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은 스포츠 뉴스의 마지막 꼭지를 채우는 해외 스포츠에 불과했다. 가끔 ‘볼쇼이 아이스쇼’ 따위를 보며 감탄할 뿐, 한국의 피겨 선수가 몇 명이나 있는지,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어느 정도의 기량을 발휘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2005년, 김연아라는 선수가 등장했다. 이미 2004~2005 시즌에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2위를 차지한 김연아는 2005~2006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감탄하기 보다는 신기하게 바라 봤다. 한국에도 피겨 유망주가 나타났단 사실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 때만 해도 ‘그냥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윤종신의 아내이자 라익이 어머니로 유명한 전미라도 현역 시절 윔블던 대회 주니어 결승에 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연아는 달랐다. 김연아는 시니어가 된 2006~2007 시즌에도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랑프리 파이널은 1~6차 대회에서 상위권에 오른 6명만 출전하는 ‘왕중왕전’이다.
김연아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로 도약하자,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모델로 한 CF가 TV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문근영에게서 ‘국민 여동생’이라는 닉네임도 물려받았다.
10대 소녀에겐 너무나 가혹한 부담들
출처 - 연합뉴스 사람들이 김연아를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커다란 부담도 함께 떠안게 됐다. 대한민국에 세계적인 피겨 선수는 오직 김연아 한 명 뿐이었고, 사람들은 한국 피겨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가 세계 피겨 역사도 다시 써주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CF를 찍거나 TV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면, ‘연습을 게을리 하는 게 아니냐’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고, 피겨의 ‘F’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라이벌’ 아사다 마오처럼 ‘트리플 악셀’을 해야 한다며 그녀를 다그쳤다. 10대 소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부담이었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 모든 것을 뿌리치고 2007~2008 시즌에도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김연아는 ‘뛰어난 스포츠 스타’를 넘어 철부지 꼬마 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국민 스타’로 발돋음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무책임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랑프리 파이널 2연패라는 금자탑을 이룬 김연아에게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을 기대했다. 김연아는 지난 2년 동안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연속 동메달을 차지했지만, 사람들이 느끼기에 ‘세계 3위’는 더 이상 자랑스런 성적표가 아니었다.
그랑프리 파이널 3연패 좌절... 김연아의 눈물
출처 - 마이데일리 작년 12월, 2008~2009 시즌 그랑프리 파이널이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됐다. 사람들은 이미 2회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을 재패한 김연아의 우승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 들였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TV 중계 카메라는 선수 대기실 복도까지 김연아를 따라 붙었고, 관중들은 그녀의 연기가 끝날 때마다 수 천 개의 인형을 링크로 던지며 환호했다. 김연아도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환호에 보답했지만, 국내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한 김연아의 부담은 생각보다 컸다.
대회 직전에 심한 감기 몸살 증세를 보인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간신히 1위를 차지했지만, 프리 스케이팅에서 두 번이나 실수를 저지르며 아사다 마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 것이다.
아쉬움보다는 안쓰러움이 컸다. 대기실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무책임한 기대가 소녀의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김연아는 좌절하지 않고, 두 달 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189.07점으로 여유있게 금메달을 목에 걸며 ‘피겨퀸’의 자리를 재확인했다. 2위 조아니 로세트(캐나다, 183.91점)와는 5.16점 차이였고,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 176.52점)와는 무려 12.55점의 차이를 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프리 스케이팅에서 3회전 룹 점프를 시도하다가 넘어지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꿈의 200점’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매번 자신의 세계 기록을 경신하는 쇼트 프로그램에 비해 프리 스케이팅이 약하다는 섣부른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랑프리 파이널-4대륙 선수권-세계 선수권 석권
출처 - 로이터 드디어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가 시작됐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김연아는 여러 가지 부담이 많았다.
방송 인터뷰에서 “연습을 방해받은 적이 있다”라는 발언을 해 일본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앞서 열린 WBC 때문에 이번 대회를 김연아와 마오의 ‘한일전’으로 몰고 가는 시선도 불편했다.
가장 큰 두려움은 ‘김연아의 우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이제는 상대와 얼마나 많은 차이를 벌렸는지, 얼마나 좋은 점수를 받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스포츠 선수에게 이보다 더 큰 부담이 있을까?
그러나 김연아는 이 모든 것을 이겨냈다. 28일에 열린 쇼트 프로그램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무려 76.12점을 받았다.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얻었던 72.24점을 불과 한 달 만에 경신한 것이다.
29일에 벌어진 프리 스케이팅에서도 김연아는 131.59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총점 207.71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꿈의 200점'도 달성했다.
온갖 부담 이겨내며 진화하고 있는 ‘괴물’
사람들은 흔히 김연아를 ‘피겨 요정’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빙판 위에서 그녀는 ‘요정’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온갖 부담을 모두 이겨 내고 점점 강한 선수로 ‘진화’하는 김연아를 보면, ‘요정’보다는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듯 하다. 그녀의 담대한 성격과 뛰어난 집중력을 보면, 도저히 10대 소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물론, 그녀의 아름답고 우아한 연기와 귀엽고 깜찍한 얼굴을 보며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 야구 대표팀의 유격수 나카지마에게 ‘스포츠맨십이 뛰어나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4대륙 선수권대회, 세계 선수권대회를 모두 석권한 김연아의 마지막 목표는 내년에 열릴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이다. 이는 김연아를 지도하고 있는 브라이언 오셔 코치의 못 이룬 꿈이기도 하다.
분명 현 시점에서 김연아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다. 그러나 이제 김연아에게 더 이상 ‘올림픽 금메달을 꼭 따내야 한다’는 부담은 주지 말자. 이미 그녀는 우리에게 더 할 수 없이 많은 기쁨과 감동을 안겨 주지 않았던가.
내년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오든, 우리가 김연아에게 전해줄 말은 ‘고맙다’는 인사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귀여운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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