 난하에까지 이르러 이를 경계로 연과 접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오히려 고조선이 요서 내륙의 지리적장벽에도 불구하고 중원제국과 활발한 교섭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당시 고조선이 상당한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하여 원거리 교역을 빈번하게 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고조선이 이미 진전된 왕국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고조선왕국의 발전과 對 周燕外交의 성격


  무역을 비롯한 평화적 교섭관계를 유지하던 고조선과 중원제국과의 관계는 동북아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위략?에 의하면


  “연이 칭왕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大夫 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55)


고 한다. 주왕실을 받들기 위해 연을 치려고 했다는 것은 화이관에 의한 후대의 사료적 윤색이라 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고조선이 전국 7웅의 하나인 연과 각축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왕실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강역범위가 어느 정도 들어나게 되며 고조선의 대외 교섭도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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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대륙정세는 전국 7웅이 상호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막북의 匈奴와 東胡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중원을 압박하는 국면이 전개되었으며, 동방에는 부여, 진번 등의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는데, 고조선은 이러한 동북아의 국제정세속에서 중원제국과 치열한 항쟁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의 동아정세와 관련하여 고조선 강역의 대강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고 조 선   강 역 도56)



Ⅳ. 古朝鮮의 移動과 對中關係의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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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對燕戰爭과 古朝鮮의 中心地移動


  고조선과 대립하고 있던 연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연의 전성기인 昭王때(B.C. 311~279)이다. ?사기? 「조선전」에는


  “燕나라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障塞(長城과 要塞)를 쌓았다.”57)


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관련된 ?사기?와 ?위략?의 고조선 관계기사를 종합해보면, 연은 장군 秦開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東胡와 朝鮮을 치고 2천리의 땅을 개척하여 上谷, 魚陽, 右北平, 遼西, 遼東의 5군을 설치하였으며, 조선과는 滿番汗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사기?와 ?위략?의 기록이 서로 달라 논란을 불러 왔으나, ?鹽鐵論?의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천리 바깥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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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기록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 준다. 즉, 고조선이 연에게 상실한 영토는  燕이 東胡로부터 획득한 땅 一千里를 제외한 지역이며, 당시 동호와 조선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대체로 연이 개척한 五郡중 요서와 요동 二郡에 해당되는 지역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滿番汗은 조선과 연의 국경으로 그 위치 비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만번한이 연의 동방진출 당시의 지명이 아니라 漢의 요동식민이 본격화된 후대의 지명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위략?과 ?염철론?의 기록을 ?사기? 「조선전」 기사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만번한은 연의 장새밖의 자연계선을 의미하며,?漢書? 地理志의 요동군의 속현인 汶縣과 番汗縣에 해당한다. 문현이 요동의 千山山脈 서남쪽의 지명인 것으로 보아 번한현도 이와 관련된 지명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59)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千山에 이르는 서쪽 땅 1천리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60)

  여기에서 ?사기? 「조선전」의 燕이 복속시켰다는 朝鮮은 古朝鮮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 영토의 일부임을 알 수 있으며, 이로부터 거꾸로 추정하면 B.C. 3세기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 대릉하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고조선은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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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조선전」에 실려있는 진번의 이동 기록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래에도 진번의 위치에 대하여 在北說과 在南說이 있어 왔는데, 현재에는 黃海道南部說이 통용되고 있다.61) 그러나, 이는 한군현으로서의 진번의 위치에 대한 설명으로는 타당할지 모르나 ?사기?의 진번에 관한 설명으로는 미흡하다. ?사기?의 진번에 관한 기록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진번은 연의 장새가 설치된 요동지역으로부터 ?漢書?「지리지」에 보이는 黃海道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즉, 燕이 眞番․朝鮮을 동시에 복속시켰다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진번은 조선의 남쪽이나 북쪽에 있었다기보다는 燕의 동방진출로를 경계로 조선의 외곽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후 고조선을 병합한 위만조선이 한강유역에 위치한 진국 옆의 진번을 복속시켰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북에 있던 진번이 고조선의 이동과 궤를 같이하여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62)

