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텅 빈 무대에서 격정적인 춤을 춘다. 그 춤은 열정을 불사르는 춤이 아니라 오열을 토해 내는 춤이다. 낡은 녹음기에선 오래된 러시아 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고, 그 곁엔 통곡하는 여인이 있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듯한 이 남과 여는 어떤 사연을 안고서 이 곳에 함께 한 것일까?
우측 사진 설명 : 감독 테일러 핵포드 ▶
누군가 한 편의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 영화를 자주 찾게 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 자체의 재미나 완성도 때문이라든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 라든지, 미려한 영상미 때문이라든지, 영화 전체를 수놓는 아름다운 음악 때문이라든지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저 장면 때문에 산지기는 한 편의 영화를 1년에 몇 번씩 다시 찾는다.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발레리노의 고뇌에 찬 춤과 스피커를 뚫고 나올 듯한 한 사내의 노래 때문에 파렴치한 영화의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무던히도 자주 한 편의 영화를 다시 본다. 개봉 당시 단체관람 온 고교생들 틈에 끼어서 봤던,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 영화. 망명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Mikhail Baryshnikov 주연의 [White Nights 백야(1985)].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미국 출신의 상업영화 감독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다. 이 영화는 [An Officer And A Gentlemen 사관과 신사(1982)], [Against All Odes 어게인스트 올 오즈(1984)]를 거쳐 테일러 핵포드Taylor Hackford가 연출한 세 번째 작품으로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불공정한 정치관을 가진 영화다.
관객의 환호 속에 공연을 끝낸 망명 무용가 니콜라이 로드첸코(미하일 바리쉬니코프Mikhail Baryshnikov)는 다음 공연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고, 비행기는 해가 져도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땅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간다. 니콜라이의 바람은 그저 단 1초라도 빨리 이 '하얀 밤'을 통과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이런 니콜라이의 바람을 묵살하고, 비행기는 기체 고장으로 백야의 땅에 불시착한다. 니콜라이는 이제 자신의 예술과 자유를 위해 도망쳐 나온 그 구속의 땅에 되돌아 온 것이다.
오랫동안 니콜라이를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KGB가 굴러들어 온 떡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KGB는 월남전에 반대하여 부대를 탈영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미국 출신의 전직 탭 댄서 레이몬드(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와 소련인 아내 다르야(이사벨라 로셀리니Isabella Rossellini)의 집에 니콜라이를 머물게 하며 회유에 들어간다. 거기에 더해 니콜라이의 옛 연인이자 현재는 소련 당국의 간부가 되어 있는 갈리나 이바노바(헬렌 미렌Helen Mirren)를 보내 그의 본국 귀환을 종용한다.
이후의 스토리는 구태의연하다. 니콜라이 회유작전에 참여했던 세 명의 남녀가 모두 니콜라이의 자유에 대한 의지에 감동 받아 니콜라이 백야 탈출극의 공범이 되고, 갈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미국 대사관으로 무사히 탈출하는 그런 내용이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둘째 치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결코 옳지 못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결론이 갈등의 축이었던 니콜라이와 레이몬드를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설정에 이르게 되면 이 영화의 골자가 너무나 노골적인 '자유주의 미국 만세'임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영화의 주제는 '빵보다 소중한 자유'인 셈인데, 흑인 탭 댄서인 레이몬드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도 '빵보다 소중한 자유' 때문일까? 산지기의 생각에는 아마도, 신념보다 소중한 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인 니콜라이 로드첸코를 연기한 배우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실제 구 소련에서 서방세계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Mikhail Baryshnikov다. 볼쇼이 발레 이전에 구 소련의 발레를 대표했던 키로프 극단이 탄생시킨 세계적인 스타로, 금세기 최고의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Mikhail Baryshnikov는 표현의 자유라는 예술가들의 으뜸 덕목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해 무용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다. 그의 무용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은 이 영화의 도입부에 실연 된 현대 무용 [Le Jeune Homme Et La Mort' Choreographed 젊은이의 죽음]에서 관객들에게 입증이 되었으며, 또 다른 춤에 관한 영화인 허버트 로스Herbert Ross 연출의 [Gigell 지젤(1987)]에도 주연으로 출연해 완벽한 춤과 제법 틀이 잡힌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정반대의 이유로 미국을 버리고 소련으로 망명한 탭 댄서 레이몬드 역에는 에미상 수상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가 열연한다. 전문 탭 댄서이자 연극배우이기도 한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는 이 영화 이전에 이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olla 감독의 영화 [Cotton Club 카튼 클럽(1984)]에서도 화려한 탭 댄스를 선보인바 있다. 니콜라이의 옛 연인 갈리나 이바노바를 연기한 배우는 영국 출신의 지성파 배우 헬렌 미렌Helen Mirren이다. 틴토 브라스Tinto Braas 감독의 영화 [Caligula 칼리귤라(1978)]에서 말콤 맥도웰Malcom McDowell과 열연했고,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erway 감독의 [The Cook, The Thief, His Wife & Her Lover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에서도 정상급의 연기를 선사했던 배우다. 아일랜드 정치사를 배경으로 한 팻 오코너Pat O'Connor 감독의 [Cal 칼(1984)]에서도 열연한 바 있으며, 최근 작품으로는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 감독의 [Gosford Park 고스포드 파크(2001)]가 있다.
