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들

기원전만5천-만3천년 [라스코 동굴화]Grotte de Lascaux

바래미나 2007. 8. 13. 01:53
                                                   기원전만5천-만3천년 [라스코 동굴화]Grotte de Lascaux

[라스코 동굴화]Grotte de Lasc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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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코 동굴[Grotte de Lascaux]

(영)Lascaux Grotto.
지금까지 발견된 선사시대 예술품 중 가장 뛰어난 벽화가 있는 동굴.

1940년 9월 4명의 젊은이가 처음 발견했으며, 프랑스 도르도뉴 몽티냐크

근처 베제르 계곡의 절벽 위쪽에 있다. 하나의 주 동굴과 3~4개의 좁고

긴 방으로 구성된 동굴의 벽면은 새기거나 선으로 그리거나

채색한 동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그림은 밝은 바탕에 노란색·붉은색·갈색·검은색 등의

다양한 색채로 되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벽화에는 뿔이 '비틀림 화법'으로

묘사된 3마리의 거대한 들소, 신화적 동물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되는 이상하게

생긴 일각수(一角獸) 형태의 동물, 여러 마리의 고라니·황소·말, 강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을 그린 듯한 여러 마리의 수사슴 머리와 목 등이 있는데,

이 그림은 모두 이야기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 몸체나 동물 가까이에

그려진 많은 화살과 덫을 통해 볼 때 이 동굴은 오랫동안 사냥과 주술의식을

행한 중심지였다고 믿어진다. 이 벽화의 연대는 그림 양식,

그려진 동물 종류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결과로 미루어

후기 오리나시안(페리고디안) 문화기(BC 15000~13000경)로 추정된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완전한 상태였으나 곧 일반에 공개됨으로써 생생한

색채가 바래고, 벽화 일부에서 녹색 곰팡이가 번지기 시작하자 1963년

다시 폐쇄되었다(→ 오리나시안 문화).

알타미라 동굴

지구가 성경에 계산된 대로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고 사람도 이 계산에 따라 6,000여년 전에

에덴동산에서 태어났다고 믿어온 유럽 사람들에게 인류의 조상이 짐승과 다름없이 살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었다.인류의 조상이 돌을 쪼개 만든 연모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저며내며 동굴에서 살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경꾼 가운데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에 사는 귀족 돈 마르첼리노 상스 데 사우투올라가 있었다.

그는 옛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사우투올라는 도르도뉴 동굴을

발견한 피에를 찾아가 자기도 옛사람들이 남긴 자취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피에는 도르도뉴

동굴을 어떻게 찾았는지 설명하고는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스페인에도 동굴이 많으니 반드시 훌륭한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우투올라는 1868년 어떤 사냥꾼이 산탄데르에서 서쪽으로 30㎞ 떨어진 알타미라

지역을 헤매다가 동굴 하나를 발견했던 일을 기억해냈다.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자마자

이곳저곳 수소문해 그곳을 찾았다.동굴은 칸타브리아산 북쪽 비탈의 풀이 우거진 곳에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석기시대 사람들이 썼던 것으로 보이는 짐승 뼈와 부싯돌 부스러기 따위를 찾아냈다.

1879년 여름,사우투올라는 열두살 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가 동굴을 조사하는 사이 마리아는 혼자 굴 안을 돌아다녔다.언제쯤인가,아버지가 잠깐

땀을 들이려고 허리를 펴보니 딸이 보이지 않았다.깜짝 놀라 이곳저곳 찾아보니 마리아는

동굴 안쪽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사우투올라는 얼른 램프를 가져다가 밧줄에 매달아 밑으로 내려보냈다.그러고 나서 자기도

아이를 구하려고 내려갔다.그곳은 구덩이가 아니라 꽤 널찍한 굴이었다.천장 한 귀퉁이가

무너져 막혀 있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굴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신기한 듯 램프를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마리아의 입에서 갑자기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빠,이쪽으로 와보세요. 소예요!”

“뭐,소가? 어디?”

놀라기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이런 동굴 안에 소가 있다니.

동굴의 벽화 발견

사우투올라가 급히 달려가 보니 마리아는 주머니처럼 들어간 동굴 안에 있었다.

그곳은 천장이 너무 낮아서 몸을 접다시피 해야 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리아의

손에서 램프를 받아들고 딸이 가리키는 쪽으로 높이 쳐들었다. 과연! 들소가 있었다.

바위에 그려진 검붉은 들소가.

들소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천장에는 커다란 들소 수십마리가 살아 움직이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모두 빨강·보라·검정 빛깔로 칠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멧돼지 3마리와 말 2마리,이리 1마리를

빼고는 19마리가 들소였다. 거의 바위의 결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그린 뛰어난 솜씨였다.