  진번의 이동으로 미루어보아 이때 고조선도 그 중심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즉,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진번이 고조선의 중심부를 지나 황해도남부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전」의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는 표현은 물론 과장이지만, 어느정도의 사실성을 반영한다고 보면, 그 중심지를 공략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조선도 진번과 함께 그 중심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고 여겨진다.63)

  고조선의 지표문화인 비파형단검이 B.C. 4세기경부터 細型銅劍으로 바뀌고 그 중심지가 비파형동검문화 때와는 달리 요동이 아니라 대동강유역이라는 점도64) 고조선의 이동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對秦關係와 遼東郡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던 고조선은 연을 멸하고 요동에 진출한 진의 통일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사기?에는 진의 동방진출에 대해


  “진이 연을 멸한뒤(연이 공취한 진번과 조선의 고토를 새로 건설한)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진의 옛 空地 上下障에 살았다.”65)


고 모호하게 축약 기록한 까닭에 종래의 ?사기? 해석은 오류를 빚게 되었다. 즉, 秦․漢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종래에는 漢武帝이후에 설치된 漢郡縣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사기?의 기사를 확대 해석하였던 까닭에, 武帝의 東方經略이전의 사실을 기록한 ‘屬遼東外徼’의 대상을 古朝鮮 전체로 파악하였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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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염철론?과 ?위략?의 기사를 염두에 두고 ?사기? 조선전기사를 정밀히 읽어보면 이러한 해석의 모순을 알 수 있다. ?사기?의 기록은 위만의 출자와 관련하여 燕․秦․漢代에 걸쳐 중국세력의 동방진출의 消長을 설명한 것이지 朝鮮이 계속하여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설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속요동외요’는 진이 고조선 전체를 소속시켰다는 뜻이 아니라 연의 장새가 설치된 朝鮮․眞番故地를 秦代에 새로이 개척한 요동외요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67)

  한편, 秦故空地를 문자 그대로 ‘빈땅’으로 보아 秦과 古朝鮮과의 완충지로 이해하고 진이 연보다 후퇴한 것으로 보는 리지린의 견해가 제시된 이후 이를 따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68), 이중의 장새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단순한 공지가 아니라 秦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근 요서지역에서 발견된 연진 장성은 남북으로 약 40km의 사이를 두고 병행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상하장은 혹 이러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이 요동에 진출한 것은 연의 수도 薊를 공략한 4년 뒤인 B.C. 222년의 일인 데,?염철론?의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동쪽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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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기록으로 보아 진은 BC. 222년 같은 해에 연의 요동과 고조선을 동시에 친 것이 아니라, B.C.221년 제를 멸하여 천하를 완전히 통일한 뒤 이미 점령한 연의 요동에서 국경선인 패수를 넘어 고조선을 친 것이다. 따라서,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해는 B.C. 221년 이후이며, 여기에서 진이 연보다 후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조선지역으로 더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목적도 단순히 연의 고지를 소속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의 요동과 진이 새로 획득한 고조선의 서부영토를 함께 관할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건설된 진의 요동외요는 이후 중국의 요동 식민의 거점이 된 지역으로 새가 동북의 요새임에 반해서 요는 서남의 요새를 가리킨다는 점으로 보아 후대의 遼東郡治인 襄平(요양)이 아닌가 생각되며,70) 진이 건넜던 沛水는 「위략」의 만번한과 같은 성격의 연과 조선의 국경을 이루었던 자연계선을 의미하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분명하다.

  ‘진이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고 한 ?염철론?의 기사는 물론 과장이라고 할 것이지만, 진의 요동진출이 고조선에 큰 위협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위략?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否王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 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71) 그러나,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朝會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사기?의 표현대로 이중의 요새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에서 출토된 秦戈72)도 진의 일방적인 침략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이와같은 당시 고조선과 진의 치열한 항쟁의 소산물로 보인다.