레이몬드의 소련인 아내 다르야를 보고 있으면 타계한 대배우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이 떠 오른다. 크고 맑으며 우수에 찬 눈동자라든지,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뽀얀 피부에 도톰한 입술이며 모든 이목구비가 젊은 시절의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이 환생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Isabella Rossellini는 바로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과 이태리 네오-레알리즘계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이 영화에서는 연기가 다소 서툴다 싶었지만 다음 해인 1986년에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감독의 [Blue Velvet 블루 벨벳(1986)]에서 섬뜩한 연기를 선사한 바 있다. 이후의 영화들도 같은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감독의 [Wild At Heat 광란의 사랑(1990)]이라든지 로버트 저멕키스Robert Zermeckis의 유일한 컬트 영화 [Death Becomes Her 죽어야 사는 여자(1992)]등 주로 비주류 영화에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고 보니, 두 명의 여배우 모두 뛰어난 미모와 지성미를 자랑하지만 출연하는 영화들은 주로 비주류 영화 군에 속하고 있다.
간혹 영화를 보다 보면 영상보다 음악에 먼저 사로잡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이 영화도 그런 류의 영화에 해당한다. 미셸 콜롬비에David Foster가 전체 스코어를 담당한 이 영화의 음악은 영상미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두 춤꾼이 주인공이다 보니 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루 리드Lou Reed가 노래하는 <My Love Is Chemical>이나, 존 하이앳John Hiatt의 <Snake Charmer>가 풍겨내는 관능미도 뛰어나고,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의 <Far Post>도 뛰어난 트랙이다. 음반의 제작을 담당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가 직접 연주에 참가한 <Tap Dance>도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거의 모든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는 'Love Theme'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발라드 곡이 한 곡씩 꼭 실려 있곤 하는데, 이 영화에는 필 콜린스Phil Collins와 매릴린 마틴Marilyn Martin이 함께 하는 <Separate Lives>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을 주제가로 선정을 하는데,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 음반에는 주제가가 수록이 되어 있지 않다. 이 영화의 주제가는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노래한 <Say You, Say Me>였었는데,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의 소속사인 모타운과 영화 사운드트랙의 저작권을 가진 A&M간의 소유권 분쟁때문에 영화에서는 들을 수 있지만 사운드트랙에는 수록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이 사운드트랙을 구입하셔도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의 주제가는 들으실 수가 없다.
이제 서두에서 끄집어 낸 이야기를 마무리를 해야 되는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노래길래 20년 동안 두고두고 영화를 다시 보게 했을까? 영화 내용에서 8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별했다가 다시 만나는 니콜라이와 갈리나의 첫 재회는 니콜라이와 레이몬드가 함께 있던 연습실에서 이루어진다. 첫번째의 재회에서 갈리나는 애증으로 닫혀 버린 마음을 쉽사리 열려 하지 않는다. 두 번째 만남은 레닌그라드의 유명한 극장 키로프에서 이루어진다. 갈리나는 그 곳에서 지난 십 수년 간 청취 금지 곡이었던 어떤 남자가수의 투박한 노래를 듣고 있다. 단순한 통기타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그 노래는 니콜라이와 갈리나가 젊은 시절 즐겨 듣던 구 소련 저항음악의 대명사인 블라드미르 비소츠키Vladmir Vyssotsky의 <Koni Priveredlivie 뒷걸음질 치는 말>이라는 노래다. 곧 이어 니콜라이가 등장하고 갈리나를 향해 '당의 간부라는 사람이 금지 곡을 듣고 있냐'며 빈정거리듯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 노래 한 곡 때문에 둘은 서로 감추어 두었던 속내를 털어 놓게 된다. 니콜라이는 자유에 대한 신념을 춤으로 표현한다. 그들에게 무한한 자유와 변혁의 의지를 심어 주었던 '발란 쉰의 춤'을 오열하듯, 토해 내듯 추어낸다. 니콜라이의 오열을 지켜 보는 갈리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런 그녀를 니콜라이가 감싸 안으며 노래는 서서히 끝이 난다.
이 노래는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함축하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지만 그 음원이 적성국가인 구 소련의 음악인의 것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운드트랙에는 담기지 못 했다. 영화 개봉 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구 소련 정부는 글래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깃발 아래 문호를 개방하고, 드디어 국내에도 적성 국가인 구 소련의 음악들이 소개가 되었다. 생소한 러시아 메탈 밴드들의 연주가 실린 [Rocking White Nights(1990)]라는 음반이 시리즈로 발매가 되어 상트 페테스부르그Sankt Petesburg의 <Confession>이라는 곡이 TV 드라마에 삽입이 되기도 했다. 그 노래는 또한 최 성수의 <고백>으로 번안되어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보다 더 반가운 음반은 블라드미르 비소츠키Vladmir Vyssotsky의 시와 노래들을 실은 두 장의 음반이었다. 그 음반들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문제의 노래 <Koni Priveredlivie 뒷걸음질 치는 말>이 수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글 출처 : 2003. 12. 29. 山ZIGI VINAPP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