동굴에는 벽화말고도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제사드릴 때 썼던 막대기와 짐승 무늬를

새긴 칼,뼈,부싯돌 부스러기 같은 선사시대 유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널려 있었다.

1880년 사우투올라는 ‘알타미라’동굴에서 발견한 그림들을 옮겨 그려 책으로 펴냈다.

책을 보고 많은 사람이 알타미라를 찾아왔는데,동굴에 들어가 보고 나서는

사우투올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림들은 거의 그보다 먼저 그려진 붉은색이나 검정색 선화(線畵) 위에 물감으로 그려져 있어서

두터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날 유화를 그릴 때 밑그림 위에 계속 덧칠을 해서 마티에르(질감)

효과를 낸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림들은 3차원 효과를 노린 듯이 바위의 도드라지고 오목한 부분을 적절히 활용했다.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동물의 대가리와 배 부분이 되도록 했으며,종종 갈라진 틈조차

그림의 한 부분으로 살려 놓았다.

에밀 카르테이악이라는 학자는 이런 점들을 하나하나 들어 알타미라의 벽화들이 가짜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석기시대 사람이 그렸다니,게다가 며칠 전에 칠한 것처럼 빛깔이

뚜렷한데도 수만년 전에 그렸다고 믿으란 말이요?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억지를 부릴 수가 있소?”

학자들의 의견은 알타미라의 벽화들이 가짜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사우투올라가

명예를 바라고 몰래 그림을 그려 놓았다고 믿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사우투올라는

그 누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진실은 20년이나 흘러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밝혀졌다. 프랑스의 유명한 고고학자 앙리

브뢰이으가 프랑스 남서부와 피레네 산맥의 동굴에서 석기시대 그림을 잇달아 발견했던 것이다.

석기시대의 벽화

브뢰이으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진짜 석기시대 것임을 밝히고,그 그림들이

그처럼 생생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벽화는 매우 진지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므로 동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게다가 빙하시대부터 줄곧 땅 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바래거나 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동굴 벽화들이 진짜라고 밝혀짐에 따라,많은 학자들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와 유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알타미라 동굴 유적은,구석기시대 끝 무렵으로 학자들이 마들렌 문화라고

부르는 때의 것이다.이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은 약 1만1,000∼1만7,000년 전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살았다.

그때 이곳에는 사슴·말·들소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사람들은 한군데 머물러

살거나 짐승들을 따라 옮겨 다녔는데,사냥감은 넉넉했다.그들은 창·칼·덫 따위를 써서 사냥했고,

동굴에서 살았다.그림과 조각이 많다는 사실은 바로 마들렌 사람들에게 (사냥감이 많아)

여가가 있었음을 뜻한다.

브뢰이으는 그들이 사냥감을 많이 얻고자 하는 바람에서도 이 그림들을 그렸다고 추측했다.

“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하고자 하는 동물이며,그들은 그 동물을 향해 주문을 외움으로써 그

것을 잡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아직껏 풀리지 않는 의문이 뒤따른다.그렇다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식량이 되었던 사슴은 어째서 알타미라 동굴 그림에 거의 나오지 않는가.)

그것을 그린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렸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은 그것이 지닌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마들렌 문화,일명 막달레니아

미술이라고 불리는 알타미라의 벽화가 뛰어난 것은,짐승들이 움직이는 순간을 잘 잡아 나타냄으로써

힘차고 살아 있는 느낌을 주며,넉넉하고 묵직한 느낌(量感)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또 현대인이 보아도 탄복하리 만큼 짙고 옅음과 밝고 어두움을 기막히게 조화시켜

입체감을 나타냈다.알타미라 동굴의 들소 그림이야말로 그 본보기이다.

알타미라 동굴은 오늘날 극소수 단체에만 관람이 허용된다.길이가 270m나 되는 동굴의 맨끝

꼬리 부분은 네 발로 기어서 들어가야만 한다.입구에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각(線刻)과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그림의 거실’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로 열두살 소녀 마리아가 “아빠,소예요!”라고 외쳤던 곳이다.

‘그림의 거실’ 천장에는 가로 18m,세로 9m에 동물 25마리가 그려져 있다. 멧돼지

3마리,말 2마리,이리 1마리를 빼놓고는 모두가 들소 그림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군집화가

들소 사냥이라는 목적에 따라 하나의 그림으로 구상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그림의 거실은 사람들이 천장 그림을 잘 볼 수 있도록 바닥을 낮게 파놓았다.