  다만, 고조선은 이러한 과정에서 연과의 경계선인 만번한 즉, 沛水線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후퇴지역은 ?사기? 「진시황본기」의 ‘땅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조선과 접하였다.’는 기록과73) 한초에 ‘浿水를 건너 망명하여 진의 옛 땅인 上下障에 거주하던 위만에게 준왕이 100리의 땅을 봉해 주고 고조선의 서변을 지키게 하였다.’는 ?위략?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고조선이 진에게 상실한 영역은 대체로 만번한, 즉 천산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으로 보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3. 古朝鮮의 遼東수복과 對漢關係


  진의 요동진출에 따라 고조선은 연과의 경계였던 만번한 이동의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압록강선으로 후퇴하여 진에 대한 유화 외교정책을 구사했으나, 진한의 교체와 흉노의 등장에 따른 대륙정세를 이용하여 요동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고 다시 對漢 강경외교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사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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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이 건국하여서는 그 곳(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故塞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漢 후국)에 소속시켰다.”74)


라고 하여 한초에 진대에 점령하였던 고조선 지역이 거리가 멀어 연(전국시대)이 설치한 요동의 옛 요새를75)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는 지역만을 연 후국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문면 그대로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진대에 건설하였던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하다. ?염철론?의


  “조선이 徼( 秦의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연의 동쪽땅을 强取하였다.”76)


는 기록에서 고조선이 진한 교체기인 B.C. 208~202년 사이에 패수 동쪽에 진이 새로 설치한 국경요새인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진에게 상실했던 패수이동의 땅 즉, 연(한 후국)의 동쪽 지역을 탈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흉노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였던 건국초의 한으로서는 자연계선인 패수에 의지하여 옛(전국시대) 연의 영토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고조선은 패수를 경계로 한과 첨예한 대립관계로 들어가게 된다.

  ?사기?의 浿水는 후기 고조선과 한제국의 경계선이 되는 강으로 이의 위치 비정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으며, 별다른 논증없이 청천강이나 압록강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77) 그러나, 이상의 검토에서 ?사기?의 패수(浿水)는 염철론의 패수(沛水)와 같은 강이 분명하여졌다.78) 다만, 문헌의 성립연대에 따라 표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데, 패수의 지명이 바뀐 이유는 물론 고조선의 후퇴로 패수의 명칭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염철론?과 ?한서? 「지리지」에서 보듯이 전한 말기부터는 요동의 浿水를 대동강유역의 고조선 중심지에 가까운 조선계 지명인 浿水와 구별하기 위해 沛水(?염철론?, ?한서?), 또는 溴水(?위략?)로 고쳐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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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후퇴한 한제국과 浿水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문제의 浿水 또한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 없는 데,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패수는 이에 인접한  소요수와 태자하가 만나는 小遼水 본류 즉, 오늘날의 渾河 하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79)

  즉, 한과 고조선은 연과 고조선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이 위치하였던 천산산맥과 병행하여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자연계선인 패수(소요수=혼하)를 경계로 한은 연이 설치한 요동고새에서 고조선은 진이 개척한 요동외요를 거점으로 서로 마주하며 팽팽한 대립관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패수동쪽의 고토 일부를 수복함으로써 漢帝國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조선사회에는 연,제,조로부터 유이민이 격증하여 동북아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요동지역의 정세변화를 틈타 전국말기부터 연의 고지에서 성장한 위만이80)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조선을 병합함으로써 한국 고대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위만조선이 한제국의 동진에 대응, 강온 양면의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게 되자 한중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게 되었다.



Ⅴ. 맺 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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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가쟁명하는 고조선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하여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구체적인 발전과정과 이에 따른 고조선의 위치 및 강역의 변동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종래에 단편적으로 이해하였던 ?삼국유사?의 「고기」와 ?관자? ?전국책? 등 先秦문헌을 비롯하여 ?사기? ?한서? 및 ?염철론? ?위략? 등 중국측 사료에 전하는 고조선의 대외관계 사료를 최근의 고고학의 연구성과와 관련하여 보다 넓은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 종래의 고조선사연구에서 오류를 범했던 문헌사료의 해석을 바로잡고 그간 간과하였던 몇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대외관계사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조선중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홍산문화에서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은주유민이 진출해오기 전에 이미 대릉하에서 요하~압록강에 이르는 요하유역 문화권내의 특정한 지역, 즉 후대에 조선이라 불리워진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시기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 데, B.C. 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이 대릉하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의 소멸이후에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로 돌아와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 B.C.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단군조선은 요하유역문화권의 변화에 상응하여 비파형동검문화를 지표문화로 갖는 보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이를 한조선으로 이해하였다. 군장호칭의 변화와 예맥을 함께 통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한조선은 도시국가 단계를 벗어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리라 추정하였으며, ?일주서? ?관자? 등의 기록을 통해 늦어도 B.C. 7세기경에는 고조선왕국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3) B.C. 7세기경 성립한 고조선왕국의 전기에는 중원의 제, 주, 연 등의 왕조와 호피, 비파형동검 등의 교역을 비롯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고조선왕국과 교섭하였던 주변 제민족과 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여 전성기 고조선의 강역이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大凌河유역에서 東胡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大同江 이남을 경계로 辰國과 이웃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예맥․부여․진번․임둔․숙신과 접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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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동북아시아에 철기가 보급되는 고조선왕국 후기에 이르면 고조선은 연․진․한 등 중원제국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는데, ?사기? ?염철론? ?위략?의 기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과정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특히 ?사기?의 고조선 관계기사에 대한 종래의 해석상 오류를 ?염철론?의 기사와 비교하여 상세히 검토하였다. B.C. 4세기에 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조선은 오늘날의 만번한으로 표현되는 천산에서 대릉하유역에 이르는 서쪽영토를 상실하고 진번과 함께 남하하여 그 중심지를 대동강유역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어 통일제국 진이 등장하자 고조선은 진과의 전쟁에서 압록강이서로부터 요동반도에 걸친 영토를 재차 상실하였으나 진의 동진을 압록강선에서 저지하여 주권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흉노의 등장과 진한의 교체라는 동북아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한초에는 진에게 상실하였던 압록강이서의 실지를 회복하고 진이 설치한 요동외요를 공략하여 한제국과 패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였음을 밝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간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던 고조선과 한과의 국경선인 ?사기?의 패수 위치를 종래와는 달리 요동의 소요수(오늘의 혼하)임을 논증하였다.

    5) 끝으로 패수동쪽의 고토 일부를 수복함으로써 漢帝國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조선사회에는 중국계 유이민이 격증하여 동북아정세의 변수로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세력을 토대로 한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조선을 병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위만조선의 건국자인 만왕의 출자를 종래의 이해와는 달리 연왕 노관의 부장이 아니라 전국말기부터 요동지역에서 성장한 정치세력임을 첨언하였다.

  이와같은 검토의 결과 현존하는 문헌사료에 반영된 고조선사는 어느정도 체계화되었을 것으로 믿어지며, 고조선이 주변세계에 대응하여 국가를 형성, 발전시켜 나아갔던 보다 역동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만, 워낙 영성한 사료를 종합하였을 뿐만아니라 고고학에 문외한인 까닭에 논리의 비약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사의 체계화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다 구체적인 연구를 통하여 보완할 것을 기약하며 동학제현의 질정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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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6월 초고, 1999년 5월 수정탈고 ; 1993년 이후에 나온 고조선에 관한 연구 성과를 일일히 반영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추후에 다시 보강할 예정이다. 양지하시기 바란다.)

잠시 잃어 버린 우리의 기상, 역사 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