그림들에 쓰인 물감은 자연에서 얻은 황토·적철광·망간 따위다. 적·갈·황·흑색이 쓰였는데,

청색과 녹색은 보이지 않는다. 물감은 가루로 만들어서 거기에 동물 기름 따위를 섞어 쓴 것으로

보인다. 천장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손가락과 나뭇가지,이끼뭉치나 깃털을 이용했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

마들렌 사람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미술가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오리냐크 문화를 누린 사람들이다.

 알타미라와 쌍벽을 이루는 동굴 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라스코 동굴 벽화는 오리냐크 사람들의

작품인데,이것 역시 어린 소년이 발견했다.

1940년 9월12일,도르도뉴의 몽티냐크 마을. 마르셀(17세)·조르주(16)·자크(15)·시몬(15) 네

소년이 베제르 골짜기에 있는 라스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군데 멈추어 서서 풀섶을 헤치고 지름 60㎝쯤 되는 구덩이 둘레를 파기 시작했다.

그 구덩이는 오래 전부터 근처의 옛 성으로 통하는 중세 시대의 비밀 통로일지도 모른다고 전해져 왔다. 소년들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탐험’을 시도했던 것이다(1940년의 신문 보도와

선사미술 교과서에는 소년들이 수풀에서 놀다가 데리고 간 개가 구덩이에 빠지자 개를 구하려고

그 곳으로 내려갔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그때 신문기자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그럴싸하게 꾸며낸 말이다).

두 시간쯤 풀을 뽑고 입구를 넓히자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타났다. 마르셀이 먼저 그리로 들어갔다.

그 뒤를 세 아이가 따랐다. 납작하게 엎드려 배를 땅에 깔고 기기를 10여m.

문득 꽤 넓은 동굴이 나타났다.

소년들은 일어서서 걸었다. 마르셀이 높이 쳐든 램프 불빛이 굴 안을 훤히 비추었다.

천장은 꽤 높았고,갖가지 기괴한 돌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앗,말 좀 봐!”

갑자기 시몬이 소리질렀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 이런 데 무슨….”

마르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조르주가 소리쳤다.

“어,소랑 사슴도 있네!”

라스코 동굴의 말 그림. 풀처럼 보이는 선이 작살인지 풀인지 알 수 없다. 작살이라면

말사냥이 성공하기를 기원한 ‘사냥주술’이다.

네 소년 앞을 수많은 짐승들이 달리고 있었다.어떤 말은 앞발을 치켜들었고,들소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 같았다.동굴 벽은 짐승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들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섰다.길은 점점 좁아지고,벽과 천장은 온통 그림투성이였다.

100m쯤 나아간 그들은 바위가 무너진 곳에서 길이 막히자 되돌아 나왔다.

소년들은 이 일을 비밀에 부쳤다가 그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른,즉 그들이 다니는

학교의 라발 교장에게 털어놓았고,교장은 즉시 손꼽히는 고고학자 브뢰이으에게 알렸다.

브뢰이으가 면밀히 조사한 결과 벽화는 모두 800점이 넘었다.들소·말·사슴·염소 따위가

주로 그려져 있었는데 드문드문 고양이나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짐승들의 크기는 대체로 커서 주(主) 동굴에 그려진 검은 소는 가로 5m가 넘었다.

그림은 빨강·검정·노랑·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았지만,홈을 판 선각화(線刻畵)도 꽤 있었다.

그림 중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이 겹친 것도 있었는데,그것은 짐승을 손쉽게 잡으려는

주술(呪術) 행위였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동굴 안은 주동굴(길이 15.5m,너비 9m)과 거기에 달린 갈래동굴(길이 30m,너비 0.5m),

갈래동굴에서 통로를 따라가다가 갈라진 뒷방(지름 4m),가느다란 통로(길이 25m,너비 1∼3m)

그리고 땅밑으로 5m쯤 꺼진 우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타미라에 이어 라스코 동굴이 발견되자 동굴이야말로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만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임이 명백해졌다.만년 전에 등진 고향을 찾아

관광객이 라스코로 몰려들자 몽티냐크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이 파낸 구덩이를 넓혀 동굴을 공개했다.

라스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한동안 잊혀졌으나,전쟁이 끝난 뒤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소년들이 파낸 구덩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 현관과 계단이 만들어지고,전깃줄을 깔기 위해 굴이

파헤쳐졌다.이 관광명소는 1948년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선사고고학자들이 미처 발굴과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1963년이 되어서야 라스코는 벽화 보존을 위해 공개를 중지했다.

그러나 이미 그 옛날 라스코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많은 도구들이 석수·전기기술자의

곡괭이와 관광객들의 발길에 짓밟혀 거의 사라져버린 뒤였다.